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 힘겨웠을 당신들이 보여준 정체불명의 힘"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띄우는 편지] <1> 당신들의 바다, 우리들의 바다

유가족 여러분이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하며 지붕도 없는 청와대 앞 거리에서 풍찬노숙을 시작한 지도 어느새 열흘이 훌쩍 넘었습니다. 진도 팽목항에서 아이들 구조 소식을 기다리며 발을 동동거려야 했던 그날로부터 왜 아이들이 죽어가야 했는지 진실을 찾아 헤매는 지금까지 당신들은 어떤 시간의 터널을 지나 왔을까요.

부모를 잃은 사람을 일컫는 말도 있고 배우자를 잃은 사람을 일컫는 말도 있지만 자식을 먼저 앞세운 사람을 일컫는 말이 없는 건 가히 그 고통을 짐작하기 어렵기 때문일 거라고, 며칠 전 농성장을 찾은 방송인 김제동 씨가 말하더군요. 애간장이 끊어진다는 단장(斷腸)의 슬픔 앞에 저리 모르쇠로 돌아앉은 청와대와 국회를 지켜보는 당신들의 마음을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있을까요. 농성장에 찾아든 엉터리 특별법 합의 소식에 당신들의 마음은 얼마나 또 꺾였을까요. 농성장을 오가다 보니 “이제 그만 좀 하지.”라는 시민들의 반응에 제일 속이 상한다던 당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보상금이나 바라고 그런다는 냉담한 비난들이, 이제 그만할 때도 됐다는 무심한 진단들이 비수가 되어 꽂히는 나날들 속에 이제껏 꺼이꺼이 마음 편히 울어보지도 못한 당신들이 계신 것은 아닌지요.

시민들이 너도나도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쏟아내던 그날들을 지나, 이제는 ‘잊지 맙시다.’라는 다짐을 권해야만 하는 날들이 다가왔습니다. 시민들이 하나둘 자신들의 일상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지금도 여전히 4월 16일을 잊을 수 없는 사람들. 그날을 오늘마냥 기억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때 왜 배에서 나오라고 얘기하지 않았을까’라는 속절없는 자책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곤 하는 사람들. 다른 가족들이 힘들어할까봐 이불을 뒤집어쓴 채 흐느껴 우는 사람들. 세상이 이리 돌아가는지 너무 몰랐던 게 무섭고, 죽은 아이들 볼 면목도 없는 상황에 이를까 무섭고, 자신이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할까 무섭고, 세상의 온갖 것이 다 무섭고 무서울 사람들. 그 모든 무서움들을 딛고 누구보다 힘겨웠을 당신들이 여기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런 당신들이 농성장을 찾거나 응원하는 시민들에게 연신 고맙다고 하십니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과연 당신들이 시민들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 일일까. 그래서 당신들께 전하고 싶었습니다. 아이와의 이별을 준비하기는커녕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일 겨를도 없이 힘겹게 내딛어온 당신들의 발걸음이 시민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건네어왔는지를. 우리에게 당신들이 어떤 의미인지, 당신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얻어왔는지, 우리들이 이 싸움에 함께하는 마음들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내 아이가 아니어서 다행이다'가 지금의 사고를 낳았다"

유가족대책위 대변인을 맡고 있는 유경근 씨가 말씀하시더군요. “태안 해병대캠프 사고 직전에 그곳에 우리 단원고 아이들이 다녀갔다. 사고 소식을 듣고서는 ‘아이고 우리 아이가 아니어서 다행이다.’라고 안도했다. 그리고 이번엔 우리 아이들에게 사고가 일어났다. 우리가 멈출 수 없는 이유다.” 어느새 당신들은 이 싸움이 단지 잃어버린 자식만을 위한 싸움이 아님을 직감하고 계셨습니다. 특별법은 진실과 안전을 위한 그저 시작에 불과한데 시작조차 못한 채 떠날 수는 없다고 거리에 서서 말하고 계셨습니다.

세월호와 당신들의 싸움에 마음을 묶은 시민들도 당신들을 “너와 내가 있을 수 없는 사이”, “이 사회의 불의의 대가를 모두를 대표해서 처절하게 치르고 계신 분들”, “우리를 대신해 최전방에서 싸우고 있는 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예술교육 단체를 이끌고 있는 모미나는 “‘이제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시민들을 생각하면 까뮈의 <페스트>에 등장하는 오랑시(市) 시민들이 겹쳐 떠올라 소름이 돋는다. 그들은 질병이 온 도시를 점령해오고 있음에도 제 집 현관을 노크하기 전까지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얼마나 더 내 가까운 이들을 잃어보아야 내 일이구나 하게 될까.”라면서 “자식 목숨을 잃고서 이 엉망으로 뒤엉킨 현실을 생생하게 목도한 이들이 어쩌면 시민으로서의 내 책임까지 어깨에 지고 저 길바닥에서 대신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말하더군요.

청소년문화의집에서 일하는 혜정 역시 “일상을 지켜내느라 바빠서 사회가 없어져가는 걸 막는데 같이 하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 싸우고 계신다.”며 많은 이들이 당신들을 바라보며 감사함과 미안함 사이를 오가고 있지 않겠냐고 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당신들을 그저 이기적 집단으로, 나와는 다른 특별한 고통을 겪은 사람으로만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에 대한 훌륭한 응답입니다. 어느 특별한 누구가의 우연한 불행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닥쳐올 수 있었던 아무개들의 죽음, 아무개들의 슬픔이었기에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이 싸움이 더 넓고 깊은 자장(磁場)을 일구어왔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이 싸움은 당신들의 싸움이면서 우리들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좀더 나아가고 싶었습니다. ‘너는 나, 나는 너’라는 인식에는 참사를 낳은 구조를 간파하는 깊은 통찰이 담겨 있지만, 당신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고통과 간절함의 간극을 가리게 될까 조심스러워졌거든요. ‘우리를 대신해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듣고서는 당신들이 혹여 자부심보다 고독감에 휩싸이지 않을까 염려되었습니다. 지난 세월 무수한 참사의 현장에서 소중한 가족을 잃고도 속절없이 흩어진 유가족들이 얼마나 많았던가요. 그리고 당신들은 흩어지지 않은 채 지금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런 당신들이 만들어온 특별한 힘을 놓치지 않고 싶었습니다.

당신들이 보여준 정체불명의 힘

세월호 대책위 상황실에서 일하는 인권활동가 미류는 “이곳 농성장에는 어떤 힘이 있다. 세다, 약하다라는 잣대로는 결코 평가할 수 없는 인간의 어떤 근원적 힘. 외부의 공격으로 깨어질 수 없는, 유가족 스스로 해체하기 전에는 결코 깨어지지 않는 힘. 유가족들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도, 최전선에 선 위대한 존재도 아니다. 너무나 평범한 그 사람들이 만들어온 그 힘을 보러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이끌림! 부러 이끌지 않았는데도 당신들이 시민들을 이끌리도록 만든다는 이야기에 저는 사뭇 매료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 역시 그랬더군요. 당신들이 움직였기에 저도 이끌렸고 지금껏 눈을 돌리지도 포기하지도 않게 되었으니까요. 당신들이 보여준 정체불명의 그 힘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그 바다는 유가족만이 본 바다다. 아무도 구하지 않고 어떤 약속도 지켜지지 않는 처절한 바다. 그 끔찍한 침묵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닥친 위험이 어떤 것인지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들이 유가족이었다. 그들은 침묵이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송두리째 강탈하고 있다고 증언해주었다. 목격자로서 증언자로서 우리를 일깨워주었고 그래서 우리는 함께 그 침묵의 바다를 하나둘씩 둘러싸고 지켜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통곡과 오열 속에서도 온몸으로 진실로 가는 길을 알려주고 있다.” 기록노동자 안미선은 일깨움의 힘에 주목했습니다.

청소년인권활동을 하고 있는 난다도 비슷한 고백을 전해왔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우리 사회가 기억해야 할 일들을 개인의 몫으로만 내버려두지 않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한 사람이 떠나는 것이 마치 하나의 세상이 떠나는 것과 같다는 말을 마음에 새길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나는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 유가족 분들의 싸움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가장 먼저 진실을 목도한 사람들, 진실과 생명을 향한 길을 내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우리가 존엄함과 인간됨을 잃지 않기 위해 던져야 하는 질문을 일깨워주는 사람들이 바로 당신들입니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가 사는 이곳이 또 다른 세월호들이 언제든 침몰할 수 있는 나라임을, 이 나라가 예비한 비극들이 누구나의 삶에나 느닷없이 닥칠 수 있음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이 엄청난 일을 겪고서도 사람들은 또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고 그 일상을 지키느라 사회를 바로잡을 틈을 놓치곤 합니다.

사회학을 공부하는 호연은 흩어지는 기억과 사람을 묶어세우는 힘에 주목했습니다. “유가족에게서 더 이상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보았다. 억울한 죽음들을 경험했던 사람들, 앞으로 비슷한 경험을 할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가 무엇인지, 다시 살아가기 위해 싸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셨다. 지금 나에게 일어나지 않는다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사회에서 살면서 순간 순간 누군가의 고통이 나의 고통과 이어져 있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안의 슬픔과 고통의 기억이 그냥 흩어지는 기억, 잊히는 기억이 아닌 사람을 잇고 함께 하는 기억으로 만들어주는 이들이야말로 유가족”이라고 말합니다. 간절함과 용기로 이어온 당신들의 싸움이 우리를 잇는 힘이 되고 있음을 당신들은 알고 계신지요.

어떤 이들은 이 총체적 부실과 의도적 무능 앞에 무기력해지는 자신들을 일으켜 세우는 힘에 주목하기도 했습니다. 지역아동센터에서 가난한 이웃의 아이들과 삶을 나누고 있는 영원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우는 유가족들을 보면서 오히려 힘이 났다. 그분들을 보면 오히려 내 마음이 치유 받는 느낌이다.”라고 말합니다. 가장 큰 위로를 받아야 할 당신들이 어쩌면 더 쉬이 슬퍼하고 무력해하는 우리들을 위로하고 무기력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다는 이 놀라운 역설. 이 역설 속에서 사람들은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누군가 해결해주길 마냥 기다리려서는 안 되는 이유를, 우리가 행동하는 만큼 누구도 무섭고 외롭게 떠나야 하는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임을 날마다 깨치고 있는 것이겠지요.

국가의 빈자리를 채우는 사람들

올 초에 한국전쟁을 앞두고 남편이 '빨갱이'로 몰려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간 뒤 홀로 남은 김말해 할머니를 만나 굴곡 많은 여든일곱 생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어요. 큰아들은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반송장이 되어 돌아왔고, 없는 집에서 고생만 하던 작은 아들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지금 10년째 평생을 걸쳐 장만한 자그마한 감밭과 삶의 고요를 허무는 송전탑에 맞선 싸움을 하고 계십니다. “하루라도 내 나라다 싶은 날이 없었데이.” 할머니가 평생을 통해 깨달은 국가의 추악한 몰골입니다. 그 잠잠했던 바다에 구조선 하나 제대로 뜨지 않은 시간들을 지켜보면서 당신들의 마음도 어렴풋이 그랬을까요. 진실을 결코 규명할 수 없을 것 같은 특별법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겠지요. ‘이걸 대체 국가라 할 수 있는가’라는 탄식과 ‘이런 게 원래 국가였다’라는 뼈아픈 통찰 사이에서 휘청거리는 마음들을 부여잡고 사람들은 국가의 빈자리를 채울 이웃을, 사회를 만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들이 누구보다도 이웃과 사회를 만드는 일에 앞장서 계십니다.

▲ 지난 2일, 청와대를 향해 삼보일배 행진을 하는 세월호 유가족들. ⓒ프레시안(서어리)
다가온 한가위에는 남들처럼 가족, 친지들과 따뜻한 밥 한 끼 나누고픈 당신들의 소박한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먼저 보낸 아이들 볼 낯이 조금은 생겨 덜 미안한 마음으로 마음껏 울 수 있게 될까요.

어릴 적 체육대회 날 줄다리기를 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줄을 한참 당기다 보면 상대가 끄는 힘에 못 이겨 이젠 끝이다 싶을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줄을 그만 놓을까 손에 힘이 풀리기 시작할 때 포기하지 않은 누군가의 힘을 느껴 다시 젖 먹던 힘까지 내어보곤 했었지요. 그러니 부디 힘을 내어주십시오. 그래야 우리도 줄을 놓지 않을 수 있습니다.

특별법의 향방이 어찌 되었든 지금껏 당신들이 보여준 힘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고 갈 길을 안내받았습니다. 당신들의 그 바다는 처음부터 우리들의 바다였음을 끝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힘이 부칠 때는 잠시 힘을 줄이셔도 됩니다. 이번엔 저희가 바짝 줄을 당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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