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노동 개혁'…"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취업 규칙 변경과 일반 해고 가이드라인의 존재 이유

박근혜 정권의 '노동 개편' 핵심 중 하나는 취업 규칙 변경과 일반 해고 가이드라인 문제이다. 대법원 판례가 어떻고, 사회 통념상 합리성이 어떻고…. 이 문제를 다룬 수많은 논문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전문가 아니고선 이해 못 할 얘기들만 늘어놓으니 말이다.


지침(가이드라인)을 지켜야 할 주체는 누구인가?


어차피 '인사이드 경제'는 어려운 얘기를 체질적으로 싫어한다. 문제를 좀 단순하게 만들어서 접근해 보자. 가이드라인, 쉬운 말로 바꾸면 '지침'이다. 취업 규칙 변경할 때, 그리고 일반 해고를 할 때 지켜야 할 기준과 절차를 명시해놓은 지침.

그렇다면 그 기준과 절차, 즉 지침(가이드라인)을 지켜야 할 주체는 누구일까? 취업 규칙 변경이나 일반 해고를 실행하는 당사자, 그러니까 사장님들이다. 노동자들은 취업 규칙 변경이나 일반 해고를 당하는 쪽에 해당한다.

만일 이 지침을 사장님들이 어기면 어떻게 될까? 지침 위반으로 처벌을 받거나 불이익을 받게 될까? 박근혜 정권의 정책 어디를 들여다봐도 그런 얘기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건 무슨 말일까? 그렇다. 이 지침을 어기더라도 사장님들은 일절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이, 설마 그럴 리야 있겠어? 그래도 나라가 만드는 지침인데 말이야…." 아니다. 설마는 사람을, 아니 노동자들을 잡는다. 사장님들이 지켜야 할 지침을 만들어놓고도 이걸 어겼을 때 처벌이나 불이익을 주지 않는 사례가 어디 한두 개던가.

"병원이 정부 지침을 어긴 것은 맞지만 강제할 방법이 없다"

지난달 1일, 경북대학교 병원에서 수년간 주차 관리 일을 하던 비정규직 노동자 26명이 집단 해고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로부터 일주일 전, 기존 하청업체가 (주)리더스디밸럽먼트라는 업체로 변경되는 과정에서 인원을 감축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경북대 병원은 국립병원으로서 공공 기관에 해당한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 만들어진 '공공 기관 용역 근로자 보호 지침'에 따르면, 공공 기관과 용역을 체결한 업체가 변경되더라도 기존 인원의 고용을 그대로 승계하도록 명시하고 있는데 명백히 지침을 위반한 것이다.

집단 해고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지금까지 한 달 넘게 농성을 전개하며 복직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던 중 대구지방노동청장 면담도 하고 고용노동부 관계자들과 대화도 해왔다. 그럴 때마다 반복해서 들어온 말이 이거다. "병원이 정부 지침을 어긴 것은 맞지만, 강제할 방법이 없다."

지키라고 만들어놓은 지침인데, 어겨도 강제할 방법이 없다니! 그럼 대체 이런 지침은 왜 만들어놓은 것일까? 용역근로자 보호 지침에는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에 대해 최소한 '시중 노임 단가' 이상을 적용하라는 내용도 들어 있다.

그런데 노동부가 대학 청소 노동자를 비롯한 용역 노동자 전수 조사를 한 결과, 이 지침을 지키고 있는 곳이 거의 없다는 발표가 나온 적도 있다. 처벌하거나 제재할 방법, 강제할 방법이 없는데 사장님들이 이걸 왜 지키겠나. (☞ 관련 기사 : '콧노래, 휴식 금지'…공공기관 비정규직 사용법!)

▲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 9월 14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고용노동부 기자실에서 기자 간담회를 열고 노동 시장 개혁을 위한 노사정 협의 과정에서 핵심 쟁점으로 다뤄졌던 '취업 규칙 변경 완화'와 관련, 가이드라인 제정 작업에 속도를 내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노동조합이 지켜야 할 지침에 대해서는?


그런데 정부가 만드는 지침 중 정말 확실하게 강제할 수단을 갖춘 것들이 있다. 타임오프 관련 지침이라든지, 단체 협약 지도 지침이라든지 하는 내용은 확실하게 감시·감독을 진행한다. 왜 그럴까? 이들 지침 내용 중에 대부분은 사장님들이 아니라 노동조합이 지켜야 할 내용이기 때문이다.

만약 노동조합이 이들 지침을 위반하면 정부는 어떻게 할까? 우선 단체 협약 시정 명령부터 때리고 본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온갖 언론에 공개하며 '노동조합 이기주의'로 매도하는 데 앞장선다. 이런 곳에 들어가는 홍보 비용은 아낌없이 퍼붓는다. 시정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해 형사 처벌을 하거나 과태료를 부과한다.

노동부는 지난 5월 14일, 상시 100인 이상 사업장의 3000여 개의 단체 협약 중 위법·불합리한 사항이 있는지를 전수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 정년 퇴직자 자녀를 우선·특별 채용하는 조항 △ 과도한 인사·경영권 제한 규정 등을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조항은 위법한 것도 아니고 이를 시정할 수 있는 지침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특별히 처벌하거나 강제할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노동부는 기가 막힌 발상을 해낸다. 이 같은 사항이 단체 협약에 체결되지 못하도록 모니터링, 현장 방문을 하고 정부의 정책 방향에 따라 단체 협약을 체결한 사업장에 인센티브를 부여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정부 정책은 사장님들에게 분명한 신호로 작동한다. 즉, 올해 임·단협에서 위 조항들을 개악하겠다고 나서면 노동조합의 저항은 정부가 알아서 해결해 주겠다는 시그널 말이다. 처벌하거나 강제할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도 정부는 노동조합 문제라면 사장님들 편의를 봐주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일을 벌인다. 이런 수단은 사장님들이 지켜야 할 지침을 위반한 경우에는 절대로 구경할 수가 없다.

박근혜發 노동 개악의 미래

박근혜 정부는 취업 규칙 변경과 일반 해고 가이드라인은 해고를 쉽게 하고 임금 삭감을 쉽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해고와 취업 규칙 변경의 절차와 기준을 명확히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 백보 천보 양보해서 정부의 주장을 믿어준다손 치자.

그렇다면 정부가 내놓을 지침(가이드라인)은 대략 이런 꼴을 갖고 있을 것이다. '취업 규칙을 변경하려면 이런 기준과 절차를 지켜야 한다', '일반 해고를 하려면 이런 기준과 절차를 지켜야 한다' 등…. 그런데 이렇게 명시한 내용을 자본가들이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취업 규칙을 변경하고 해고하면 정부는 어떻게 할 건가?

그 답을 대구지방고용노동청이 이미 보여주고 있다. "회사가 취업 규칙 변경 가이드라인과 일반해고 가이드라인을 어긴 것은 맞다. 하지만 취업 규칙 변경 철회, 일반 해고 철회를 권고하는 것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 지난달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열린 '쉬운해고·평생 비정규직 노동개악 저지 민주노총 공공노동자 파업대회' 에서 참가자들이 노동개악 중단을 촉구하는 등의 글자가 적힌 피켓과 종이를 든 채 관련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사장님들의 "배 째라" 근성 키워주기


최근 서울대병원에서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임금 피크제 도입을 위해 취업 규칙을 변경하려고 노동조합을 무시한 채 전체 직원을 대상으로 투표를 실시한 것이다. 하지만 병원의 바람과 달리 직원 6045명 중 3177명(52.56%) 투표한 결과 고작 1728명(28.59%)만이 취업 규칙 변경에 찬성했다.

본래 취업 규칙 불이익 변경 시에는 노조의 동의를 구하거나 취업 규칙 적용받는 전체 직원 과반수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따라서 취업 규칙 변경 시도는 부결된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지난달 29일, 서울대병원은 임시 이사회를 열고 임금 피크제 도입을 위한 취업 규칙 변경을 일방적으로 의결하게 된다.

도대체 그 이유가 뭘까? "임금 피크제는 취업 규칙 불이익 변경이 아니므로 직원 동의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막가파식으로 할 거라면 애초에 뭣 하러 취업 규칙 변경을 위한 투표를 실시했다는 말인가? 직원들이 휴대전화로 투표할 수 있도록 서울대병원은 모바일 전자투표 시스템까지 구축했는데 말이다.

이거야말로 흔히 말하는 '신의칙 위반'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장기판에 앉아 진검 승부를 보기로 해놓고, 나중에 지니깐 판을 뒤엎은 후 "애초부터 부정 승부였으니 내가 이긴 것"이라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민주노총과 공공운수노조는 서울대병원의 뒤통수 때리기 행위를 고발한 바 있다. 그렇다면 노동부는 어떻게 나올까? 만일 이런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된다면, 이것 자체가 취업 규칙 변경 가이드라인 발표나 다름없게 된다. 앞으로 사장님들은 다음과 같이 마음대로 취업 규칙을 바꾸고 말 것이다. 노동조합은 무력화되고 단체 협약은 휴짓조각이 되고 만다.

❍ 신입 사원 초임을 맘대로 깎는다. "현재 재직 중인 노동자들의 근로 조건과는 무관하므로 취업 규칙 불이익 변경이 아니다"라고 주장할 테니 말이다.
❍ 노조 파괴에 앞장서고 회사 말 잘 듣는 이는 임금을 10% 올려주고, 눈엣가시 같은 민주노조 조합원은 1%만 올려준다. "임금을 삭감한 사례는 아니므로 근로조건의 불이익변경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취업 규칙 맘대로 변경에 나설 것이다.
❍ 일부 직군의 임금은 올려주고 일부 직군의 임금은 삭감한다. "전체적으로는 임금 삭감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취업 규칙 맘대로 변경 시도가 벌어질 것이다.
❍ 성과 기준 임금 체계를 멋대로 도입한다. "성과 평가에 따라 일부 노동자는 임금이 올라가고 일부는 삭감되지만, 전체적으로 근로조건 불이익변경은 아니다"라고 변명하면 끝.


비겁하게 가이드라인으로 장난치기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뭘까? 맨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이 지침을 어기더라도 사장님들을 처벌하거나 제재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사장님들은 맘대로 취업 규칙 변경을 해버린 뒤에 "억울하면 소송하셔!"라며 배 째라 식으로 대응할 게 뻔하다. 대법원 판결 때까지 족히 4~5년은 걸릴 테니 해볼 테면 해보라는 거다.

정부가 이런 가이드라인(지침)을 만들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법으로 만들면 이를 위반할 경우 사장님들을 처벌하거나 제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이드라인 만드는 것은 정부 맘대로 하면 되지만, 법을 만들 때는 야당과의 협상이라는 거추장스러운 과정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 취업 규칙 변경이라는 중대한 노동 조건 변경이 벌어지는 문제, 그리고 일터에서 쫓겨나는 해고 문제를 다루는데 고작 '가이드라인(지침)' 수준으로 해결한단 말인가? 박근혜 정부여, 비겁하게 가이드라인 갖고 장난치지 말고 법안을 만들어서 들고 와 보시라. 전체 노동자들이 법안을 심사해서 답을 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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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입니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글을 써 오고 있습니다. 주로 자동차산업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뤘습니다. 지금은 [인사이드경제]로 정부 통계와 기업 회계자료의 숨은 디테일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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