中 총리 리커창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최성흠의 문화로 읽는 중국 정치] 중국 역사 속 승상(丞相)의 길

공자는 노나라에서 정변이 났을 때 잠시 제(齊)나라로 피신한 적이 있는데 이때 "군군(君君), 신신(臣臣), 부부(父父), 자자(子子)"(<논어> '안연')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제나라의 통치자 경공(景公)이 "올바른 정치란 무엇이냐"고 물은 데 대해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정치라 답한 것이다.

가장 공적인 관계인 군신 관계와 가장 사적인 관계인 부자 관계를 나란히 언급함으로써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사회적 관계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단 여덟 글자로 표현할 수 있는 공자의 지혜가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다우려면 "예로써 신하를 부리고, 충으로써 임금을 섬겨야 한다"(<논어> '팔일')는 것이고, 이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父慈子孝)"과 같은 것임을 가르치기 위해 군신과 부자를 나란히 했을 것이다.

정치에 대해 물었던 제나라 경공은 능력이 뛰어난 통치자는 아니었다. 제나라 내란 중에 타의에 의해 왕위에 오른 그저 평범한 임금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통치하던 시기는 제나라의 황금기였던 환공(桓公) 이후 오랜만에 찾아온 부흥기였다. 평범한 임금이 그런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예로써 신하를 부렸기 때문이었다.

경공에게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안영(晏嬰)이라는 걸출한 재상이 있었다. 안영이 사망할 당시의 기록을 보면 경공은 맨발로 뛰다시피 해서 그의 빈소를 찾아가 예전에 자신의 과실을 세 번이나 책망해 주었던 안영이 없으니 앞으로 누가 나의 과실을 바로 잡아주겠느냐며 슬퍼했다고 한다(<안자춘추>). 공자가 생각한 군신관계는 바로 이런 관계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공자도 제나라에 남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군신 관계에 대해 공자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상가들도 많았다. 경공 이전에 제나라의 황금기를 이룩했던 환공 때 재상을 지낸 관중(管仲)은 "군불군(君不君), 즉신불신(則臣不臣)"이라 했다.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면 신하도 신하의 소임을 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위 공자의 문장과 구조가 거의 같은데 '즉(則)' 자 한 글자가 들어가면서 의미에 반전이 생겼다. 어쩌면 공자도 '즉' 자를 넣고 싶었는데 예의 화신인 공자가 임금 앞이라 그리 말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즉' 자를 넣어 "군군, 즉신신"이라 했다면 "임금이 임금다워야 신하도 신하답게 된다"는 뜻이 된다. 공자의 학풍을 이은 맹자가 "임금이 신하를 진흙이나 지푸라기로 여기면 신하도 임금을 원수로 여길 것이다"(<맹자> '이루하')라고 한 걸 보면 맹자는 공자의 속뜻이 무조건 충성을 다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충신이 되지 말고, 양신(良臣)이 되라?

신하는 충으로써 임금을 섬겨야 한다고 했는데 충(忠)의 본래 뜻은 그저 복종하는 것이 아니다. 충언(忠言)이란 단어가 지금도 쓰이는 것을 보면 군왕이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해 간언과 직언을 하라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 신하에게 예를 갖추는 군왕이 그리 많을 리 없다. 아니 한 명이라도 있었을 지 의문이다.

공자는 "예를 다해 임금을 섬기지만 남들은 그것을 아첨이라 한다"(<논어> '팔일')고 말할 정도로 군왕을 대할 때 조심스러웠다. 신하의 길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충신이 되지 말고, 양신(良臣, 좋은 신하)이 되라는 주장도 있었다.

당 태종 때 정치가 위징(魏徵)은 "충신은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지만 헛된 이름만 남기고 죽임을 당하고, 충신을 죽였다는 오명을 군왕에게 안길 뿐이다. 그러나 양신은 자신도 명성을 얻고 군왕도 명군이라 불리게 한다"(<구당서> '위징전')며 스스로 양신이 되겠다고 했다. 아마도 예와 충을 기술적으로 잘 조합하여 나라도 부강하게 하고, 군왕의 권위도 세우고 또 스스로도 부귀영화를 누리는 신하가 위징이 말하는 양신일 것이다.

위징의 관점에서 보면 앞서 얘기한 관중이나 안영뿐만 아니라 진나라의 이사(李斯), 한나라의 소하(蕭何), 촉의 제갈량, 당의 방현령(房玄齡), 원의 야율초재(耶律楚材) 등이 자신의 이름뿐만 아니라 군왕의 명예도 드높인 양신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주군을 도와 대업을 이룬 개국 공신이라는 점이다.

중국 왕조의 건국자들은 대부분 무인들이었기 때문에 전쟁 중에 점령지나 근거지의 관리를 위해서도 그렇고 또 건국 후에 나라의 기틀을 잡기 위해서도 능력 있는 재상이 필요했다. 이런 전통이 제도화되어 역대의 황제들은 지금으로 따지면 총리에 해당하는 승상(丞相)에게 내치를 맡기거나 적어도 그와 의논하여 국정을 운영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승상은 황제의 보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위협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은 승상 제도를 폐지했을 뿐만 아니라 승상을 처형하고 그와 관련이 있는 사람 수만 명을 살육했다. 그 뒤로 청나라가 몰락할 때까지 다시는 승상 제도가 설립되지 못했다.

주원장 자신은 하층민으로서 건국이라는 대업을 이룬 뛰어난 군왕이어서 혼자서 그 넓은 중국 땅을 통치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자손들은 그렇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명나라의 정치는 환관들의 손아귀에 농락당하고 만다. 청나라의 멸망도 따지고 보면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이 한창일 때 책임감 있는 관료는 없고 오로지 서태후(西太后)의 눈치만 살피는 신하들이 궁정에 가득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리커창(李克强)은 양신이 될 수 있을까?

마오쩌둥 시대의 총리였던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유방(劉邦)을 도와 한나라를 건국했던 소하(蕭何)나 유비를 도와 촉한(蜀漢)을 건국했던 제갈량에 비유되곤 한다. 저우언라이는 소련공산당의 지원을 받는 세력이 득세하던 시기에 마오쩌둥을 적극 옹호하여 그를 명실상부한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로 옹립했다.

비록 소련파들의 잇따른 봉기 실패와 당시 소련에서 벌어졌던 스탈린의 대숙청 때문에 상대적으로 마오쩌둥의 노선이 명분을 쌓아가는 시기였기는 하지만 저우언라이의 적극적인 지지가 없었더라면 마오쩌둥은 권력을 장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후 저우언라이는 죽는 날까지 중국의 총리로서 마오쩌둥을 보좌했다. 이를 보면 중국 역사에서 위징이 말한 양신은 어쩌면 저우언라이 한 명뿐일 것 같기도 하다.

저우언라이 이후에 총리를 맡은 인물 중에 화궈펑(華國鋒), 자오쯔양(趙紫陽) 등은 개혁 개방으로 이행하는 정치적 격변기에 공산당 총서기를 지내기도 했지만 단명했다. 다음에 등장한 저우언라이의 양자 리펑(李鵬)은 장쩌민(江澤民) 총서기와 함께 덩샤오핑에 의해 지명된 거나 다름없으니 황제를 보좌하는 승상과는 거리가 멀고, 개혁파와 보수파의 권력 안배라는 성격이 강하다.

다음 총리인 주룽지(朱鎔基)는 총서기 장쩌민과 같은 상해방(上海幇)으로 분류되는 것을 보면 상하 관계를 기반으로 한 승상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후진타오 시기의 총리는 원자바오(溫家寶)인데 두 사람 모두 공산주의청년단 출신으로 10년 동안 중국을 통치하면서 팀워크(teamwork)가 꽤 좋았던 것으로 평가된다.

현재 중국의 총리는 리커창(李克强)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똑똑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베이징 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공청단 활동을 하며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할 정도로 영민하다는 칭찬이 자자했다. 이미 이런 배경만 보더라도 과거라면 승상으로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똑똑한 충신을 살려두는 황제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를 떠올리지 않고 단지 지금만 보더라도 장쩌민과 주룽지,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이미 상하 관계가 확실했다. 그런데 시진핑과 리커창은 후진타오 집권 시기에 누가 총서기를 맡느냐는 세인들의 의견이 분분했을 정도로 경쟁 관계에 있었다. 동등한 관계에서 상하 관계로 변한 것이다.

중국공산당에는 중요한 경제 정책을 결정하는 중앙재경영도소조(中央財經領導小組)라는 것이 있다. 중국은 당이 지배하는 국가이므로 중국의 경제 문제는 이곳에서 관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조직의 장 즉, 소조장을 후진타오 시절에는 원자바오가 맡았다. 장쩌민 시절에는 주룽지였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중앙재경영도소조의 장은 총리가 맡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장쩌민 시기의 주룽지 총리 이전에 총리를 역임한 리펑은 소조장이 아니었다. 소조장은 장쩌민이 맡았다. 덩샤오핑의 관점에서 보면 리펑은 보수파에 속하므로 개혁 개방을 충실히 수행할 인물은 아니었다. 고로 리펑이 총리이긴 했지만 경제 문제는 장쩌민에게 결정권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 중국공산당 중앙재경영도소조의 장은 리커창이 아니라 시진핑이다. 리커창은 개국 공신이었던 저우언라이가 가졌던 권위와 권한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주룽지나 원자바오보다도 권한이 없다. 2010년 17기 5중전회에서 중국의 제12차 5개년 계획에 대해 보고한 사람은 원자바오 총리였다.

그러나 2015년 18기 5중전회에서 제13차 5개년 계획에 대해 보고한 사람은 리커창 총리가 아니라 시진핑 총서기였다. 영특하다고 평가받던 리커창이 앞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면 양신(良臣)으로서의 처신을 얼마나 잘 해낼 것인지 리커창 본인에게 달린 것 같다. 약간의 실수도 그에게는 독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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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흠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중국 문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대륙연구소, 북방권교류협의회, 한림대학교 학술원 등에서 연구원을 역임했다. 중국의 관료 체제에 관한 연구로 국립대만사범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중국의 정치 문화에 대한 연구로 건국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 권으로 읽는 유교> 등의 번역서와 <중국 인민의 근대성 비판> 등 다수의 연구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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