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앞에서 "미치겠다"고 한 장관 뒤에는…

[서리풀 논평] 규제는 '죄악'이라는 '이권 정치'

규제는 '죄악'이라는 정치

아무래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 모양이다. 경제를 성장시킬 묘책으로 또다시 '규제 완화'를 들고 나왔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20년 가깝게 같은 소리의 반복이라니 오히려 민망하고 딱하다.

틀은 하나도 다르지 않지만 말이 과격하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다. 암 덩어리에 끝장 게다가 죄악까지, 분위기가 자못 살벌하다. 대박에 이어 이 또한 '은유'를 동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격적으로 '문화' 정치를 선보이고 있다고 해야 할까.

이런 해석대로라면 다음 차례는 온갖 전쟁의 은유가 동원될 것 같다. 전면전이니 불퇴전이니, 나아가 섬멸과 초토화까지 나온다 하더라도 놀랍지 않다.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보일 참이라지만, 꼴과 품위가 영 말이 아니다.

마음에 걸리는 것 한 가지를 먼저 짚는다.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충고를 따르자면, 규제라는 말의 프레임에 끌려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규제보다는 안전, 환경, 건강을 앞세우는 것이 맞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온 방송과 신문의 머리말을 동원한 '전면전'이 따로 없으니. 진흙 밭임을 알면서도 시시비비를 피하기 어렵다. 

늘 그랬지만 이번의 규제 놀음 역시 정책이나 행정이 아니라 정치임이 명확하다. 끝장 토론이라고 이름 붙인 이벤트를 연출했고, 모든 공중파 방송국이 나서서 월드컵 축구 중계를 흉내 냈다. 다른 무슨 증거가 또 필요할까.

이런 저런 사례는 드라마의 소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쑤시개를 낱개 포장할 때 하나하나 제조연월일을 표기해야 한다는 '기막힌' 경우를 보자. 당연히 다들 혀를 찰 것이다. 그렇지만 이건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동원된 '극적'(드라마틱한) 사례일 뿐이다.

장담하지만 앞으로도 이상한 사례들이 더 발굴될 것이다. 그러나 정말 필요한 일이면 조용하게 처리하면 된다. 태반은 솜씨 좋은 행정과 합리적인 정책 집행으로 해결할 수 있다. 이것이야 행정부가 본래 해야 할 일, 항상 하고 있어야 할 임무가 아닌가.

그러나 정치로서의 규제 몰이는 그게 아니다. 각종 소품과 사건으로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그것이 노리는 극적 효과! 한 마디로 시장 원리를 더 강하고 넓게 관철하려는 것이다. 경제 원리를 넘어 정치, 사회, 문화적 원리로.

이렇게 보면 정책 차원에서 규제를 따지는 것은 잘못 짚은 것이다. 이제야말로 규제 완화라는 유사 종교를 해체하는 것이 더 급하다. 그건 주술에서 풀려나 근대적 합리성을 회복하는 '정치' 행위다. 벌써 21세기가 시작된 지 오랜 마당에 시대착오라도 어쩔 수 없다.

첫 단계로 다음 몇 가지를 묻자.

첫째, 누가 규제의 이해당사자인가. 규제 완화는 흔히 공무원과 관료 사회를 공격한다. 행정부가 행정부를 공격하는 이상한 자해 현상이지만, 진정한 이해관계를 숨기는 방법으로는 안성맞춤이다.

물론, 민주주의가 완전하지 못하니 관료주의와 그 병폐가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당수 규제는 보호하려는 대상이 불특정 다수의 시민이거나 소비자이다. 이런 규제를 풀면 결국은 시민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이익을 보는 당사자는 누군가.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에서 거론되었다는 사례 한 가지를 보자. 학교 가까이에 호텔을 짓지 못하도록 한 학교보건법이 규제로 지목되었다. 규제의 이해당사자가 명확하게 대비된 대표적 사례다.

호텔 사업자는 학교보건법 때문에 호텔을 지을 수 없으니 규제를 풀어달라고 요구했고, 주무 장관은 그 규제 때문에 '미치겠다'고 했단다. (☞관련 기사 : 박 대통령 면전서 "미치겠다"는 장관에 반응들이…) 게다가 대통령은 이를 받아 죄악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누가 누구의 이익과 피해를 대변하는가. 이 자리에 학교보건법이 보호하고자 하는 시민은 없다. 학생과 학부모는 잘 묶이지도 않는 '추상'에 가깝다. 이들의 이해는 간접적이고 널리 흩어져 있다. 대신 호텔 사업자는 뭉쳐 있고 힘이 강하다. 정책 담당자와 친하기까지 하다.

거기다가 장관과 대통령은 또 누구를 편드는가. 규제의 권력 불균형은 누가 봐도 명확하다. 강화든 완화든, 방향만 다를 뿐이지 운동장은 크게 기울어져 있다. 정작 미치겠다고 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

둘째, 무엇이 규제의 대상인가. 규제의 대상은 흔히 사회적 가치가 각축하고 충돌하는 곳이다. 지금 거론되는 규제 거의 대부분은 돈벌이에 걸려 있다. 더 이익을 보도록 풀어달라는 것이다.

우선 '무엇'의 문제는 앞서 말한 '누구'의 문제와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돈벌이는 모두의 경제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빈약한 대기업 규제가 겉만 번지르르한 '국가' 경제라는 이름으로 또 얼마나 풀릴까.

일자리 창출이란 명분 역시 벌써 결판이 난 일이다. 대기업과 재벌이 일자리 만들기에 도대체 무얼 기여했는지. 공연히 서민과 젊은이의 일자리를 핑계로 삼아 경제라면 모든 것을 눈 감는 것이야말로 비정상과 부도덕이다.

어떤 분야, 어떤 가치인가도 문제다. 규제를 공격하는 진짜 이유가 혹시 건강과 안전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그 말썽 많은 원격 의료가 이미 거론되었으니 터무니없는 망상만은 아닐 것이다.

따지자면 의료만큼 규제가 많은 것이 또 있을까. 의사나 간호사 면허부터 강력한 규제다. 그러나 이런 규제를 하는 이유 또한 분명하다. 돈을 좀 더 버는 것보다(그것도 일부가) 건강이 더 중요한 사회적 가치라는 것이다.

사실 규제를 핑계로 건강과 안전, 삶의 질을 간접적으로 위협하는 문제가 더 크다. 김영삼 정부 시절의 규제 완화가 어떤 결과를 불러 왔는지 모르는가. 작업장에서 환경과 안전기준을 완화하는 바람에 일하는 사람들이 피해를 홀로 짊어졌다.

분위기로 보아 이번에는 범위를 가릴 것 같지 않다. 예를 들어 임금, 비정규직, 노사 관계 등의 노동 문제 전체. 고용 유연성, 일자리, 고령화 대비 등등 무슨 말로 치장해도, 돌고 돌아 결국 보통 사람들의 생명과 안위, 복지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 뻔하다.

앞의 두 가지에 더해 규제를 어떻게 결정하는지도 문제 삼아야 한다. 먼저 말한 이유들 때문에라도 규제만큼 민주주의가 중요한 것이 없다.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결정의 참여자와 힘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진다. 그러나 지금 형편이 어떤가.

대통령의 단독 플레이에 독단도 이런 독단이 없다. 경제부총리는 오로지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느라 바쁘다. 그나마 형식적으로 참여자를 넓힌다 하더라도 '그들'만의 리그다. 이미 생방송 중계에서 보지 않았는가.

결국 규제의 정치는 또 다시(!) 완고한 사회 경제적 불평등과 권력 불균형을 그대로 재현한다. 당장은 체감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길게 보면 다시 기존의 불평등과 불균형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이 그늘이 얼마나 넓고 오래 갈까.

아무 것도 따지지 않는 규제 완화는 차라리 선동이다. 게다가 그 정당성은 빈약하고 윤리적으로는 부도덕하다. 우선, 규제 완화라는 무차별적인 선동의 맨 얼굴을 드러내야 한다.

시절이 수상하다고 지레 비관할 필요가 있을까. 정치의 동력이 전근대적인 주술에 기대고 있는 만큼, 그 기반은 허약하고 동요하기 쉽다. 또한 보통 사람들이 그동안 겪은 고통이 있으니 사회 전체가 학습이 된 것도 큰 덤이다. 시민의 판단과 성찰이 눈먼 돌진에 저항하는 기반이 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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