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한 달 뒤...내게도 재앙이 왔다"

[세월호, 어디로 가나 ③] 고양종합터미널 화재 참사 피해자 가족 송은영 씨 上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과 안전 관련 제도 개선을 위해 설치된 행정기관이다. 하지만 그 역할 수행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내‧외부에서의 '특위 흔들기'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대로는 특위 활동이 '찻잔 속 태풍'으로 그칠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프레시안>은 특위가 제대로 역할을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짚어보고자 한다. 대구 지하철 참사 유가족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난 이는 고양종합터미널 화재 참사 피해자 가족 송은영 씨다. 송 씨로부터 참사 이후 소회, 세월호 참사 문제 해결 과정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등 여러 이야기를 들어봤다.

<세월호, 어디로 가나>
(1) 대구지하철참사 유족 "세월호 시작도 안 했다"
(2) "세월호 농성장서 치킨 먹는 일베, 불쌍하다"


체험학습 간다더니… 온몸이 까맣게 그을려 돌아온 남편

'세월호'라는 배가 침몰한 지 40일쯤 되던 때였다. 세월호 승객 가운데 288명은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었고, 16명은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슬펐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가족들은 얼마나 괴로울까. 송은영 씨는 관련 뉴스를 망연히 지켜봤다.

안타까운 마음과는 별개로, 송 씨의 일상은 계속됐다. 2014년 5월 25일은 송 씨 부부의 결혼기념일이었다. 슬하에 아이는 없었지만, 남달리 부부애가 좋았다. 그날도 두 사람은 예년처럼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자기 전, 대안학교 교사인 남편은 '내일 아이들을 데리고 체험학습에 간다'고 했다. '고양 터미널 광장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말도 스쳐 지나가듯 했다. 너무도 일상적인 대화였다.

다음날인 5월 26일. 간호사인 송 씨는 이날 오후 근무였다. 아침 일찍 남편을 먼저 보내고 여유롭게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넉넉해 인터넷 뉴스도 훑었다. 터미널에서 대형 화재가 났다는 보도가 눈에 띄었다. '얼마 전에도 그렇게 큰 사고가 있었는데 이런 일이 또 생기는구나' 싶었다. 사망자 5명, 부상자 3명이라고 했다. '큰 화재가 났구나, 연기가 엄청났겠구나. 터미널이면 사람이 많을 텐데 어쩌나' 생각하며 혀를 찼다.

아무 생각 없었다. 문득 어젯밤 잠들기 전 남편과 나눈 짧은 대화가 생각나기 전까진.

남편도 거기에 있었을 거란 생각이 미치자, 조금씩 심장이 쿵쿵대기 시작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번을 했는데도 받지 않았다. '사고로 놀란 아이들을 남편이 진정시키고 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별일 없을 거라 마음을 다잡는데도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근처 병원에 전화를 돌렸다. 몇 군데 전화를 돌리다 보니, 일산병원 응급실에서 남편과 같은 이름인 사람이 있다고 했다. '박성린'이란 이름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남편이 확실했다.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다짜고짜 살아있는지부터 물었다. 살아있다고 했다. 의식이 있느냐고 물었을 땐 이미 전화가 끊긴 상태였다.

▲고양시가 만든 '고양종합터미널 화재사고 백서'에 게재된 연기가 피어오르는 터미널의 사진. ⓒ고양시

손이 마구 떨렸다. 무서운 마음에 친구를 불러 같이 택시를 탔다. 터미널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아파트 단지를 지나자마자 회색 연기 기둥이 보였다. 병원에 가는 도중 학교 관계자한테서 전화가 왔다. 남편이 많이 다치지 않았으니 놀라지 말고 오라는 연락이었다. 그 말에 조금은 안심이 됐다. '연기를 피해 달아나다가 팔이나 부러졌을까' 생각했다.

응급실 한 켠에 까맣게 그을린 누군가가 누군가 누워있었다. 남편이었다. 의식이 없는지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었다. 두 눈으로 보고 있지만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게 현실인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의사가 송 씨를 불렀다.

"호흡이 불안정해서 사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송 씨 자신도 간호사였다. 환자 보호자들에게 이런 비슷한 얘기를 몇 번이고 해봤다. 막상 자신이 그런 얘길 들으니, 별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잘 부탁드린단 말밖엔.

면담을 마친 때는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정오께, 병원 관계자가 다시 송 씨를 불렀다. 화상전문병원으로 이송해야 한다고 했다. 겉으로 드러난 화상도 부위가 넓고 상태도 심각하지만, 뜨거운 증기를 마시는 바람에 기도 화상을 입어 이곳에선 치료를 하기 힘들다고 했다. 부랴부랴 부천 베스티안 병원으로 갔다. 병원을 옮기자마자 또다시 청천벽력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72시간 내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면 생명에 지장이 없다 하더라도 뇌가 크게 손상됩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샜다. 남편이 어서 눈을 뜨길 빌고 또 빌었다.

다행히 48시간 만에 남편은 의식을 찾았다. 평생 지우기 힘든 화상 흉터가 남았지만, 그래도 남편은 살았다.

이날 사고로 8명이 결국 생명을 잃었다. 송 씨의 남편을 포함한 중상자는 5명, 그 외 부상자는 100여 명에 달했다.

▲검게 그을린 터미널 내부. ⓒ연합뉴스

사고는 순식간, "서른 발자국만 가도 탈출할 수 있었는데…"

26일 오전, 박 씨는 예정 시각보다 훨씬 일찍 집을 나섰다. 혹시라도 미리 오는 아이들이 있을까 봐 미리 나간 것이었다. 예상대로, 그가 맡은 반 여학생 한 명이 일찍 와 있었다. 둘은 다른 학생들이 오기 전, 구급약을 사러 함께 터미널 건물에 들어갔다.

건물 지하에 있는 약국에 내려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중간쯤 왔을 즈음, 천장에서 연기가 보였다. 민방위 훈련을 받을 때 대형건물 화재 시 천장에 연기가 찬다는 얘기를 언뜻 들었다. 학생 손을 잡고 바로 뒤를 돌아 에스컬레이터 계단을 올랐다.

대여섯 개 계단을 오르자 '펑' 하며 바로 주변에서 폭발음이 울렸다. 순식간에 사방이 연기로 가득 채워졌다. 숨이 차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 박 씨는 결국 아이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아이 이름을 부르짖고 찾다가 1층에 올라왔다. 올라와서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아이를 찾으러 다니다 구조대원을 만났다. 박 씨는 정신을 놓았다.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에스컬레이터에 올라 서른 발자국만 내딛어도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도 탈출하지 못했다. 만일 구조대원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박 씨는 가스에 질식해 생명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박 씨와 함께 있던 여학생 또한 다행히 구조되었다. 학생이 발견된 곳은 지하 천장이 무너져 내린 잔해 아래였다.

"아이 말에 따르면, 폭발음이 나고 둘이 손을 잡고 뛰는데 자기는 숨이 막혀서 선생님을 못 따라가겠더래요. 그래서 이렇게 잡고 있으면 둘 다 죽을 것 같아 선생님이라도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손을 놨대요. 지하에 있었는데, 위에서 선생님이 자길 부르는 소리가 계속 들리더래요. '그렇게 계속 부르면 숨을 많이 쉬어야 하니까 힘들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턴 소리가 안 들리더래요. 그래서 '선생님이 먼저 죽었구나. 나도 곧 따라 죽겠지, 죽으면 만나겠지', 이런 생각을 했더래요. 학생한테서 이런 얘기를 듣는데 너무 짠했어요."

박 씨도, 그 학생도 다행히 의식은 돌아왔다. 그러나 화상 환자가 되어있었다. 박 씨는 엉덩이와 다리 등 전신의 35%가 불에 녹았다. 이중 95%는 3도 화상이었다. 학생은 가슴, 얼굴 등 전면부에 화상을 입었다. 둘 다 세 번 넘는 피부이식 수술을 받았다.

▲고양종합터미널 화재 참사 피해자 가족 송은영 씨. ⓒ프레시안(최형락)

사고 1년 반 지났지만 "아이 손 놓쳤다" 여전한 악몽


연이은 수술보다 더 끔찍한 것은 매일 반복되는 악몽이다.

"남편이 자는데 계속 그 아이 이름을 불러요. 빨리 도망치라고…. 나중에는 막 울어요. 아이 손을 놓친 기억이 꿈에서 그대로 나오는 거죠. 아이 손을 놓치고서 남편은 자기 혼자만 살고 아이가 죽었다고 생각했대요."

사고 후 1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박 씨는 악몽을 떨치지 못한다.

송 씨 부부는 고양 터미널을 가지 못 한다. 워낙 집과 가까워 차를 타고 지나가는 경우가 간혹 있지만, 걸어서 간다든가 건물에 진입한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떤 건물에 들어가든 탈출 경로부터 머릿속에 그린다. 박 씨는 복잡한 건물에 갈 때마다 아내 송 씨에게 늘상 말한다. "에스컬레이터에서 직선으로 서른 걸음만 가면 되는데도 못 나갔으니 이런 복잡한 곳에서는 절대 탈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만일 여기서 불이 나면, 나를 버리고 너라도 탈출하라"고.

"지금 겪는 정신적인 고통이 너무 커서 사고를 두 번을 겪고서 제대로 살아갈 자신이 없대요. 아마 그렇게 된다면 저도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가족으로서 겪는 고통도 상상을 초월해요."

송 씨는 "만약 작년 이맘때쯤이라면 절대 인터뷰를 안 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사고의 충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했다. 사고가 더 이상 회자되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생각이 달라졌다.

"세월호 참사가 나고 정말이지 이런 일이 또 있을까 했어요. 그런데 겨우 한 달 만에 일어난 일이었어요. 그것도 나한테 닥친 일이었어요. 제가, 우리 남편이 이렇게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어요."

ⓒ연합뉴스


세월호 참사와 고양 터미널 사고는 닮은꼴, 그러나…

그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발생 배경을 따져보면 두 사고는 매우 닮았다. 참사의 시작에는 '탐욕'이 있었다.

세월호 객실을 증축하는 구조 변경을 한 것도, 과적을 한 것도 배 소유주와 회사 운영진의 탐욕 때문이었다. 직원들이 안전 수칙을 무시한 것 역시 결국 궁극적으로는 탐욕에서 비롯됐다. 고양터미널 화재 사고도 마찬가지였다. 공사 기간을 단축하려는 발주 업체의 탐욕, 비용을 절감하려는 공사 시행사의 탐욕이 합쳐져 큰 사고를 불렀다.

다행히도 고양 터미널 사고는 비교적 구조가 신속했기 때문에 인명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고, 박 씨 또한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월호 사고는 완벽한 구조 실패로 인해 참사로 번지고 말았다. 또 사고의 결정적 원인이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그래서 송 씨는 더욱 세월호 참사에 마음이 쓰인다.


이런 대형 참사가 다시는 일어나질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는 최근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가 개최한 청문회에 참석해 진술하기도 했다.


"사고 후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사고를 잊고 일상에 복귀하라는 말이었어요. 남편은 매일 보습제를 바르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힘듭니다. 보습제를 바를 때마다 남편은 물론이고 저도 그렇게 한 번씩 사고를 되새깁니다.

저희는 비교적 납득할 수 있는 원인을 알게 됐습니다. 물론 원인을 알았다고 해도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적어도 답답함은 없습니다. 저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원하는 대로 됐으면 좋겠습니다. 책임자들이 확실히 책임을 지고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랍니다. 피해자 가족은 내 가족이 왜 죽어야 했는지 왜 부상을 당해야 했는지 알 권리가 있습니다. 피해자 가족들이 납득할 수 있는 조사를 당부드립니다." (계속)


▲세월호 특조위 주최 청문회에 참석해 울먹이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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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리

매일 어리버리, 좌충우돌 성장기를 쓰는 씩씩한 기자입니다. 간첩 조작 사건의 유우성, 일본군 ‘위안부’ 여성, 외주 업체 PD, 소방 공무원, 세월호 유가족 등 다양한 취재원들과의 만남 속에서 저는 오늘도 좋은 기자,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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