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는 신이 없다

[최성흠의 문화로 읽는 중국 정치] 천명(天命)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중국에는 신전이 없다. 그리스의 파르테논이나 로마의 판테온처럼 신을 모시는 거대한 건축물이 없다. 혹자는 부처를 모시는 거대한 불교 사원이 일종의 신전이라 말하기도 하겠지만 부처는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서양의 신들과는 다르다. 그는 원래 사람이었고, 성불하여 부처가 된 존재이다. 유가 식으로 말하면 덕을 깨우친 성인이고, 도교 식으로 말하면 득도한 도인이다.

또 누군가는 베이징에 있는 천단을 신전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신은 없다. 그곳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일 뿐이다. 면적은 자금성의 4배에 달한다고 하지만 제단 자체는 자금성의 규모에 비하면 소박하기까지 하다. 중국인의 뇌리에 신은 없었다. 적어도 세상을 주재하는 기독교의 하느님 같은 개념은 갖고 있지 않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중국 역사에서 고고학적으로 입증된 최초의 국가인 상(商)나라 사람들은 하느님에 해당하는 상제(上帝)를 섬겼다. 시경에 "상족의 선조는 검은 새(玄鳥)의 알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삼족오(三足烏)를 연상시키는 검은 새는 분명 태양신과 연관이 있으며 상나라 왕실은 그들이 상제의 후손이라 생각했다. 왕실의 관심사는 모두 점을 쳐서 신의 계시를 받았다. 신과 직접 소통한 기록은 현재 갑골문으로 남아있다.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명제의 기원

그런데 절대적인 존재인 상제의 후손이 다스리는 상나라가 주(周)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실로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신의 나라가 멸망했으니 신의 절대성이 의심받는 것은 당연지사였을 것이다. 천지자연의 주재자인 상제와 그들의 조상신이 보호하는 상나라가 멸망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었겠는가? 주나라 사람들은 천명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가 왕이 되었거나 또는 천명을 받는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하늘(天)이 상제를 대신해 등장한 이유였다.

하늘은 더 이상 가시적인 자연물의 표식으로 천명을 내리지 않았다.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절대적 명제가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천명을 판단하는 대상이 거북이 등껍질과 소뼈에서 백성으로 바뀌었다.

"하늘은 우리 백성이 보는 것으로부터 보고, 하늘은 우리 백성이 듣는 것으로부터 들으며 (…) 백성이 하고자 하는 바는 하늘이 반드시 따른다." (<서경>, '주서·태서')

그리고 문왕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며 덕을 밝히고 백성을 교화했기에 하늘이 천명을 주었다고 설명한다.

"덕을 밝히고 벌을 내릴 때는 신중히 하였고 (…) 부지런히 공경하며 위엄 있게 백성을 밝히셨다. (…) 이에 하늘은 문왕에게 대명(大命)을 주었다." (<서경>, '주서·강고')

이렇게 천명을 내리는 존재는 하느님이 아니라 하늘이 된 것이다. 상제의 혈통이 아닌 주나라 왕실로서는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기가 막힌 해법을 찾은 셈이다. 그 해법의 키워드는 천명과 교화이며 이후 모든 왕조에서 이 해법을 차용했다.

인격신의 의지 아닌 원리나 이치로부터 나오는 '천명'

하늘은 점차 어떤 원리나 이치로 발전되어 갔다. 특히 음양오행설의 영향력이 컸다. 성삼품설을 주장한 동중서는 춘추번로(春秋繁露)에서 하늘은 아무렇게나 천명을 내리고 거두는 것이 아니라 음양오행의 운행이라는 하늘의 법칙을 따른다고 했다. 오행설은 <서경>의 '홍범구주'(洪範九疇)에 이미 기록이 있는데, 전국 시대의 추연(鄒衍)이 발전시키고, 한대의 동중서가 정치와 결합시키면서 영향력이 커졌다. 특히 한대의 유흠(劉歆)이 저술한 <삼통력(三統厤)>을 근거로 왕조의 교체도 오덕(五德)의 운행에 의거해서 정통성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음양오행설의 유행에 따라 새롭게 등장한 것이 감생제(感生帝)설이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성인은 모두 아버지가 없고, 하늘의 감응으로 탄생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의 영향을 받은 허신(許愼)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성(姓)'자를 풀이하면서 "어머니가 하늘의 감응을 받아 아들을 낳으니 천자(天子)라 한다"고 했다. 감생제설은 오제(五帝)의 영혼이 조상의 어머니에게 강림하여 조상이 탄생했다고 주장하고 어떤 천제의 후예인지는 오행설로 설명한 것이다.

남북조 시대에는 도교와 불교의 신비주의적 요소가 더해져 감생제설은 더욱 널리 퍼져서 '춘추원명포(春秋元命苞)'에 하나라는 백제(白帝), 은나라는 흑제(黑帝), 주나라는 창제(蒼帝), 한나라는 적제(赤帝) 등의 후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감생제설을 근거로 삼아 남북조 시대의 제왕들은 서로가 각기 오제의 정기를 받은 천자임을 주장했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황건적이 노란색 두건을 쓴 이유도 오행설에 근거해서 다음 천명은 황제(黃帝)로부터 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천명은 하늘의 의지가 아니라 음양오행의 질서에 따르는 것이고, 열심히 기도한다고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이치를 깨달은 자가 받는 것이 되었다.

송대의 주희(朱熹)는 천명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천은 자연을 말하고, 명은 자연이 운행하여 사물에게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성(性)은 인간과 만물이 얻어서 생겨난 것이고, 리(理)는 모든 사물에 존재하는 법칙이다. 모두를 종합하여 말하면 하늘이 곧 리이며, 명이 곧 성이며, 성이 곧 리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 "하늘은 총명하고 예지가 있어서 그의 본성을 다할 수 있는 자를 군사(君師)로 삼아 백성들을 다스리고 교화하여 성을 회복하도록 했다."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

위의 내용 중에 군사라는 말은 군왕과 스승의 합성어인데 주희는 공자도 군사가 되지는 못했다고 했으니 오로지 황제만이 진정한 군사의 자격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자연은 법칙에 의해 운행되며, 인간에는 이미 그 법칙이 내재해 있지만 다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늘의 법칙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깨달은 사람이 그들을 가르치고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로부터 '천명' 받은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마오쩌둥은 천명을 받았다. 적어도 유물변증법을 법칙으로 따르는 마르크스주의자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은 유물사관에 의하면 필연이므로 혁명을 성공한 마오쩌둥은 역사로부터 지배의 정당성을 부여받은 것이다. 게다가 중국은 전통적으로 역사를 중시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일설에 의하면 마오쩌둥은 <자치통감>을 17번이나 읽었다고 하니 역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1945년 항일 투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그는 권력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나서 공산당 명의로 '약간의 역사 문제에 대한 결의'를 발표했다. 결의에서 마오쩌둥은 중국 역사의 전환기에 정확한 정치 노선을 확립한 명실공이 최고 지도자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로써 그의 통찰력과 결정은 모두 옳은 것이라는 절대적인 권위가 1970년대 후반까지 지속될 수 있었다.

그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장악한 덩샤오핑도 1980년대 초에 '역사 결의'를 통해 지배의 정당성을 확인했다. 중국 공산당은 지금까지 두 번의 역사 결의를 채택했는데 마오쩌둥의 역사 결의는 중국공산당이 소련공산당의 직접 통제에서 벗어나 이른바 마오쩌둥 노선을 확정지을 때 채택됐고, 덩샤오핑의 역사 결의는 개혁 개방 정책이 당의 노선으로 확정된 후에 채택됐다. 이 모두 두 사람이 역사로부터 천명을 받은 위대한 지도자임을 확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중국공산당은 역사를 해석하는 권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 권리가 권력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군사(君師)가 되었고, 백성을 교화했다. 교화의 방식은 군중 운동이었으며 목표는 그들을 인민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최고 지도자가 주요 연설을 발표하면 이를 강조하고 설명하는 논설이 각 신문에 전파되고, 뒤이어 벽보와 현수막이 등장하면서 군중 대회가 열리는 방식이었다. 군중 대회에서 각급 간부들이 목표를 제시하면 각 직장이나 지역별로 학습소조(學習小組)를 조직하여 정책의 목표와 실천 방법에 대해 학습하도록 했다. 이 방식은 시대가 변하고 지도자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다만 대규모의 군중 운동 대신에 언론과 방송 그리고 인터넷을 더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요즘 중국의 포털 사이트 바이두(baidu)에서 학습소조를 검색해보면 '學習小組'라고 표시되어 있는 글들을 발견할 수가 있다. 게시된 내용은 모두 시진핑의 근황과 연설 그리고 과거의 중요 행적에 관한 것들이다. 2014년부터 중국판 카카오톡이라 불리는 위챗(wechat)에 단신으로 올라오면서 도대체 누가 작성한 것인지 궁금증을 유발하며 많은 관심을 끌었었다. 그러다 2015년 초에 <인민일보> 해외판 젊은 기자 몇 명이 올리는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지금은 당국의 인가를 받아 정식으로 인터넷에 글을 게시하고 있다.

그들은 시진핑의 성이 습(習)인 것에 착안하여 시진핑을 배우는 모임이라는 의미로 제목을 정했다고 한다. 최고 권력자의 눈에 들기 위한 발랄한 노력이다. 그런데 이 학습소조뿐만 아니라 수많은 단체와 조직은 이미 시진핑을 공부하는 학습소조를 만들었으며 그의 집권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학습하고 전파하고 있다. 천명과 교화의 메커니즘은 현재의 중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렇게 보면 중국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유물론자에 가까웠던 것 같다. 적어도 주나라 이후부터는 세계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거나 세계를 주재하는 인격신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황제는 유교 사상의 테두리 안에서 신성성을 보장받았지만 현대의 공산당 지도자는 공산주의 이념을 새롭게 해석하고 재정립할 수 있는 권한도 있으니 어찌 보면 황제보다 더 막강한 권위를 보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덩샤오핑이 집권하고 난 후 마오쩌둥 격하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천명을 받은 집권자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고 승계하는 것이 권력의 정통성을 유지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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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흠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중국 문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대륙연구소, 북방권교류협의회, 한림대학교 학술원 등에서 연구원을 역임했다. 중국의 관료 체제에 관한 연구로 국립대만사범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중국의 정치 문화에 대한 연구로 건국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 권으로 읽는 유교> 등의 번역서와 <중국 인민의 근대성 비판> 등 다수의 연구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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