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도 두 손 들게 만든 명동성당 농성 투쟁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37> 6월항쟁, 열아홉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프레시안 : 이번에는 6·10 국민 대회에 이어 전개된 명동성당 농성 투쟁을 짚어봤으면 한다.

서중석 : 1987년 6·10 국민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처럼 시위다운 시위를 했다고 느끼며 모두들 뿌듯한 심정이었다. 이날 시위 투쟁을 통해 이들은 군부 독재 타도, 민주화 쟁취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많은 학생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수십 년 만에, 그중 상당수는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청난 규모의 시위에 동참하거나 그걸 지켜봤다. 최루탄을 퍼부은 경찰과 맞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화염병을 던지며 싸우는 격전의 현장을 경험하면서 이들은 '이것이 역사구나. 이곳이 역사의 현장이구나. 역사는 이렇게 이뤄지는 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역사의 현장이 6월 10일 그날 밤부터 계속 이어질 줄은 몰랐다. 6·10 국민 대회는 단 하루의 투쟁에 그치지 않고 6월항쟁으로 상승, 확대되지 않았나. 그럴 수 있었던 것은, 6·10 국민 대회가 명동성당 농성 투쟁으로 이어졌고 그러면서 학생들의 지원 투쟁과 넥타이 부대의 시위가 나타났으며 지방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경찰에 밀려 명동성당에 들어온 시위대, 토론으로 농성 지속 결정

프레시안 : 명동성당 농성 투쟁, 어떻게 시작됐나. 처음부터 농성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지 않나.

서중석 : 6월 10일 4시를 지나면서 경찰의 무차별 최루탄 발사로 학생, 시민이 명동성당 안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들을 맞이한 건 상계동 재개발 지역 주민들이었다. 명동성당에서는 강제 철거에 반대하는 상계동 주민 73세대, 200여 명이 1986년 연말부터 천막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밤이 된 9시 55분경 시위대가 횃불을 들고 시위하면서 명동성당 농성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 무렵 경찰은 명동 일대 교통을 차단했다. 그래서 경찰과 접전을 벌이다 밀린 시위대가 명동성당 안으로 계속 들어왔다. 시위대는 화염병을 던지고 투석전을 벌이면서 경찰과 팽팽하게 대치했다.

이때 전경들이 현명하게 대처했더라면, 그러니까 시위대로 하여금 성당에서 나가게 했더라면 명동성당 농성 투쟁은 안 일어났을 것이다. 그렇지만 예전부터 해온 방식대로 수천 명의 전경이 명동성당 주변을 빼곡하게 에워싸고 그 안에 있는 시위대를 전부 연행하려 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프레시안 :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이어간다는 결정은 어떤 단위에서 내린 것인가.

서중석 : 경찰이 그렇게 나오면서 시위 참가자들은 이제 집으로 못 가게 되지 않았나. 시위대는 성당 옆에 있는 문화관 문을 뜯고 들어가 철야 농성을 준비했다. 그 후 6월 11일 상오 4시부터 시위대는 농성을 해제할 것인가, 계속해서 농성 투쟁을 할 것인가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일부 학생들은 '국본(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과 서대협(서울 지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에서도 해산이 타당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명동성당 안에서만 싸울 게 아니라 각 캠퍼스에 돌아가서 다시 학생들과 함께 싸워야 한다'면서 해산하자고 주장했다. 그것에 대해 시민 측 그리고 집행부에 속하지 않은 일반 학생들은 반론을 제기했다. 이들은 '계획되지 않은 것이라 하더라도 이 농성이 6·10 국민 대회 이후 새로운 투쟁의 구심점이 돼야 한다. 투쟁 열기를 어렵게 끌어올렸는데 만약 이대로 해산하면 그걸 어떻게 다시 끌어올릴 수 있을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지 않느냐. 그러니 여기서 계속 싸우자'고 주장했다.

이렇게 양쪽이 토론을 하고 있는데, 국본 대변인 인명진이 "6·10 국민 투쟁은 6월 10일 24시를 기해 종료됐고 명동 농성 투쟁은 국본과 무관하다"고 발표했다는 기사가 실린 신문이 전달됐다. 그 때문에 분위기가 험악해지면서 한때 국본을 성토하는 장이 되기도 했다. 해산과 농성 지속을 각각 주장하던 양측은 최소한 12일 정오까지 농성을 계속하자는, 그러니까 농성을 하루 더 이어가자는 절충안에 도달했다.

▲ 명동성당 농성 전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다시 끓어오른 투쟁 열기…명동성당 바깥에서는 농성 지원 시위

프레시안 : 경찰은 어떤 조치를 취했나.

서중석 : 11일 오전 10시가 조금 지난 시각, 시위대는 '해방춤'을 추면서 레이건, 전두환, 노태우의 허수아비 화형식을 거행했다. 그러자 경찰은 최루탄을 난사하면서, 시위대가 친 바리케이드를 무너뜨리고 성당 안으로 밀고 들어오려 했다.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맞섰다. 시위대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힌 경찰은 물러났다. 오후 1시경 시위대는 바리케이드를 복구했다. 그렇지만 최루 가스 때문에 명동 일대 행인들은 눈을 뜰 수 없었고 상가의 절반은 철시했다.

경찰은 '농성하고 있는 사람들을 전부 연행하겠다'는 방침을 명동성당에 통고했다. 그러고 나서 오후 2시경 다시 최루탄을 퍼부으며 맹공격을 해왔다. 성당에 왔다가 엉겁결에 갇히게 된 신자들과 시민들은 최루 가스로 범벅이 됐다. 도처에서 비명 소리가 나면서 아비규환의 생지옥 같았다. 경악을 금치 못한 명동성당 김병도 주임 신부는 '명동성당에서 이렇게 최루탄을 쏘는 것은 예수께 총부리를 대는 것이다. 만일 계속 최루탄을 쏜다면 전두환 정권이 가톨릭교회에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강력히 경고했다.

강력한 항의에 놀란 경찰은 성당 입구 밖으로 잠시 철수했다. 그러면서 오랜만에 휴식이 찾아왔다. 이때 무수히 많은 호흡 곤란자, 수포 발생자와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일이 중요했는데 수녀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렇지만 눈에 최루탄 파편이 박힌 한 학생은 병원에 실려 가던 중 실명했다.

프레시안 : 명동성당 바깥 분위기는 어떠했나.

서중석 : 명동성당 바깥에서도 다시 시위 열기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11일 오전부터 서울대, 서울시립대, 경희대, 한양대, 외국어대 학생들, 이 가운데 서울대를 제외하면 모두 서울 동부 지역 학생들이었는데, 이들이 명동 출정식을 열고 명동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에는 명동에 넥타이 부대 시위가 등장했다. 넥타이 부대 시위는 1시간 동안 계속되다가 점심시간이 끝나자 소멸했다.

오후에 충무로, 남대문시장 일대 등에서 명동성당 농성을 지원하는 시위가 전개됐다. 6시경에는 미도파백화점과 백병원 쪽에서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손을 흔들며 성당 농성 투쟁을 성원하는 시위를 벌였다. 지원 시위대가 명동 상가 부근까지 올라오자 농성 시위대는 바리케이드를 넘어 명동 거리에 진출해 경찰과 밤까지 공방전을 벌였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이날도 상계동 철거민들은 명동성당에서 솥을 걸어놓고 라면을 끓였고, 시위대의 빨래도 해주고 잠자리도 제공했다. 명동성당 청년 단체 연합회 회원들은 부상자를 간호하고 필요한 물품을 수집해 전해주는 등 뒷바라지를 했다.

이날 지방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대전, 전주, 익산, 순천, 경주, 안산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경주에서는 동국대 경주 캠퍼스 학생들이 밤늦도록 시위를 벌였다.

"언니, 오빠들이 하시는 일은 훌륭한 일", 가슴 뭉클하게 한 여고생들의 도시락 응원

프레시안 : 그다음 날(12일)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12일 상오 4시, 비상 소집돼 달려온 40여 명의 신부들이 서울 교구 사제단 회의를 열었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위험을 피해 온 사람들을 쫓아낼 수 없다", "도덕성과 정통성을 잃은 현 정권에 대한 농성 학생들의 민주화 투쟁은 정당하다"며 사제의 양심으로 이들을 끝까지 보호할 것을 결의했다. 농성 투쟁을 공식적으로 지지한 이들은 무차별 최루탄 발사에 항의해 시한부 동조 농성에 들어갔다.

점심 때 농성 시위대에게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민주화 운동사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기억으로 상기되는 사건이다. 뭐냐 하면, 담장을 사이에 두고 명동성당과 이웃한 계성여고 학생들이 점심 도시락을 걷어 농성장에 보낸 것이다. 그것도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사연과 함께. "언니, 오빠들이 하시는 일이 훌륭한 일이라는 걸 저희는 압니다. 힘내세요. 저희들은 언니, 오빠를 사랑합니다." 여고생들의 마음이 잘 담겨 있는 예쁜 글들이었다.

낮 12시 45분경 농성 시위대가 명동 거리에 나섰다. 허기에 지치고 최루 가스와 땀으로 범벅이 된 데다 햇볕에 검게 그을린 모습이었다. 그러한 시위대가 나타나자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이 박수를 보내고 환호했다. 주변 건물에 있던 시민들은 창문을 활짝 열고 두루마리 휴지를 통째로 뜯어 거리로 날려 보냈다. 그래서 명동 일대가 온통 하얀 꽃으로 뒤덮이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들은 옥상에 올라가 손을 흔들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지붕 위에 올라가 시위를 지켜봤다.

12시 50분경에는 점심시간에 나온 명동 일대 사무원들이 시위를 벌였다. 근처 빌딩 옥상에 있던 사람들도 호응했고 상가 종업원들도 박수로 동조했다. 충무로에 있던 시민들도 함께 구호를 외쳤다. 오후 2시경에는 명동 입구부터 신세계백화점 앞 사이의 도로 주변에 시민 2000여 명이 모였다. 대부분은 부근에 있던 은행, 증권사, 보험사 사무원들이었는데 이들은 "독재 타도"를 함께 외쳤다. 전날 모습을 드러냈던 넥타이 부대가 본격적으로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오후부터 늦은 밤까지 명동 일대에서는 학생들의 농성 투쟁 동조 시위가 전개됐다. 서울 시내 20여 개 대학 학생들이 시내에 나와 동조 시위를 벌였다.

부산과 마산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신임 조종석 서울시경국장은 이날 명동성당 농성 투쟁을 극렬분자에 의한 체제 전복적 국기 문란 행위로 규정하고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 명동성당 마당에서 열린 시국 토론회 모습.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뾰족한 수 없던 전두환 정권, 결국 천주교 측에 중재 요청

프레시안 :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명동성당 농성 투쟁이 지속되는 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정권 차원에서 어떤 대책을 세웠나.

서중석 : 전두환은 명동성당 농성 투쟁을 건국대 사태(1986년) 때처럼 다루고 싶었다. 6월 11일 저녁 식사를 할 때 '명동성당에 학생들이 들어갔다'는 뉴스를 보고 대뜸 떠오른 것이 건대 사태였다고 한다. 역시 전두환다운 발상이었는데, 문제는 건국대와 명동성당은 입지 조건이 너무나 달랐다는 점이다.

13일 아침 9시 10분 전두환은 관계 부처 장관들과 청와대 비서실장, 경호실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명동성당 사태를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고건 내무부 장관은 11일에 이어 12일에 1만 3000명이 교내 시위를 했고 가두시위가 전날보다 훨씬 확대돼 83개소에서 5만 7000명이 참여했다고 보고했다. 고건은 "일부 시민이 동조, 가담하거나 고무하는 것이 심각한 현상입니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문제는 시민이 시위대에 호응한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전두환 정권 쪽에서 볼 때 그것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는 경찰의 피로가 쌓여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 군중의 야유로 사기가 매우 저하돼 있다는 점이었다. 전두환이 어떻게 전망하느냐고 묻자 고건은 시위 사태가 계속될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답했다.

전두환을 더욱 실망시킨 건 5·26 개각으로 새롭게 중임을 맡은 자들이 시위대와 맞서 싸워 시위를 진압하려는 의지가 박약하다는 점이었다. 6월 13일 회의에는 이한기 총리, 안무혁 안기부장, 고건 내무부 장관, 정해창 법무부 장관 등 박종철 고문 사망 은폐·조작이 폭로되면서 5월 26일에 새로 임명된 시국 관련자들이 참석했다. 그런데 이들은 전두환의 분신으로 통하던 장세동 전 안기부장 등과는 태도가 달랐다.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예전에는 장세동이 앞장서서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강경 조치를 밀어붙이는 식이었는데 이젠 그런 게 안 나온다, 이 말이다. 전두환이 이 회의에서 "저들은 사생결단의 태세로 나오는데 우리는 안 그런 것 같아요"라고 말할 정도였다. 전두환이 오죽 답답했으면 그런 얘기를 했겠나.

프레시안 : 입지 조건의 차이만이 아니라 명동성당 농성 투쟁과 건대 사태는 정치 상황 등 여러 면에서 다르지 않았나.

서중석 : 명동성당 농성 투쟁에는 건국대 사태와 전혀 다른 점이 있었다. 명동성당은 천주교를 대표하는 성당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성당 내부에 경찰을 투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6월 13일 아침에 열린 회의에서 전두환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얘기했다. "정부로서는 명동성당 사태에 인내를 보여주도록 합시다." 아무리 궁리해도 다른 뾰족한 수단이 없어서 전두환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날 회의에서 이한기 총리는 "경찰이 진입하면 (문제가) 심각하니 성당 측이 자진해서 학생들(의 농성)을 풀게 하는 것이 좋은 방책"이라고 지적하고, 현 사태가 위기라고 말했다. 전두환으로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다.

13일 회의가 끝난 후 전두환 정권은 사제들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강제 진압을 포기한 것이 분명했다. 천주교 쪽에서도 명동성당 농성 사태가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함세웅 신부가 천주교 측을 대표해 모처에서 '전권'을 가진 정부 고위 당국자와 만났다.

이날도 각지에서 시위가 계속 일어났다. 부산에서는 전날보다 시위 규모가 커졌다. 학생들은 부산역 앞 8차선을 점거하고 연좌 농성을 벌였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 대합실에 있던 사람 등 시민 1만여 명이 학생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마산에서도 시위가 있었고 대전에서도 충남대, 목원대, 한남대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 시민들이 명동성당 한쪽에서 농성 시위대를 위한 모금을 하는 모습.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비상 조치 운운한 전두환, 결론은 "안 잡을 테니 나가라고 해요"

프레시안 : 그러한 상황에서 전두환 정권은 1986년 하반기부터 만지작거린 비상 조치 카드를 다시 검토하지 않았나.

서중석 : 14일, 이날은 일요일이었는데, 오전 9시 30분부터 청와대에서 회의가 열렸다. 회의에는 안기부장, 외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 법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문교부 장관, 문공부 장관과 서울시장 외에도 합참의장, 육해공군 참모총장, 한미 연합사 부사령관, 보안사령관, 수경사령관 등 군 수뇌부가 자리를 같이했다. 권복경 치안본부장은 12일에 5만 7000명, 13일에 1만 3000명이 데모에 가담했다고 보고했다.

이 자리에서 전두환은 비상 조치 얘기를 꺼냈다. 경찰이 치안을 회복하지 못하면 비상 조치를 발동해 휴교, 정당 해산, 헌정 일부 중단과 같은 초헌법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군 지휘관들에게는 주요 대학에 투입할 수 있는 군 병력을 출동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전두환이 군 수뇌부를 불러 병력 출동 준비를 하라고 지시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우선 군 지휘관들에게 사태의 중요성을 각인시키고 민간인 장관들에게, 전두환 눈에 흐리멍덩해 보인 이 사람들에게 비상 시국이라는 각오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또 한편으로는 국민에게 엄포를 놓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정말 군을 출동시키겠다는 긴박감을 이날 회의에서 찾아보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전두환은 명동성당 농성 사태에 대해, 이날 회의의 결론이기도 한데, 이렇게 지시했다.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는 사람들)은 오늘 자정을 기해 전부 풀어주시오. 안 잡을 테니 나가라고 해요. 시경국장이 추기경을 만나자고 신청해서 오늘 저녁에 다 내보내라고 해요."

오후 1시 30분경 명동성당 김병도 주임 신부는 성명을 발표해 농성 중인 시민, 학생들에게 해산을 호소했다. 교회의 기능을 언제까지나 마비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날도 몇몇 지역에서 시위가 있었다. 부산 시내 각 대학 학생들은 대학별로 집회를 열고 교내 시위 후 거리에 나섰다. 부산에서 벌어진 해태 타이거즈와 롯데 자이언츠의 프로 야구 경기에서 응원 구호가 "파이팅"에서 "독재 타도"로 바뀌는 일도 있었다. 인천, 전주, 광주, 익산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3차 투표 끝에 해산 결정…시위대를 환호로 맞이한 시민들

프레시안 : 명동성당 농성 투쟁, 어떻게 마무리됐나.

서중석 : 15일은 6월항쟁에서 한 획을 그은 날이다. 상오 1시 명동성당 농성장에서 해산 문제를 놓고 토론이 시작됐다. 15일 해산이 천주교 측의 확고한 입장 같아 보였고, 국본이 18일에 최루탄 추방 대회를 연다는 소식도 들어와 있었다. 그런 속에서 상오 3시경부터 조별 토론을 하고 오전 6시경 전체 토론에 들어갔는데, 의견은 반반이었다.

투표 결과 해산 찬성 85, 반대 98, 기권 14로 농성을 지속하자는 주장이 우세했지만 과반수에는 못 미쳤다. 토론장 분위기를 듣고 함세웅 신부가 달려왔다. 함 신부는 "여러분은 교회의 한계와 교회의 자리를 존중해줘야 한다. 우리 발목을 잡으면 우리가 더 일을 할 수가 없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 의견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2차 투표를 실시했는데 여기서는 찬성 112, 반대 104로 해산이 우세했다. 그렇지만 2차 투표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와서 3차 투표를 실시했다. 3차 투표에는 그동안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던 명동성당 청년 단체 연합회가 합류했다. 3차 투표 결과는 찬성 119, 반대 94였다. 3차 투표 후에도 '지금 해산하면 안 된다. 결사 항쟁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나왔지만, "우리가 내린 결정을 우리 스스로 깨면 누구더러 민주주의 하자고 할 수 있겠느냐"는 의견이 나오면서 해산으로 최종 결론이 났다.

낮 12시 20분경 농성 시위대는 스크럼을 짜고 대형 태극기를 앞세운 채 문화관 앞을 나섰다. 1시를 전후해 명동성당 입구 쪽 로얄호텔부터 코스모스백화점에 이르기까지 2만여 명의 시민이 운집해 학생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고 애국가를 불렀다. 4시에 농성 시위대는 해산을 지켜보러 온 시민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차에 탔다.

이날 8시에 명동성당에서는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주최로 '나라의 민주화를 위한 특별 미사'가 거행됐다. 특별 미사 후 신부, 수녀, 신자 등 5000여 명은 한 손에 촛불을 들고 다른 손으로 V자를 그리며 비가 내리는데도 행진했다. 성당 밖에 있던 학생과 시민 1만여 명이 그 뒤를 따르면서 인원은 1만 5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아름답고 장엄한 행렬이었다.

▲ 문화관에서 나와 명동성당 입구 집회장으로 내려오는 농성 시위대에게 박수를 보내는 시민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명동 투쟁으로 6월항쟁이 있게 됐다

프레시안 : 명동성당 농성 투쟁이 6월항쟁에서 어떤 역할을 했다고 보나.

서중석 : 명동성당 농성 투쟁에 학생들의 지원 투쟁과 넥타이 부대의 투쟁을 더하면 그 전체를 명동 투쟁이라고 부를 수 있다. 6월 10일 밤부터 15일까지 계속된 명동성당 농성을 6월항쟁에서 징검다리 정도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명동 투쟁은 단순히 6월항쟁으로 가는 징검다리에 머무는 정도가 아니었다. 명동 투쟁으로 6월항쟁이 있게 됐다고 말할 수 있다. 명동 투쟁은 6월항쟁의 중심적 투쟁의 하나이며, 6월항쟁은 명동 투쟁을 통해 구체성을 지니게 됐다.

명동성당 시위대는 그야말로 격전을 치러야 했다. 이들의 부상 상태가 그걸 잘 보여준다. 중상 27명, 경상 224명, 수포 환자 130명, 파편 부상 5명, 찰과상 27명, 눈 부상 5명(그중 1명은 실명), 절상(折傷) 3명, 골절상 8명, 타박상·화상 등 73명으로 자료에 나온다.

명동성당 농성에 마지막까지 동참한 사람은 200여 명이었다. 여기에는 학생이나 일반 시민 외에도 막노동자, 노점상, 술집 웨이터, 구두닦이 등도 참여했다. 엘리트 학생들로서는 평상시에 접촉하기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학생들은 그러한 계층이 1960년 4월혁명, 1979년 부마항쟁, 1980년 광주항쟁에서 일역을 맡았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다. 그에 더해 식당에서 일하는 17세 정도의 소녀도 3명 있었는데, 돌을 주워 나르는 것이 이들의 주요 임무였다. 명동성당 농성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건 이들이 해산한 15일 그날 바로 드러났다.

도시가 상당 부분 마비될 정도로 격렬한 시위가 벌어진 대전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러했나.

서중석 : 명동성당 농성 시위대가 15일까지 버티면서 전국적으로 시위가 다시 격화됐다. 먼저 대전을 보자. 대전은 4월혁명 때, 그러니까 1960년 3월 8일 대전고에서 큰 시위가 일어난 지역이다. 3·15 마산의거 전에는 이게 제일 큰 시위였다. 그런데 4월혁명 이후에는 대전에서 큰 시위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4월혁명 때 있었던 시위를 빼놓으면 적잖은 사람들에게 '대전, 충청도는 온순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였다. 그러나 6월항쟁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대전에서 굉장한 시위가 벌어졌다. 온순하다는 세간의 이미지가 확 달라질 정도였다.

1987년 6월 10일부터 13일까지 대전에서는 계속 시위가 일어났다. 그것에 이어 명동 투쟁이 막을 내린 15일에 큰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날 도시가 상당 부분 마비되다시피 했다.

4시에 충남대 학생들은 정문과 후문 돌파를 시도했다. 이들은 정문을 돌파하고 유성으로 진출했는데, 이게 경찰의 허를 확 찔러버렸다. 경찰은 학생들이 그쪽으로 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쪽을 막고 있다가 허를 찔린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경찰 숫자가 제한돼 있기 때문에 생긴 일이기도 하다. 제한된 숫자로 대전 전체를 막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몇몇 지역을 주로 막다가 그렇게 됐다는 말이다.

5시경 학생 2000여 명이 유성파출소를 포위하고 정치 집회를 열었다. 유성극장과 전신전화국 앞에서도 학생들은 대중 집회를 열었다. 경찰이 나중에 이쪽으로 몰려오게 되는데, 학생들은 경찰과 격렬히 맞서며 유성 시가지를 점령하다시피 했다. 6시 10분경에는 페퍼포그 차량에 화염병을 던져 전소시켰다. 학생 7000여 명은 서부경찰서 앞에서 투석전을 벌여 경찰을 무력화했다. 학생들은 서대전 사거리로 진출하면서 페퍼포그 차량 1대를 또 완전히 불태웠다. 시민들까지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학생들은 더 기세가 올랐다.

이렇게 시위가 격렬해지자 충남대 총장이 중재자로 나섰다. 충남도경국장은 학생들이 대전역까지 평화 시위를 하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행진이 이뤄졌는데 시위대의 긴 행렬이 지나는 곳마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의 함성이 진동했다. 도심 한복판인 중앙로를 시위대가 가득 메웠는데, 대전역에 도착했을 때에는 1만 명을 넘어섰다. 대전이라는 도시가 생긴 이래 시위대가 중앙로를 점거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시위대, 전국 각지에서 기세 올리며 전두환 정권 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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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지역은 어떠했나.

서중석 : 단국대 천안 캠퍼스 학생들이 이 시기에 데모를 참 잘했다. 6월항쟁에서 지방대 및 서울 지역 대학의 지방 분교가 큰 역할을 했다고 전에 얘기했는데, 그중에서도 단국대 천안 캠퍼스가 아주 잘했다. 15일 이날 단국대 천안 캠퍼스 학생들은 고속도로 톨게이트 쪽으로 향하다가 전경차 1대를 포위해 전경들을 무장 해제했다. 다른 방향으로 향한 3000여 명의 학생들은 천안경찰서 앞 등 도심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렇지만 경찰은 이걸 저지할 힘이 없었다.

부산에서도 시위가 계속 일어났는데 15일 이날은 더욱더 격렬했다. 부산대 6000여 명 등 여러 대학 학생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시위대는 시민의 호응 속에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다가 200~300명이 마치 한 조처럼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식으로 싸웠다. 이건 부마항쟁 이후 계속 나타난 투쟁 방식이었다. 이날 경찰은 64발짜리 다연발 최루탄을 발사했다. 11시 10분경 학생들은 부산일보사 사옥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일부 박살냈는데, 이건 부산일보사가 정수장학회 쪽인 것과 관련 있는 사항으로 보인다.

마산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진주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는데, 15일 진주는 대전과 더불어 최대 격전지였다. 진주는 일제 때 농민 운동, 백정들의 형평 운동 등 사회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곳인데 6월항쟁에서 아주 큰 역할을 했다. 전두환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데 지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 부산, 대전, 진주였다. 이날 진주에서 학생들은 협공 작전으로 경찰을 학교에서 철수시킨 다음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2시경 시위대가 시청 앞에 집결했을 때 고교생, 일반 시민, 노동자, 농민까지 합세해 그 일대가 해방구가 된 듯했다.

광주, 익산, 대구, 경주, 안산에서도 15일에 시위가 일어났다. 6월항쟁 시기에 익산에서는 원광대 학생들이, 경주에서는 동국대 경주 캠퍼스 학생들이, 안산에서는 한양대 안산 캠퍼스 학생들이 맹활약했다. 이런 걸 보더라도 지방대 또는 각지의 분교 학생들이 6월항쟁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수원에서도 이날 데모가 있었다. 인천에서는 인하대 개교 이래 제일 많이 모였다는 8000여 명이 결의 대회를 열고 시민회관 앞 주안 사거리까지 진출했다. 이들은 한때 도로를 마비시키며 거리를 휩쓸었다.

경찰은 6월 15일에 서울, 부산 등 전국 59개 대학에서 학생 9만 200여 명이 시위를 전개하고 전국 총 140개소에서 10만 4000여 명이 시위에 가담해 1987년 들어 최고 기록을 달성했다고 발표했다. 국민 대회가 있던 6월 10일 시위 규모에 대해 경찰이 이상한 통계를 발표했다고 지난번에 얘기하지 않았나. 그때 6·10 시위 규모를 대폭 축소했던 경찰은 15일 이날 최대 규모의 시위가, 물론 15일 기록도 축소한 것이긴 하지만, 있었다고 발표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서른여덟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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