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유가를 호재로 반기지 못하는 이유

[분석]고유가를 전제로 한 '자산거품' 붕괴 중

국제 유가 하락은 상식적으로 호재다. 한국처럼 원유를 수입하는 나라는 당장 국제 유가 하락은 경상수지 흑자를 늘려주는 효과를 가져온다.

한국은행이 1일 발표한 '12월 국제수지(잠정)'에 따르면 지난해 경상수지 흑자는 사상 최대 규모인 1060억 달러를 기록했다. 가장 큰 기여는 바로 국제 유가 하락이다.

하지만 지난해 경상수지가 사상 최대 규모 흑자를 기록했지만, 유가 하락 효과를 제외하고 나면 오히려 지난 2014년보다 흑자 폭이 줄어들었다. 유가 하락이 경제 전반에 걸쳐서 호재가 아닐 수 있다는 방증이다.

전승철 한국은행 경제통계국장은 "지난해 유가 하락으로 상품수지 흑자가 개선된 폭은 356억 달러로 나타났다"면서 "유가 하락 효과를 빼면 지난해 경상 흑자는 703억 달러 가량으로, 지난 2014년 경상 흑자보다 약 140억 달러가량 줄어든다"고 밝혔다.

특히 전 국장은 "유가 하락 효과를 뺀 경상 흑자가 전년 대비 감소한 것은 우리나라 주요 수출 품목의 수출이 부진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사상 최대 경상수지 흑자, 수출은 7.9% 감소


지난해 내내 전년 동월 대비 감소했던 수출액은 올해 1월 전년 동월 대비 무려 18.5%나 줄어든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이같은 감소 폭은 글로벌 금융 위기의 여진이 있던 지난 2009년 8월 -20.9% 이후 6년 5개월만의 최대 감소폭이다. 지난해 연간 수출 감소율은 전년 대비 -7.9%였고 가장 감소폭이 컸던 달은 10월로 -16.0%였다.

1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품목별 수출액은 석유제품(-35.6%)과 석유화학(-18.8%) 등 국제 유가 하락의 직격탄을 맞은 수출 분야의 감소폭이 두드러졌다. 자동차(-21.5%), 일반기계(-15.2%), 철강(-19.9%), 반도체(-13.7%), 평판 디스플레이(-30.8%), 섬유(-14.7%), 무선통신기기(-7.3%) 등 주력 품목 대부분이 감소했으며 해양 플랜트 수출이 없었던 선박도 무려 32.3% 감소했다.

수출이 경제 성장의 기관차인 우리 나라에게 국제 유가 하락이 원가 절감 차원의 호재로만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통계다. 저유가 때문에 중동과 러시아, 브라질 등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중국과 함께 세계 경제를 이끌었던 산유국들의 돈줄이 막히면서 신흥국 경제 성장이 주춤하고, 그것이 우리나라의 수출 시장을 위축하는 효과로도 이어진 것이 배경으로 지목된다.


또 상품과 서비스 거래가 아닌 자본 유출입을 나타내는 금융 계정 유출초 규모는 지난해 총 196억3000만 달러의 순유출을 기록했다. 금융 계정 유출초는 자본이 국외로 빠져나갔다는 의미다. 여기 사상 최대 규모이며, 또한 외국인의 국내 주식 및 채권 투자도 72억9000만 달러 유출초를 기록했다. 금융 위기 당시인 지난 2008년 259억 달러가 빠져나간 이후 처음으로 순유출로 돌아선 것이다.


이런 통계는 미국의 금리 인상과 함께 국제 유가 하락이 글로벌 금융 시장의 자금 흐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해 <블룸버그>는 "고유가를 예상하고 투자하고, 빚을 진 기업들에게 국제 유가 하락은 전혀 호재가 아니다"는 진단을 내려 주목을 받고 있다.

고유가 베팅 업체들은 죽을 맛


<블룸버그>에 따르면, 그동안 월가에서는 석유는 유한재라서 앞으로 가격이 오르거나 일정 가격 이하로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 하에서 석유 업자들에게 돈을 마구 빌려줬다. 그러나 국제 유가가 급락하면서 지난해에만 미국에서만 42개의 석유 업체들이 170억 달러의 빚만 남긴 채 파산했다. 미국 2위 정유 업체인 셰브론은 지난해 4분기 2002년 3분기 이후 13년 만에 적자를 냈다. 채권자들은 큰 피해를 보고 있으며, 헐값으로라도 매각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국제 유가가 하락할수록 이런 '자산 거품 붕괴' 현상은 더욱 악화된다. 이미 웰스파고, 뱅크오브아메리카, 시티그룹, JP모건체이스 등 미국의 주요 은행들은 250억 달러를 에너지 분야 대손충당금으로 쌓아뒀다. 낮은 유가가 지속될수록 대손충당금 규모는 더욱 커지게 된다.

유가 하락이 소비자에게는 분명히 일종의 감세 혜택처럼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 경제로 보면 지출 감소라는 측면도 있다. 그 결과 전체 경제가 둔화되면 국제 유가 하락은 모두에게 악재로 작용하는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블룸버그>는 "1980년대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신흥 시장 국가들이 부채 상환도 못하게 되어 전 세계적으로도 악재로 작용한 것과 같다"고 지적했다.

오일 머니로 떵떵거리던 산유국들은 그동안 글로벌 시장에서 자산 인수에 열을 올렸다. 이제는 매각해야 할 처지가 됐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국제 유가 하락으로 경제에 타격을 받으면서 지난해 중반 이후 1000억 달러가 넘는 외환 보유고를 탕진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보다 심각한 규모다.

JP모건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마이클 페롤리처럼 국제 유가가 지속적으로 낮다는 것이 글로벌 경제의 호재가 아니라, 글로벌 경제가 나쁘다는 징후이자 그 결과로 해석하면 더욱 우려된다. 최대 원유 수입국인 중국 경제 둔화가 국제 유가를 하락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꼽히는 것도 이때문이다.

결국 고유가를 염두에 두고 형성된 '자산 거품'이 조정을 받는 진통을 거치지 않고는, 저유가가 당장 글로벌 경제의 호재로 작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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