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맞춰 터진 전두환의 자살골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33> 6월항쟁, 열다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전두환의 치명적 자살골, 4·13 호헌 조치

프레시안 : 1987년 1월 박종철이 세상을 떠난 후 2·7 추도 대회와 3·3 평화 대행진이 있었다. 그 후 6월항쟁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볼 때 빠지지 않는 것이 4·13 호헌 조치와 5·18 박종철 고문 사망 은폐·조작 폭로다. 먼저 4·13 호헌 조치를 짚어봤으면 한다. 호헌 조치란 말 그대로 현행 헌법, 즉 12·12쿠데타(1979년)와 5·17쿠데타(1980년)를 일으켜 권력을 움켜쥔 전두환·신군부가 만든 헌법을 바꾸지 않겠다는 뜻이다. 직선제 개헌 요구를 거부한 이 조치는 당시 어떤 의미가 있었나.

서중석 : 급시우(及時雨)라는 말이 있다. <수호지>에 나오는 양산박 두령 송강의 별호인데, 때맞춰 내리는 비를 말한다. 3·3 평화 대행진이 있은 후 상당한 기간 동안 민주화 운동 세력은 투쟁할 방안을 뚜렷하게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박종철 고문 사망 및 2·7 추도 대회, 3·3 평화 대행진에 이어 6월항쟁으로 나아가는 큰길을 열어놓은 것이 바로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다. 4·13 호헌 조치는 그야말로 급시우, 때맞춰 내린 비였다고 볼 수 있다. 박종철 고문 사망이 전두환의 초강경 초토화 작전에서 비롯됐다면, 전두환은 이번에는 4·13 호헌 조치라는 자살골을 넣는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다.

난 이 4·13 호헌 조치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본다. 전두환은 퇴임 후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호헌 조치밖에 없다고 믿고 있었고, 장세동 안기부장은 거기에 보조를 맞췄다.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된 4·13 호헌 조치가 없었다면 문제가 상당히 복잡하게 전개될 수도 있었다.

프레시안 : 4·13 호헌 조치가 나올 무렵 정국은 어떠했나.

서중석 : 1987년 4월 13일 석간신문에 세 개의 주요 기사가 실렸다. 하나는 1986년 10월 국시 발언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유성환 의원이 반년 만에 유죄 선고를 받았다는 기사였다. 법원은 이날 유성환에게 징역 1년에 자격 정지 1년을 선고했다. 그 검찰에 그 법원이었다.

다른 하나는 통일민주당 창당 발기인 대회 기사였다. 본래 YWCA 대강당에서 열 예정이었는데, 출입문이 봉쇄된 탓에 어쩔 수 없이 장소를 바꿔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 사무실에서 대회를 열었다. 참가자들은 직선제 개헌과 비폭력 투쟁을 다짐하고 김영삼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전에 말한 것처럼 1986년 12월 24일 이민우 신민당 총재는 이민우 구상(7개 항의 민주화 조치가 이뤄지면 내각제 개헌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이라는 걸 발표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이민우 구상 철회를 강력히 요구했다. 이민우가 장기 집권을 전제로 추진되고 있는 민정당의 내각제 개헌 시도와 타협하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재야도 이민우 구상이 직선제 개헌 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혼란에 빠뜨리는 아주 고약한 장애물이라고 인식했다. 이민우 구상으로 신민당은 심한 내분에 휩싸였다.

그런 상황에서 4월 8일 양김은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신민당 의원의 대다수인 74명이 탈당해 신당에 참여하기로 했다. 4월 9일 74명 중 63명이 참여한 가운데 창당 주비위원회가 구성됐다. 그것에 이어 13일 발기인 대회가 열린 것이다.

남은 하나가 바로 4·13 호헌 조치였다. 신문들은 4·13 호헌 조치를 1면 톱기사로 실은 것에 더해 여러 면에 걸쳐 관련 기사를 게재하며 크게 다뤘다.

▲ 4·13 호헌 조치를 보도한 동아일보 1987년 4월 13일 자 1면. ⓒ동아일보


전두환은 왜 4·13 호헌 조치를 취했나

프레시안 : 전두환은 왜 이때 호헌 조치라는 카드를 꺼낸 것인가.

서중석 : 4월 13일, 전두환이 호헌 조치를 발표한 이날은 박종철이 고문 사망한 1월 14일, 박종철 고문 사망 은폐·조작 사실이 폭로된 5월 18일, 국민 대회가 열린 6월 10일 등과 함께 1987년 한국 민주화 여정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 됐다. 전두환은 이날 특별 담화를 통해 "이제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이라고 밝혔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전두환은 대통령에서 물러난 다음에 신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자기가 만든 헌법에 따라 다음 대통령이 나오는 길밖에 없다고 굳게 확신했다. 그게 4·13 호헌 조치의 기본 배경이다.

그런데 4·13 호헌 조치가 나온 요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주장이 있다. 언론이나 민주화 운동권에는 전두환이 2·7 추도 대회나 3·3 평화 대행진을 대규모 경찰 병력으로 봉쇄한 것에서 자신감을 얻어 이 조치를 취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새 학기가 시작됐는데도 대학가에서 별다른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 또 다른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김영삼, 김대중이 신당 창당을 선언한 것에 자극을 받아 전두환이 호헌 조치를 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지만 이 가운데 마지막 부분, 즉 양김의 신당 창당 선언은 전두환이 호헌 조치를 내리는 데 구실이 됐을 뿐이다.

전두환은 일찍부터 호헌 조치를 생각하고 있었다. <전두환 육성 증언>에 나오는 발언이라든가 여러 가지를 놓고 볼 때 그렇다. 4·13 호헌 조치를 구체적으로 결정한 시점에 대해서는 김성익의 <전두환 육성 증언>, 박철언 회고록 같은 데에 상세히 나온다.

2월 23일 전두환은 노태우, 장세동을 만나 개헌 논의를 유보하는 특별 선언을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호헌 조치를 하겠다는 걸 확실하게 밝힌 것이다. (이에 앞서 전두환은 현행 헌법에 대한 국민 투표 실시를 검토했다. 박철언은 1987년 2월 21일 노태우가 자신에게 '대통령으로부터 전격적, 기습적 국민 투표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고 회고록에 썼다.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국민 투표에 부쳐 (개헌) 연기가 확인되면 정통성이 확인되는 것"이라며 "통과가 안 되면 사임하겠다는 뜻을 포함시키는 것이 어떤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통과가 안 되면 사임" 부분은 1975년 박정희가 보인 모습을 떠오르게 만든다. 유신 반대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박정희는 '유신 헌법 찬반 국민 투표를 1975년 2월 12일에 실시하겠다'는 특별 담화를 기습적으로 발표했다. 그러면서 '만약 국민 투표에서 지면 퇴진하겠다'고 국민을 압박했다. '편집자') 3월 9일 전두환은 김성익 비서에게 개헌 논의 중지 선언에 대비한 담화문 초안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3월 28일 전두환은 그 초안을 1차 검토했는데, 이때까지는 호헌 조치를 언제 발표할지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4월 8일 양김이 신당 창당을 선언하지 않았나. 성질 급한 전두환은 즉각 비서들을 불렀다. 다음 주 월요일(4월 13일)에 호헌 조치를 발표하는 게 좋겠다고 비서들에게 얘기하고, 그것에 대한 담화문을 최종 재가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전두환의 호헌 조치에 대해 민정당 내부에서 전부 지지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 전두환(1985년). ⓒ국가기록원

전두환의 호헌 조치로 개헌 관련 정치력이 봉쇄된 민정당

프레시안 : 민정당 내부 사정은 어떠했나. 그리고 4·13 호헌 조치가 없었다면 문제가 상당히 복잡하게 전개될 수도 있었다고 앞에서 말했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러했나.

서중석 : '여야 합의 개헌을 위해 뭔가 더 노력을 해봐야 한다', 이춘구 사무총장을 비롯해 민정당 당직자들 중에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 호헌 조치는 정국을 풀어갈 다른 어떤 방안도 있을 수 없게 만드는, 그런 방안을 가로막는 벽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두려움도 갖고 있었다. 4·13 호헌 조치가 나오기 전에 이춘구는 호헌이 개헌과 본질적으로 배치되므로 호헌을 추진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 바 있었다.

당시 권력층 내부를 보면 전두환 및 장세동 등의 무단파는 여야 합의 개헌은 벌써 물 건너갔다고 보고 있었다. 따라서 퇴임 후 전두환의 안전을 확고히 보장할 수 있는 호헌 조치로 후계 구도를 굳혀야 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춘구 등은 생각이 달랐다. '그동안 민정당이 합의 개헌을 주장하지 않았느냐. 개헌은 어쩔 수 없는 대세다', 이렇게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계속 야당에 '여야가 합의해 개헌하자'고 하다가, 합의가 안 되면 6월이나 7월쯤 가서 '대선이 얼마 안 남았다. 그러니 이제 합법 개헌을 하자', 그건 내각제일 텐데 하여튼 국회에서 다수결로 정하자고 하고, 그러면서 민주화 운동 쪽에서 요구하는 사항 중 몇 가지, 예컨대 이민우 구상에 담긴 것들을 들어주는 시늉을 하면 문제를 자기들 뜻대로 풀어나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대중, 김영삼을 정치권에서 배제하려 한 무단파와 달리 이춘구 등은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이춘구는 노태우 대통령 만들기의 핵심 인물로, 1월에 박종철 고문 사망에 대한 인책 문제가 나왔을 때 전두환으로 하여금 김종호 내무부 장관을 경질하고 그 후임으로 정호용을 기용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이렇게 권력층 내부에서 판단이 엇갈리긴 했지만, 전두환이 4월 13일 호헌 조치를 발표함으로써 민정당은 무조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6월항쟁 같은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도 민정당은 수습을 위한 대안이랄까 방책을 제시할 수 없었다. 전두환이 호헌 조치로 딱 막아버렸기 때문에 민정당에서 다른 얘기를 할 수가 없게 됐다, 이 말이다. 파시스트 국가에서 소위 지도자, 영도자라는 자가 한번 결정해버리면 추종자들은 그걸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과 똑같았다.

여야 합의 개헌 종용한 미국, 호헌 조치 밀어붙인 전두환

프레시안 : 1986년 필리핀에서 마르코스 독재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본 미국은 한국인들의 민주화 열망을 더욱 경계했다. 그렇다고 해서 전두환 정권의 초강경 정책을 마냥 지지하기도 어려운 처지였다. 미국으로서는 그러다가 전두환 정권이 무너지면 자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반공 체제에 균열이 생길 수도 있다는 점을 계산에 넣어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4·13 호헌 조치에 어떤 반응을 보였나.

서중석 : 전두환이 4·13 호헌 조치를 내린 데에는 미국에 대한 오판도 한몫했다. 한국에서 개헌 문제가 첨예하게 등장하자 미국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런 속에서 1986년 5월 7~8일 조지 슐츠 국무부 장관이 방한해 "직선제만이 민주주의의 요소라고 보지 않는다"고 명확히 얘기했다. 이때 슐츠 일행이 폭발물을 탐지하는 개를 데려와서 또 참 말이 많았다. 사진까지 나고 그랬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을 미워하는 사람이 많을 때였는데, 정부 종합 청사에 폭발물 탐지견을 데려가서 비웃음을 사고 비난도 많이 받았다. (미국 측은 송아지만 한 셰퍼드 한 마리를 한미 외상 회담이 열린 정부 종합 청사의 귀빈용 승강기에 태운 다음 장관실까지 끌고 가 화약 냄새를 맡게 했다. 그러고 나서 이 군견을 청사 현관에 앉혀놓았다. 장관실까지 개를 데리고 들어간 것은 한국 쪽에 사전 통보 없이 이뤄진 조치였다. '편집자') 하여튼 그것에 이어 미국은 그해 12월 24일 이민우 구상이 나왔을 때 호의를 표했다.

1987년에 들어와 미국은 여야의 '마주 보고 달리는 두 기관차'를 조정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2월에 개스틴 시거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여야 간의 합의 개헌을 촉구했다. 그건 내각제를 하라는 것과 똑같은 얘기였다.

대단히 민감한 시기였던 3월 6일 슐츠 국무부 장관이 다시 한국에 왔다. 이때 전두환 정권이건 야당이건 또 언론이건 지식인이건 학생들이건 모두 신경을 곤두세웠다. 당시 활동한 사람들은 다들 이게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봤다. 그런데 한국에 온 슐츠는 여야가 타협할 것을 권했다. 이건 야당의 굴복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때 동아일보에 양김이 몹시 실망했다는 보도도 나오고 그랬다. 양김의 직선제 개헌 주장에 미국이 거리를 둔 것인데, 이러한 미국의 입장은 전두환으로 하여금 '신당 창당에 맞춰 호헌 조치를 할 경우 미국이 강력히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갖게끔 했다.

그렇지만 사실 미국의 입장은 호헌 조치를 밀어붙인 전두환보다는 이춘구나 이민우 생각에 더 가까웠다. 미국은 실질적으로 여권의 내각제 개헌안이나 이민우 구상에 호의적이었고, 여야 합의 개헌을 종용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전두환이 성급하게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해버린 것이다. 이건 미국으로서는 불만스러운 조치였다. 4·13 호헌 조치 직후 미국 국무부는 "다음의 한국 정부는 개방적이어야 하며 광범위한 국민들의 지지 기반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논평하는 등 개헌 논의 중단에 유감을 표명했다.

개헌 열기를 되살린 4·13 호헌 조치의 역설

ⓒ오월의봄
프레시안 :
4·13 호헌 조치는 민주화 여정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서중석 : 역사는 신묘하게 전개될 때가 있다. 4·13 호헌 조치는 3·3 평화 대행진 이후 뚜렷한 이슈가 없어 고민하던 민주화 운동 세력을 일거에 크게 자극했다. 또 각성하고 있었던 시민 세력에 큰 자극을 줬다. 그런 점에서도 대단히 중요했다.

그뿐 아니라 1986년 5·3사태 이후 잠복해 있던 민중들의 개헌 열망을 일깨워놓았다. 2·7 추도 대회나 3·3 평화 대행진은 민주화 운동이라고는 볼 수 있어도 개헌 운동이라고는 볼 수 없지 않나. 그런데 4·13 호헌 조치는 '이제 개헌으로 가자', 이런 분위기를 1년 만에 확 키워놓았다. 개헌 열기가 되살아나게 만든 것이다. 4·13 호헌 조치는 개헌 투쟁의 초점을 명확히 했을 뿐만 아니라 1986년 봄에 불었던 개헌 열풍처럼 국민을 결집시키는 큰 역할을 했다.

전두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전두환의 성급한 4·13 호헌 조치는 각계각층의 호헌 철폐 투쟁, 군부 독재 타도 투쟁, 직선제 쟁취 투쟁을 촉발했다. 바로 그것이 6월항쟁으로 나아가는 큰길을 열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서른네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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