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선언 주역=전두환? 노태우? 진짜 주인공은…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45> 6월항쟁, 스물일곱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전두환, 6월 20일 이전에 직선제 생각? 객관적 증거 없다

프레시안 : 지난번에 직선제 문제에 관한 김용갑과 전두환의 주장을 살펴봤는데, 그 부분을 조금 더 짚어봤으면 한다. 김용갑은 1987년 6월 18일 자신이 전두환에게 직선제 수용을 얘기하자 전두환이 '지금 바로 노태우에게 가서 그대로 설명해줘라'라고 지시해 자기가 그렇게 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6월 17일에 직선제 수용 방안을 검토해보라고 한 데 이어 19일에는 더 강하게 직선제 수용을 얘기했다고 돼 있다.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고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이런 점은 생각해볼 수 있다. 4·13 호헌 조치로 전두환은 궁지에 몰릴 대로 몰려 있었다. 그런 속에서 발생한 6월 10일 이후의 엄청난 시위는 너무나 뜻밖이어서 정신적 공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전두환 스스로 4·13 호헌 조치를 철회하겠다는 주장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통령 직선제와 내각 책임제를 놓고 선택적 국민 투표를 한다면 결과는 뻔했다. 그건 하나 마나 한 일이었다. 거기다가 군도 나올 수 없었다. 그러니 어떠한 선택지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전두환은 4·13 호헌 조치로 자신도 정국을 타개할 방안을 내놓을 수가 없었지만, 후계자인 노태우나 민정당도 정국을 풀어갈 방법을 내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4·13 호헌 조치가 없었다면 상황이 어땠을까. 그랬다면 노태우, 이춘구 등 민정당 당직자들은 야당에 대해 계속 개헌 논의를 하자며 시간을 끌다가 몇 달 후 '전두환 대통령의 임기가 얼마 안 남았다. 개헌 문제로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고 하면서 '현행 헌법으로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고 그 후 개헌을 하자 또는 하겠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또는 몇 달 동안 끌다가 '이젠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 몇 가지 민주화 조치를 취하며, 이렇게 그렇게 하자는 의견이 실제로 내부에 있었는데, '시간이 없으니까 직선제 말고 내각제 개헌이라도 하자'는 식으로 내각제 개헌을 밀고 나가는 방식을 취할 수도 있었다.

이처럼 여러 가지 대응 방법이 있을 수 있었고, 6월항쟁에 맞닥뜨려서도 나름대로 대응 방안을 모색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 때문에 이런 일이 다 불가능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전두환이 답답하기 그지없는 상태에서 김용갑 민정수석에게 '네 의견인 것처럼 말하면서 노태우를 한번 떠봐라', 이렇게 했을 가능성은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 것이 전두환과 김용갑의 얘기에 그런 식으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해석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나와 있는 명백한 여러 가지 사실을 놓고 볼 때 전두환에게 직선제 개헌을 하겠다는 의사가 있었던 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전두환 쪽에서 '6월 20일 이전에 이미 전두환은 직선제를 생각하고 있었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그런 주장을 입증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가 있다고 볼 수 없다.

전두환·노태우, 6·26 대행진 이틀 전 직선제에 '조건부' 합의

프레시안 : 그간 이 문제에 관해 엇갈리는 주장이 여럿 나와 적잖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 것 같다.

서중석 : 확실하고 분명한 사실은 전두환과 노태우가 직선제에 합의한 것은, 그것도 6·26 국민 평화 대행진 상황을 보고 나서 결정하자는 전제를 달고서 한 것이지만, 전두환이 김영삼과 영수 회담을 한 6월 24일 그날 늦은 오후 어느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건 양쪽 자료에 나오는 사항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전두환과 이만섭의 회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이 회담이 있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되짚어보자. 6월 17일 밤 전두환은 노태우가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된 것을 축하하는 술자리에서 노태우를 중심으로 정국 수습 방안을 마련하라고 얘기했다. 전두환이 그렇게 물꼬를 터주자 민정당은 21일에야 6·10 국민 대회 이후 최초로 당론을 수렴하는 의원 총회를 열었다. 22일 노태우는 전두환에게 시국 수습책의 하나로 여야 영수 회담을 건의했다.

사태가 워낙 다급했기 때문에 전두환은 그 건의를 받아들였다. 24일 전두환을 만난 김영삼은 4·13 호헌 조치 철회, 선택적 국민 투표 실시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어려운 대목만 나오면 '노태우와 만나 의견을 절충하라'며 회피했다. 김영삼은 '당신이 책임자 아니냐. 왜 자꾸 미루느냐'고 몰아붙였다.

전두환으로서는 1979년 12·12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당하는 수모였다. 자신이 벼랑 끝에 몰려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지 않았겠나. 전두환은 점심 약속을 내세워 회담을 끝내려 했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김영삼이 주저앉힌 통에 전두환은 김영삼과 점심 식사까지 같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전두환은 끝까지 노태우를 거론하며 김영삼의 요구를 피해갔다. 김영삼은 당으로 돌아가자마자 '영수 회담이 결렬됐다'고 하면서 '6·26 국민 평화 대행진을 강행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전두환과 민정당이 당황하게 된다.

그렇게 전두환이 김영삼한테 수모를 당한 후 회담한 사람이 이만섭이었다. 전두환은 이날 김영삼뿐만 아니라 이민우 신민당 총재, 이만섭 국민당 총재하고도 회담했다. 3당 영수 회담이니까 돌아가면서 한 것이다.

▲ 1987년 6월 24일 영수 회담을 위해 만난 전두환과 이만섭. ⓒ국가기록원


"동교동, 상도동 머리 처박고 싸우게 하라" 이만섭 조언 경청한 전두환

프레시안 : 전두환과 이만섭의 회담에서는 어떤 얘기가 오갔나.

서중석 : 전두환과 이만섭의 회담은 그러한 배경 아래 진행됐는데, <전두환 육성 증언>에 그 내용이 자세히 나온다. 재미있는 건 김영삼과 회담한 내용은 이 책에 한마디도 안 나온다는 것이다. 전두환 기준으로 보면 김영삼과 한 회담은 지독한 자리였고, 그에 반해 이만섭과 한 회담 내용은 전두환한테 유리한 것이니까 그런 현상이 생긴 것이다.

이 회담에 대해 김성익은 이만섭이 '전 대통령을 위하는 마음으로, 전 대통령과 같은 입장에서 조목조목 이해득실을 따져 이야기했다'고 썼다. 그때 전두환이 대단히 진지하고 진중한 표정으로 경청하는 모습이었다고 기술했다. 전두환은 혼자 떠드는 게 몸에 배다시피 한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때만은 진지한 청강생으로 돌변한 것이다.

이만섭은 뭐라고 했느냐. 이만섭은 '백척간두의 이 난국은 떳떳하게 직선제를 해야 풀린다. 비상 조치는 절대로 선포해서는 안 된다'면서 비상 조치를 선포할 것인지 먼저 분명히 밝혀달라고 말했다. 전두환은 "비상 조치는 절대로 선포하지 않습니다"라고 답변했다. 이건 전두환이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이다. '그러면 직선제밖에 없지 않느냐', 이만섭은 당연히 이렇게 다시 물었다. 이건 이만섭 책에 이렇게 나오는데, 전두환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고 한다. 이만섭은 '김영삼이 주장한 선택적 국민 투표는 결과가 뻔하다. 그걸로 국력 낭비하지 말고 깨끗이 직선제를 받아들여라'라고 하면서 이렇게 얘기했다. 직선제를 해서 "동교동, 상도동 머리 처박고 싸우게 하고 이쪽은 정정당당하게 물가 안정, 올림픽 가지고 심판받는 게 좋습니다."

그야말로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항을 얘기해준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이런 얘기를 많이 했겠지만, 이만섭이 특히 이렇게 몰려 있는 전두환한테 이날 그 얘기를 해준 것은 전두환한테 더 강한 울림이 있을 수 있었다. 전두환으로서는 참으로 듣고 싶었던 소리였다.

프레시안 : 전두환이 진지한 청강생으로 돌변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서중석 : 전두환은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방안, 궤변에 지나지 않는 주장이지만, 하여튼 그걸 얘기했다. <전두환 육성 증언>에 그대로 나오는데 뭐라고 했느냐. "내 지론은 현행 헌법이 우리 실정에 좋다는 데에는 불변입니다. … 국민의 감정이 '내 손으로 뽑자'는 것인데 그것을 충족시키는 방법으로 대통령 선거법을 직선제에 가깝게 고치는 방법도 있는 것 아닙니까. 선거인단이 선거인단 선거 때 자신이 약속한 대통령 후보를 찍도록 법적 구속력을 갖게 하면 직선제와 같은 것이지요."

이만섭 회고록에 의하면 이날 전두환은 마지막으로 "이 얘기를", 직선제 얘기를 말하는데, "노(태우) 대표에게도 한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이만섭이 "물론 노 대표에게도 충분히 얘기했습니다. 대통령께서 결심만 하시면 제가 노 대표를 다시 만나 마음을 굳히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답변한 것으로 나온다. 이만섭은 회고록에 "그날 내 말을 진지하게 듣던 전 대통령은", 이날은 정말 진지하게 들었던 모양인데, "바로 그날 저녁 즉각 노 대표를 청와대로 불렀다고 한다"고 썼다. 그런데 직선제 권고 시점과 관련해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노태우는 왜 6·26 대행진 이틀 전 "직선제? 안 될 말씀" 발언했나

프레시안 : 무엇인가.

서중석 :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직선제를 권고한 날짜에 대해 박철언이 다른 주장을 했다. 박철언이 쓴 걸 보자. "6월 23일, 연희동에서 노 대표가 급히 보자고 했다. 단둘이 만났다. 어둡고 심각한 표정으로 노 대표가 말했다. '대통령이 직선제 하자고 하더라. 사태 수습을 위해 그 길밖에 없다고 하면서 난국 타개에 자신을 잃은 듯하더라. 처음에는 반대 의견을 얘기했으나 결심이 강한 듯해서 오늘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렇게 얘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번엔 노태우 얘기를 들어보자. 노태우는 6월 24일 연이은 영수 회담을 보고 뭔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그날 저녁 전두환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에 들어갔다. 거기서 얘기를 나누던 중 전두환이 불쑥 "직선제를 해도 마, 이기지 않겠소?"라고 말을 꺼냈다고 한다. 그러자 노태우는 "무슨 말씀이십니까? 직선제로 이긴다고요? 안 될 말씀입니다", 이렇게 부정적으로 반문했다고 한다.

바로 이 부분 때문에 그동안 말이 많이 나왔던 것인데, 노태우는 이렇게 변명했다. 전두환이 직선제를 한다고 했다가 뒤집으면 나라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기 때문에 "앞으로 절대 변하지 않을 결심"으로 굳혀야겠다는 마음으로 자신이 반어법을 썼다고 주장했다. 노태우는 자기 책 앞부분에 전두환이 그전에도 이런 큰 문제에 대해 결정을 뒤집은 적이 있었다고 쓰기도 했다.

그러면서 노태우는 "모든 것을 나에게 맡기고 관여하지 말아주세요"라고 말했다고 자기 책에 썼다. 노태우는 두 사람이 만난 그 자리에서는 6·29선언 내용이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이 아니었고 '직선제를 한다', '김대중을 사면 복권한다'는 두 가지만 합의를 봤다고 강조했다.

6·26 대행진 전에 전두환·노태우가 직선제 수용 발표했다면…

프레시안 : 박철언은 노태우를 위해 전력을 다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 박철언과 노태우의 증언이 엇갈리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서중석 : 노태우의 이 증언은 자세하고 논리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렇지만 박철언 주장도 사실적인 감을 주는 면이 있다. 박철언 증언에 따르면 노태우가 "오늘", 그러니까 6월 23일에 받아들인다고 했으니까 전두환이 노태우한테 직선제를 수용하라고 얘기했다는 날짜는 22일이 된다.

왜 노태우와 박철언의 증언이 날짜에서 2일이나 차이가 날까. 이만섭의 책, 김영삼 회고록 등을 포함해 여러 관계자의 책을 놓고 볼 때 그 시점이 24일 저녁이라는 노태우 주장이 더 설득력은 있다. 난 박철언의 증언을 이렇게 해석한다. 6월 22일에 전두환이 자신의 뜻이라며 직선제 수용 문제를 거론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이때는 받아들이라고 지시한 게 아니라 '이게 내 의견이다', 이렇게 피력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노태우가 어둡고 심각한 표정으로, 노태우는 이때까지는 직선제를 할 생각이 없었던 게 분명한데, 박철언한테 '대통령이 직선제 하자고 하더라'라고 얘기했다는 증언이 나오게 된 것 아니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정리하면, 이젠 도저히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전두환이 직선제 문제에 대해 노태우와 합의를 본 건 6월 24일 저녁 이후였다. 두 사람은 이때 직선제와 김대중 사면 복권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때도 최종 결정은 아니었다. 최종 결정이었다면 6월 25일에 발표해서 6·26 국민 평화 대행진을 취소시킬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점은 아주 중요하다.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6월 26일에 엄청난 시위가 또 일어날 게 분명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전날 '직선제를 하겠다'고 발표한다면 전두환과 노태우로서는 명분이 얼마나 좋은가, 이 말이다. 명분도 아주 좋았겠지만, 만약 그렇게 됐다면 6·29선언이 6·26 대행진에 굴복해서 나왔다는 주장이 성립하기 어렵게 된다. 6월항쟁에 무릎을 꿇은 결과라는 점도 약해질 수 있었다. 6월 25일에 발표했다면 무엇보다도 6월항쟁이 반 토막이 나면서 역사적 의의가 반감했을 것이고 민주화 운동 세력은 크게 분열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6월 25일에 발표하는 것하고 6·26 국민 평화 대행진 이후인 6월 29일에 발표한 것은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난다. 그런데 전두환도, 노태우도 25일에 발표하자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이심전심 아니었겠나.

엄청난 규모로 전개된 6·26 대행진…전두환·노태우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오월의봄
프레시안 :
6·29선언문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나.

서중석 : 직선제를 수용한다는 문안은 6·26 국민 평화 대행진 전날인 25일에야 노태우의 주도 아래 어느 정도 준비됐다. 그 점은 확실하다. 6·26 국민 평화 대행진 상황을 보고, 문안을 가다듬어 발표하려 한 것이다.

6월 25일 아침 노태우는 자신의 집에서 박철언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시국 타개 종합 방안을 마무리하여 곧 독자적으로 발표해야겠다. 대통령 직선제, 김대중의 사면 복권, 시국 사범 석방, 언론기본법 폐지 등을 포함시켜라.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민정당) 대표가 대통령과 사전 상의 없이 독자적으로 선언하고 나중에 대통령이 추인하는 형식을 취하기로 전 대통령과 합의했다." 이 내용이 박철언 회고록에 나오는데, 이건 정확한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그날 박철언은 안기부 특보실 연구실장 강재섭 등과 함께 문안 작성에 들어가게 된다.

이처럼 한쪽에서는 직선제 수용 문안 작업이 이뤄졌지만, 여권의 한 고위 인사가 전망한 대로 정국 전개의 분수령은 역시 6·26 국민 평화 대행진이었다. 전에 얘기한 것처럼 민권이 승리할 것인가, 아니면 군부 독재가 또 다른 간특한 술책을 내놓을 계기를 마련할 것인가가 바로 평화 대행진 상황에 달려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두환이 권복경 치안본부장에게 시위를 초동 단계에 진압하라고 직접 지시한 것이다. 그렇지만 6·26 국민 평화 대행진은 초동 단계에서 꺾이기는커녕 전국의 주요 도시가 망라돼 엄청난 규모로 전개됐다. 이때까지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동시다발 시위였다.

이제 굴복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노태우와 박철언은 6월 27일 오후 5시 15분부터, 이건 시간까지 정확하게 나오는데, 다섯 시간 넘게 선언문을 손질하면서 세부 사항을 논의했다. 세상에 알려진 6·29선언은 이 자리에서 노태우와 박철언, 이 두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

프레시안 : 6·29선언 주역이 누구인가를 두고 그동안 전두환 쪽과 노태우 쪽이 옥신각신했다. 그렇지만 6월항쟁이 없었을 경우,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도 6·26 국민 평화 대행진이 조기에 진압됐을 경우 상황이 어떠했을까를 생각해본다면 직선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든 진정한 주역은 따로 있었던 셈이다. 다시 돌아오면, 전두환 쪽에서는 6·29선언문 작성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나?

서중석 : 선언문 작업을 하던 중 박철언은 안무혁 안기부장을 만났다. 박철언 책에 이 내용이 나오는데, 그래서 나는 안무혁이 전두환과 노태우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선언문 작업은 노태우 쪽에서 하는 걸로 하기로 했지만, 그래도 틀림없이 누군가 중간 다리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봐야 한다. 지금까지 나온 자료로 보면 그게 안무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곧 나온다고 하는 전두환 회고록에 관한 소개 기사에는 전두환 아들 전재국이 메신저 역할을 했다고 돼 있다. 이 부분은 전두환 회고록이 출간되면 다른 자료들과 비교하면서 다시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전두환은 6·29선언에서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은 27일 오전 9시 20분 이종률, 김성익 비서관을 불러 "이달 말쯤 노 대표가 (…) 입장을 밝히면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결단을 내려야 하니 그 담화를 준비해야 돼"라고 말했다. 28일 오전 9시 50분이 지난 때에 전두환은 그다음 날(29일) 노태우가 건의하는 방식으로 처리한다는 사항과 건의안 내용을 김성익에게 말해줬다.

28일 저녁 노태우는 집에서 박철언과 함께 최후 준비와 점검에 들어갔다. 그리고 29일 오전 9시가 조금 지나서 노태우는 민정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6·29선언을 쭉 읽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마흔여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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