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1년, 4.16 인권 선언이 시작되다

[시민정치시평·301] 책임을 공유할 권리, 권리를 누릴 책임

작은 읍내의 한 슈퍼 앞에 노란 현수막이 걸렸다. 노란 현수막의 물결이 한바탕 전국을 휩쓸고 난 후, 아직 물결이 다시 번지기 전인 지난 3월 초였다. 참사 이후 마음이 안타깝고 뭐라도 하고 싶었지만 장사하는 처지에 남들 눈이 신경 쓰여 차마 걸지 못했다고 한다. 동네의 성당에서 열린 <금요일엔 돌아오렴> 북 콘서트에 다녀온 후 현수막이라도 달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작은 도시의 한 식당 주인은 이제 노란 리본 배지를 달았다. 지난해 참사 이후 하도 장사가 되지 않아 이제 그만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더란다. 그게 두고두고 미안하더란다. 혼자 생각이었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너무 부끄럽더란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 1년이 돌아오는 때에서야 처음 추모 행사에 나가기로 했다 한다.

책임을 벗어나려는 권력과 책임을 찾아가려는 시민

세월호 참사 이후 1년이 흘렀다. 참사 한 달이 지났을 즈음 대통령은 '최종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며 모든 책임으로부터 탈출해갔다. 성역 없는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 요구에 귀를 막더니 제정 이후로도 쟁점이 되고 있는 시행령 문제에 묵묵부답이다. 법은 국회가 제정하지만 시행령은 대통령이 서명하는 것이다. 알고도 묵묵부답이든 몰라서 묵묵부답이든 문제는 마찬가지다.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

대통령이 책임을 벗어나려고 애쓴 만큼 국민들에게는 더욱 많은 책임의 무게가 돌아갔고 그보다 더욱 큰 책임의 무게가 가족들을 짓눌렀다. 왜 안내 방송에 따르라고 했을까? 왜 곧 구조될 거니 걱정 말라고 했을까? 왜 전원 구조됐다는 보도를 믿고만 있었을까?

방향이 뒤집힌 질문 때문에 책임은 살아남은 자들의 어깨에 고스란히 얹혀져 있다. 1년 동안 질문의 방향을 바꾸려고 모두 애써왔다. 왜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방송만 나왔는가? 왜 곧 구조되지 않았는가? 왜 전원 구조라는 오보가 퍼졌는가? 그러나 진실을 묻으려는 힘은 여전히 강력하고 완고하다. 1년의 시간 동안 질문을 회피하지 않은 시민들만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책임을 찾아가고 있다.

참사 1년을 앞두고 본격적으로 추진될 4.16 인권 선언의 발의문에도 '책임'이 포함되어 있다. 책임을 언급할 것인가에서부터 어떻게 말할 것인가까지 모두 중요한 쟁점이었다. 책임져야 할 자들이 책임을 회피하는 상황에서 시민의 책임을 언급하는 것이 적절한가? 그러나 시민들은 이미 책임을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시민들이 고백하는 미안함에 책임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타당한가? 어떤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면 오히려 그것을 해명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은가?

▲ 안산 시내에 걸려 있는 현수막. ⓒ프레시안(최형락)

책임감과 책임의 인식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사람이 책임감 또는 죄책감을 느꼈다. 사건을 구성하는 여러 원인 중 어딘가에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는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인 동시에, 동료 시민과의 연대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것은 세월호 참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다른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약속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막연한 책임감은 책임과 동일하지 않다. 책임을 느끼는 감정과, 실제 사건에 대한 책임과, 그 책임을 이행하는 방식은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민의 책임을 해명하기 위해 '책임감'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해야 한다.

노란 리본 배지와 노란 현수막은 불온한 것이었다. 지난해 9월, 교육부는 학교 안에서 노란 리본을 달지 말라고 지침을 내렸다. 단식이나 학교 앞 1인 시위도 막았다. 지난해 8월, 광화문에서 청와대로 가던 시민은 단식 참여자임을 표시하는 노란 천을 옷에 걸치고 있었다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두 사람이 걸었으므로 집회에 해당하며 경복궁 근처는 집회 금지 장소라는 것이 경찰의 주장이었다. 길거리에 붙은 노란 현수막이 구청 공무원에 의해 철거되기도 했다.

애도를 위한 표현은 국가에 의해 불온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표현의 자유 같은 것을 떠올릴 만한 감각을 이미 오랫동안 잊어왔다. 작은 읍내의 슈퍼 주인에게, 작은 도시의 식당 주인에게 1년은 우리의 권리를 떠올리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되짚기 위해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 책임을 인식하는 것"은 "정치적 자유에 대한 각성을 나타내는 최초의 징표"이다.

구조적 문제에 대한 책임 묻기의 어려움

세월호 '참사'가 구조적 문제라는 점은 누구나 지적하였다. 구조에 연루된 개개인이 다룰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선 문제라는 지적이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져야 할 책임을 헤아리는 일은 훨씬 어려워진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기까지 그것에 기여하거나 연루된 개인이나 기업, 정부의 행위가 특정한 결과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서로 다른 위치에서 서로 다른 힘의 크기로 미치는 영향의 집합체로서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규제를 완화했고, 해경이 구조를 못 했고, 언론이 오보를 내보냈다고만 말하면 문제는 쉬워진다. 그러나 해결은 어려워진다. 무엇을 잘못했고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또는 조직으로서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밝혀야 한다. 책임은 미래를 향하며 뒤를 돌아본다. 그 어디쯤엔가 시민으로서 책임이 있다. 막연한 책임감이 해명되어야 한다. 아이리스 영은 구조적 문제에 대한 시민의 책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구조는 비슷한 방식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지위를 결정하는, 사회적으로 조직된 조건들의 집합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위치 지어진 각 개인에게는 그 조건을 받아들인 책임이 있다."

정부가 경제 성장을 말하며 규제를 완화할 때 내버려둔, 해경이나 경찰이 공공의 안전이라는 명목으로 시민의 권리를 짓밟을 때 항의하지 못한, 언론이 자신의 권력을 휘둘러 여론을 창조해낼 때 그대로 따라간, 그 책임이 시민들에게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시 짚어 보자. 정부가 규제를 완화할 때 모두가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규제 완화라는 이름의 정책은 누군가에게는 해고의 칼바람으로, 누군가에게는 무한경쟁의 전쟁터로, 누군가에게는 빚더미 폭탄으로 찾아들었다. 그때마다 누군가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정부는 그들을 배제했다. 소수일 뿐이라거나, 이기적 집단이라거나,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세력이라고 음해했다. 지금 정부가 세월호 가족들에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언론은 그것을 부채질하거나 오히려 먼저 가공해냈다.

권리로서의 책임

우리는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이렇게 길들어져 왔다. 모든 사람이 "근본적으로 동등한 사람"이라는 감각을 잊어왔고 어느새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는 방법조차 잊어왔다. 세월호 참사가 낳은 고통의 한가운데서 가족들이 앞장서 권리를 일깨워줬다. 그들이 감내하는 고통은 책임을 공유하도록 이끄는 호소이며, 그들이 내보내는 분노는 구조를 바꾸도록 독려하는 용기다. 그리고 이미 우리는 저마다의 위치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됐다.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누구든 참사의 한가운데로 끌려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세월호 참사가 환기시킨, 그리고 각성시킨 시민의 책임은 결국 스스로의 권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 누군가의 권리를 함께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임은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는 것이다. 책임을 지는 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며 도덕적 유무죄를 따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보내는 신호는 우리의 권리를 누릴 책임을 호출한다. 각자의 권리를 누릴 책임이야말로 우리가 공유하는 정치적 책임이다.

책임은 권리다. 우리의 책임은 사회 안에 타인과 함께 속해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책임은 타인에 대한 응답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사건을 발생시킨 사회 구조에 대해 각자가 바꿀 수 있는 몫이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각자의 권리를 누리는 방법은 법 앞에 홀로 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책임은 정치적 책임이다. 공적인 소통에 참여하고 의견을 개진하면서 함께 권리를 이룰 관계를 조직하고 행동해야 한다. 표현의 자유나 집회·시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권리도 결국 이것이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실마리를 알려주는 것이다.


4.16 인권 선언, 다른 사회를 세울 권리

모든 사람은 책임을 공유할 권리가 있으며, 각자의 권리를 누릴 책임이 있다. 4.16 인권 선언이 제안되었다. 세월호 참사 이전과 달라져야 한다면 단절해야 할 것들을 선언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다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의 존엄을 다시 선언해야 한다. 지난해 12월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존엄과안전위원회는 4.16 인권 선언 추진 대회를 열었고 2016년 4월에 온 국민의 이름으로 인권 선언을 선포하자고 제안했다. 지난 14일에는 인권 선언 추진단 구성을 위한 원탁 회의가 열렸고 곧 추진단 모집을 시작할 예정이다.

인권 선언은 참사를 함께 겪은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만들어질 것이다. 생명이 위기에 처했을 때 구조될 권리, 실종자의 운명과 행방을 알 권리, 진실과 정의에 대한 피해자의 권리, 생명과 존엄과 안전을 지킬 줄 아는 세상에 대한 권리, 우리의 권리를 위해 행동할 권리…. 미처 알지 못해 빼앗겼던 권리, 알았지만 저항하지 못했던 순간, 심연에서부터 차오르는 존엄에 대한 감각이 이끄는 곳을 4.16 인권 선언 운동의 과정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6월부터 시작될 전국의 풀뿌리 토론은 참사로 붕괴한 사회를 다시 세우기 위한 밑작업이 될 것이다. 풀뿌리 토론을 조직하면서 우리의 기억과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고자 하는 시민들이 추진단에 함께 해주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이미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의 국가는 참사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타인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고 위로할 줄 아는 사람들의 국가, 돈보다 생명이 권력보다 진실이 소중하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들의 국가, 그래서 여전히 사람의 세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게 붙들어주는 사람들의 국가. 우리의 책임은 의무가 아니라 열망이다. 사람의 세계를 만들려는 정치적 열망이다. 4.16 인권 선언은 그 열망에 옷을 입힌 것일 뿐이다. 열망을 의지로, 책임을 행동으로 번역하기 위한 노력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이미 시작했다는 것뿐이다.

(미류 4.16연대 위원장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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