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명, 구할 수 있었다" 사고 당일 타임라인 보니…

세월호 국민참여 특위 첫 토론회... "특조위 모니터링 필요"

2014년 4월 16일. 참사는 벌어졌다. 304명의 생명이 싸늘하게 식었다. 남은 건 그날에 대한 기록들 뿐. 조각조각 흩어진 증거들은 일제히 하나의 결론을 가리킨다. "구할 수 있었다"고.

4.16 연대 부설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국민참여 특별위원회는 15일 서울 중구 명동 카톨릭회관에서 열린 토론회 '구할 수 있었다'에서 참사 당시 상황을 분 단위로 쪼갠 시간표를 공개했다. 참사 전날인 2014년 4월 15일 밤부터 사고 당일인 16일 오전 10시 21분까지로, 시간 별로 배 안쪽 상황, 바깥 상황, 교신 녹취 기록, 피해자 휴대전화 기록 등이 세세하게 담겨있다. (☞바로 가기 : 4.16연대)

국민참여 특별위원으로서 이번 타임라인 제작을 맡은 박영대 서울대 세월호 연구팀장은 '구조 방기의 재구성' 발제를 통해 당시 구조 주체였던 해경, 해군 등이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를 조목조목 짚었다.

▲세월호 참사 타임라인. ⓒ4.16연대

퇴선 명령만 있었다면...

가장 간단한 방법이었다. 선원들이 퇴선 명령만 내렸다면, 구조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파도도 높지 않았고, 세월호 탄 사람 전원을 수용할 수 있는 유조선 둘라에이스호가 주변에 있었다.

그러나 세월호 선원들은 '가만히 있으라' 했다. 선원들은 9시 4분 경 진도연안 VTS와의 교신에서 "움직일 수 없다"고 했다.

"좌우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여서 벽을 잡고 겨우 버티고 있는 상태"

움직일 수 없다는 말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그러나 당시 영상 기록을 보면, △9시 5분경 기관장이 조타실에서 3층으로 이동하고, △6분경에는 기관실 선원들이 지하 기관실에서 3층으로, △10분경에는 1등 항해사가 침실로 이동했다. 심지어 △9시 44분경 123정에서 세월호로 올라탄 경사가 3층에서 5층으로, 선미 쪽에서 선수 쪽으로 이동했다. 불과 2분 만에 이뤄진 일이었다.

선원들은 교신에서 구명조끼를 착용하라는 방송조차 할 수 없다고 한다. 박 위원은 "10시까지 나온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은 무엇이냐"며 "완전한 거짓말"이라고 비판했다.

둘라에이스호 선장은 당시 승객들이 바다에 뛰어들기만 하면 구할 수 있었다고 증언한다. 당시 둘라에이스호 측은 세월호 주변에 대기 중임을 진도 VTS에 전했고, 진도 VTS 역시 세월호 주변에 둘라에이스호가 접근 중이라고 하지만, 세월호 선원들은 "해경이 오는 데 얼마나 걸리느냐"고만 거듭 되묻는다. 급기야 둘라에이스호가 교신을 통해 세월호에 "서둘러 탈출시키십시오. 빨리"라고 했다. 그러나 세월호에서는 여전히 탈출 방송이 나오지 않았다.

▲해경은 세월호에 승선했지만 구조한 것은 선원들과 몇몇 승객에 불과했다. ⓒ박영대 4.16연대 부설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국민참여 특별위원회 위원

현장 구조세력, '구경' 아닌 구조를 했더라면...

"이건 구조를 하러 간 것이 아니라 거의 취재를 하러 가거나 구경을 하러 간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광주소방안전본부 소방행정과 소속 감찰조정관 황모 교수가 검찰에서 한 진술이다. 당시 현장에 출동한 세력은 해경 123정과 헬기 511기, 512기, 513기 등 세 대였는데, 모두 구조를 방기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511 헬기는 도착 시점 목포상황실을 통해 승객 대부분이 배 안에 있음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선내에 진입해 퇴선을 유도하지 않고 밖에 나온 승객만 구했다. 도착 45분간 구조한 인원은 12명에 그친다. 세 대의 헬기가 구조 인원을 합쳐도 35명에 불과하다. 항공 구조사들 역시 거짓 증언한다.

"만약 선내에 다수 승객이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분명히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선내 진입을 시도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해경 123정이 사고 현장에 도착한 것은 9시 35분경이었다. 현장에 도착해서 약 40분 동안 모든 선원을 태우는 사이, 승객을 구한 건 물에 빠져 있는 한 명과 3층 갑판과 창문 안쪽에 있던 일부 몇 명에 불과했다. 해경 경장 한 명이 조타실로 올라갔지만 퇴선 방송은 하지 않았다. 조타실에 잡을 게 없어서 이동이 어려웠다고 했지만, 조타실에는 벽에 긴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어김없이 또 거짓말이었다.

123정은 10시 17분경 멀어졌다. 해경이 떠나간 이때, 어선들은 적극적으로 구조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중앙구조본부에서 구조 지침이 내려온 건 17일 0시였다. 당시 구조본부장을 맡은 김석균 전 해양경찰청장은 16일 12시 30분 목포해경 소속 경비함 3009함에 올랐으면서도, 12시간 가까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구조 관련 지시를 내린 셈이었다.

박 위원은 "김석균은 세월호 내 구조대를 투입시켜 생존자를 확인하라는 지시를 하지 않았다"며 "해경이 이날 한 일은 망치로 세월호를 두드려 보는 것뿐이었다"고 비판했다.

ⓒ4.16연대 부설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국민참여 특별위원회


"특조위 조사 활동 감시 필요"

이날 토론회를 지켜 본 한 대학생은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조하지 못했다는 걸 타임라인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하니 무척 놀랍다"고 말했다.

박 위원은 "이런 토론회를 통해 시민들과 호흡하면서 이런 연구 결과물을 토론회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시민들에게 보다 더 관심 갖고 행동하는 데 도움 줄 수 있을 것 같다"며 "혹시 타임라인에 빠진 의혹들이 있다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제시해달라"고 했다.

장훈 416 가족협의회 진상규명분과장은 세월호 희생자 가족에 대한 관심을 요청하는 한편, 세월호 특조위에 대한 견제와 감시를 당부했다. 장 분과장은 "특조위가 진상 규명을 위해 조사 활동을 이제 막 시작한 만큼 모니터링이 필요하다"며 "특조위가 무디다고 안 믿지 말고, 기대해봐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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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리

매일 어리버리, 좌충우돌 성장기를 쓰는 씩씩한 기자입니다. 간첩 조작 사건의 유우성, 일본군 ‘위안부’ 여성, 외주 업체 PD, 소방 공무원, 세월호 유가족 등 다양한 취재원들과의 만남 속에서 저는 오늘도 좋은 기자,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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