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의 마지막 한 방, 사이고 다카모리가 우리에게 남긴 것

[인물로 본 세계사] 충성과 반역 사이, 칼 대신 붓으로 되짚는 그의 일생

어떤 사람은 시대를 앞서가다 죽고, 어떤 사람은 시대를 거스르다 죽는다. 일본 근대사의 가장 거대한 상징이자 모순 덩어리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8~1877)는 이 두 가지 운명을 동시에 짊어진 사내였다. 그는 봉건질서를 무너뜨리는 혁명의 선봉에 섰으나, 역설적이게도 그 무너진 질서의 잔해 위에서 스스로를 불사르며 생을 마감했다. 오늘날 그가 '마지막 사무라이'로 추앙받는 이유는 단순히 그의 무용(武勇) 때문이 아니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개인이 겪는 실존적 고뇌와 집단적 명분이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삶은 150여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지금 여기 대한민국의 풍경과 기묘하게 겹쳐진다.

가고시마의 거구, 시대를 만나다

1828년, 일본 규슈 남단의 사쓰마 번(薩摩藩) 가고시마에서 태어난 사이고는 하급 무사의 아들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키 180cm, 몸무게 100kg에 육박하는 당대 보기 드문 거구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를 진정으로 돋보이게 한 것은 외양보다 그의 '입'이었다. 거침없고 솔직한 그의 언변은 때로 주변을 당혹케 했지만, 그것은 곧 그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훗날 그를 파멸로 이끄는 독이 되었다.

젊은 시절 행정 말단직을 전전하던 그를 알아본 것은 사쓰마의 혁신적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였다.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부국강병을 꿈꾸던 나리아키라 밑에서 사이고는 비로소 넓은 세상을 목격한다. 그러나 행운은 짧았다. 1858년 나리아키라가 급사하자 사이고는 큰 충격을 받고 스님과 함께 바다에 투신하는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다. 동료는 죽고 혼자 살아남은 이 사건은 사이고라는 인물이 지닌 '과잉된 충성심'과 '비타협적 기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유배와 복귀, 그리고 메이지 유신의 도래

이후 사이고의 삶은 부침의 연속이었다. 막부권력과의 갈등, 번 내부의 암투 속에서 그는 두 차례나 외딴섬으로 유배를 떠났다. 조선의 선비들이 유배지에서 학문과 자아를 성찰했듯, 사이고 역시 아마미오시마와 오키노에라부 섬에서의 고립된 시간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다듬었다. 시련은 그를 꺾지 못했고, 오히려 정치적 중량감을 키워주었다.

복귀한 사이고는 1860년대 일본 열도를 뒤흔든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의 중심에 섰다. 앙숙이었던 사쓰마와 조슈 번을 하나로 묶은 '삿초 동맹(1866)'의 주역으로서, 그는 수백 년간 지속된 도쿠가와 막부체제를 무너뜨리는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 1868년 에도(현재의 도쿄) 무혈입성은 사이고의 인간미와 협상력이 빛난 순간이었다. 적장 가쓰 가이슈와의 담판을 통해 불필요한 살상을 막고 평화적으로 성을 넘겨받은 사건은, 그가 단순한 칼잡이가 아니라 대의를 아는 정치가임을 증명했다.

혁명의 아이러니, 정한론과 세이난 전쟁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고 사이고는 육군대장이자 정부의 실세로 등극한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역사의 비극적 역설이 시작된다. 그가 세운 새 정부는 근대화를 명분으로 사무라이 계급의 특권을 박탈하기 시작했다. 단발령, 징병제, 폐도령(칼을 차지 못하게 하는 법)은 평생을 무사로 살아온 이들에게는 사형선고와 같았다. 자신이 주도한 혁명이 정작 자신의 기반인 사무라이 계급을 파괴하는 칼날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정부 내부와의 갈등은 1873년 '정한론(征韓論)' 논쟁에서 폭발했다. 사이고는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전쟁의 빌미를 만들겠다는 극단적인 제안을 내놓는다. 이는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려는 무모한 발상이었다. 다행히 이와쿠라 도모미와 오쿠보 도시미치 등 현실파의 반대로 부결되었으나, 이 사건은 사이고가 모든 공직을 버리고 낙향하는 계기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냉정한 시선을 견지해야 한다. 사이고의 정한론은 명백한 침략주의적 발상이며, 훗날 일본 제국주의의 불행한 씨앗이 되었다. 그를 낭만적인 비운의 영웅으로만 소비하기엔 그가 품었던 사상이 남긴 상흔이 너무 깊기 때문이다. 역사적 인물을 입체적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로야마의 최후, 그리고 죽음 이후의 부활

가고시마로 돌아온 사이고는 '사학교(私學校)'를 세워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정부와의 긴장은 고조되었고, 결국 1877년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메이지정부를 상대로 '세이난 전쟁'을 일으킨다. 신식군대의 총구 앞에 사무라이의 칼은 무력했다. 구마모토 성 공략 실패 이후 시로야마로 밀려난 사이고는 9월 24일,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향년 49세.

놀라운 점은 그가 죽은 뒤의 일이다. 반역자로 죽었던 그는 불과 10여 년 만에 사면 복권된다. 일본대중이 품은 그에 대한 애정과 경외심이 정부의 정치적 판단을 앞질렀기 때문이다. 도쿄 우에노 공원에 세워진 그의 동상은 위엄 있는 군복차림이 아니라, 평상복인 유카타를 입고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소박한 모습이다. 일본은 이처럼 '시대의 패자'를 영웅으로 부활시킴으로써 국가적 통합을 꾀했다.

오늘 대한민국, 사이고 다카모리를 읽어야 하는 이유

사이고 다카모리의 삶은 오늘날 우리사회에 몇 가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첫째, '혁명의 노화'에 대한 경계다.

사이고는 구체제를 무너뜨렸으나 스스로 구체제의 화신이 되어 사라졌다. 이는 한국의 민주화 세대에게도 유효한 경고다. 한때 세상을 바꾸려 했던 열정이 어느덧 기득권의 논리로 굳어질 때, 우리 역시 '사이고의 역설'에 빠지게 된다. 과거의 성취가 미래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진정성'이라는 이름의 함정이다.

사이고는 나라를 걱정하는 진심을 가졌으나, 그 방향은 침략주의라는 잘못된 길을 향했다. 현대 한국정치에서도 "내 마음은 진심이다"라는 주장이 모든 정책적 과오의 면죄부가 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러나 방향이 틀린 진심은 재앙을 부를 뿐이다. '옳음'이 없는 '진정성'은 얼마나 위험한가를 사이고는 보여준다.

셋째, '내려올 때'를 아는 결단력이다.

비록 반란으로 이어지는 비극을 낳았지만, 사이고는 자신의 신념이 꺾였을 때 미련 없이 권좌를 내던졌다. 탄핵과 수사, 선거패배 앞에서도 자리를 지키려 혈안이 된 오늘날의 정치 풍토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고 판단될 때 짐을 싸는 그의 단호함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그 이후의 행보가 폭력이 아닌 평화적 방식이어야 함은 자명하다.

넷째, 패자에 대한 기억과 포용의 미학이다.

일본은 반역자였던 그를 국가영웅으로 복권했다. 반면 한국사회는 여전히 이분법적 역사관에 갇혀 패자나 비주류에 대한 재평가에 인색하다. 시대를 잘못 만난 개혁가나 억울하게 역사 뒤안길로 사라진 이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복권할 것인가. 사이고를 대하는 일본의 방식은 우리에게 역사적 화해의 가능성을 묻는다.

우리 곁의 '동상'을 찾아서

도쿄 우에노 공원의 사이고 동상은 오늘도 개를 데리고 시민들을 마주한다. 그는 전쟁영웅이기보다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으로 기억되길 원했을지 모른다. 거창한 이념의 깃발 아래 스러져간 수많은 이들이 정작 원했던 것은, 평범한 일상을 지키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현대사에도 사이고처럼 격동의 세월 속에 영웅과 반역자의 경계를 오갔던 인물들이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을 신격화하거나 악마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남긴 궤적에서 오늘의 문제를 풀 열쇠를 찾는 것이다. 사이고는 끝내 칼을 내려놓지 못했지만, 우리는 이제 그 칼을 대신할 '투표지', '기사 한 편', '연대의 발걸음'을 가졌다.

당신은 오늘, 어떤 글로, 어떤 행동으로 시대를 마주하고 있는가. 그리고 당신의 붓끝과 손끝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사이고 다카모리가 남긴 마지막 한 방은, 바로 우리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다.

▲도쿄 우에노 공원의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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