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의 양보로 복지국가 건설? 심각한 착각!

[한국 경제 성격 논쟁] 그들의 논쟁이 탁상공론 되지 않으려면

최근 국내 최고의 진보적 경제학자들 간에 벌어지고 있는 소위 경제논쟁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더 깊고 풍부한 논의, 그리고 무엇보다 대안에 대한 논의까지 기대했지만, 논쟁이 잠시 소강상태에 있는 것으로 판단, 독자의 입장에서 감히 몇 마디 얹어 보고자 한다. 필자는 경제학자가 아니기에 매우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경제적 논쟁을 할 능력은 없다. 그러나 관전자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간단한 코멘트 수준의 언급을 하고자 한다.

전반적으로 볼 때, 금융세계화 등 외적 요소를 간과해 온 한국의 학문과 운동 진영의 답답한 풍토 속에서 장하준, 정승일, 이종태 선생님(이하 존칭 생략, 그리고 '장하준 그룹'으로 칭함)의 주장은 금융세계화에 대해 매우 중요한 지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논쟁의 한 당사자인 소위 경제민주화론자들을 비롯한 한국의 진보적 사회과학자들이 받아들여야 할 부분들이 상당히 많다. 오랜 유학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 느낀 사실은 신자유주의나 (금융) 세계화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많은 서적이 쏟아지고 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울 정도로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중심부가 아닌 지역에서 신자유주의가 작동하는 다양한 모습들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간과해왔던 외적인 요인들이 구체적으로 일국 단위에서 파괴적으로 작동하는 현실에 대한 장하준 그룹의 강조는 너무나 소중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논쟁의 구도와 내용은 8년 전의 그것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한 가지 눈에 띄는 차이라고 한다면, 장하준이 당시에는 소액주주운동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고 주장한 반면, 이번에는 소액주주운동이 마치 국제금융자본들의 앞잡이 역할을 한 것처럼 강조한 것과 같은 몇 가지 주장의 대변화 정도(?)이다. 어찌 되었든, 전반적으로 볼 때, 서로 논점을 모아가며 해결을 모색하기보다는 각자의 지식과 상식에 따라 각자의 주장만을 나열할 뿐이며,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주요 내용이라는 것도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 오독과 왜곡이라는 주장과 그것에 대한 논박이 이어지면서 다소 비생산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재 논쟁은 소위 '경제민주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재벌 개혁론에 대해 장하준 그룹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데 반해, 장하준 그룹이 지적하는 주주자본주의의 위험성에 대해서 경제민주화론자들이 반박하는 구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점에 대해 과거에 깨닫지 못 했던 점을 반성(?)하는 등 장하준 그룹의 지적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괴이한 구도로 전개되고 있다. 게다가 장하준 그룹이 경제민주화론자들에 대해 신자유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따라서 지속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소액주주운동'에 대해서 경제민주화론자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기는커녕 그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논쟁은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 비판과 반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재벌 체제에 대한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특징을 보인다.

그러나 재벌이 복지국가 건설의 주요 행위자로 거론되고, 경제민주화가 재벌 개혁으로 축소된 채 서로 논박하고 있는 현재의 논쟁은 사회적 경제 혹은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진정한 경제민주화로 생각하며, 노동(정당, 조합)과 시민사회가 복지 국가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필자로서는 그 개념부터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경제민주화가 재벌 체제 개혁으로 축소되었으며, 도대체 언제부터 재벌이 복지국가 건설의 주요 행위자가 되었는가?

어찌 되었든, 논의를 재벌 체제로 국한하더라도 현재 지배블록의 반동에 의해서 엄청나게 후퇴한 정치적,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복원 및 전진을 위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어떤 명칭을 붙이든,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논쟁 역시 일정 정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바람직한 논의 구도는 양자 모두 주주자본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동의했고, 재벌체제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이 있으니 합심해서 국제금융자본에 대한 방어 장치를 고민하면서 동시에 재벌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이 옳지만, 현재까지는 그러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지 않고 있다. 필자는 전체적으로 몇 가지 부분에서 문제의 본질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과두지배세력: 재벌과 국제금융자본의 공존, 정치 엘리트와 관료집단의 동맹

오는 12월 선거 이후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지 간에, 군부 독재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정기적인 선거를 치러 왔고, 실패한 정당은 국민의 심판을 받아 정권이 평화적으로 교체되는 등 마치 정당 정치가 안정화된 궤도에 접어들어 민주주의가 적어도 절차적으로는 공고화되는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여당의 국정 실패에 대한 국민의 높은 불만에도 불구하고, 일본 자민당처럼 여당 내 야당과 같은 착시현상을 국민들이 갖게 하는 데 성공한 당내 분파를 지지하는 유권자의 비율도 상당하다. 따라서 현재 많은 진보적인 국민들은 이러한 사태가 매우 불안하다. 그런데, 설사 야당이 이런저런 선거에서 승리하고 집권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새누리당이 집권한 것과 커다란 차이를 느끼지 못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어느 당이든 다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내걸어서 차이가 없다는 말은 마치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곧바로 사회주의를 외치지 않으면 모두 개량주의 정당이라는 말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매우 몰역사적이고, 비과학적인 말이다. 하여, 어느 당이 집권을 하든지 간에 커다란 변화를 느낄 수 없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필자의 말은 정당 간 정책의 차이가 없다거나 야당이 집권하는 의미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차이를 못 느끼게 하는 것은 우리 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과두지배세력의 존재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들 대다수는 집권 정당 교체와 무관하게 이어지고 있는 이러한 우리 사회의 진정한 지배 블록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 한국뿐 아니라, 상당수의 비중심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한층 더 정권 교체를 무색케 하고, 정당 정치를 마비시키는 거대한 과두지배세력들이 국가를 포획,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국민들뿐 아니라, 이러한 현상에 대해 무지한 관념좌파들은 서로 신자유주의자로 뒤집어씌우고, 대안 없는 급진화를 요구한다.

이렇듯, 세계자본주의 체제 비중심부의 과두지배세력에 대한 이해가 없다 보니, 이제 '민주 대 반민주'가 아니라 유럽과 같은 '진보 대 보수'로 정치 구도가 빠르게 정비될 것으로 착각했다. 자유주의가 여전히 진보적 의미를 띠고 있는 비중심부 국가들에서 진보의 의미도 매우 혼란스럽지만, 비중심부 국가들에서 보수는 제도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고 있는 서구의 보수와 질적으로 전혀 다른 집단임을 이해하지 못 하고 있다. 이렇듯 정당 정치가 잘 작동하기만 하면 정책이 잘 작동할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면서 자신들의 지배를 철저하게 위장하고 있는 재벌, 관료, 언론, 사회 기득권층들, 그리고 국제금융자본이 동맹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과두지배세력에 대한 이해는 거의 전무하다.


 
과거 권위주의 체제에 의해 조직되고 성장해 온 한국의 특권 집단들은 정치적 민주화 이후에도 사회경제적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단순히 지속성을 유지해 왔을 뿐 아니라, 국가의 통제를 받는 지배 일분파로부터 떨어져 나와, 거꾸로 국가를 포위, 자신의 이익 추구의 도구로 삼는 적극적 지배자로 성장했다. 지구상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와 유사한 지배동맹은 존재하지만, 상대적으로 많은 제약이 제도적으로 가해져 온 서구 중심부 국가에서는 노골적인 지배가 크지 않은 반면, 그러한 제약이 미약한 비중심부 후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글로벌 금융자본과 국가 금융엘리트, 대자본, 정치엘리트, 관료, 언론, 전문가 집단 등이 다양한 네트워크를 이뤄가며 노골적으로 과두지배를 이어오고 있다.

한국에서도 민주화 이후 국가의 공적 기능은 현저하게 약화되면서, 다양한 특권집단들의 이익을 보장해 주는 도구로 전락했다. 이들은 소위 민주정부로 일컬어지는 정권 교체 메커니즘과는 상관없이 혹은 별도로 독자적인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구조를 공고화해 왔다. 민주화에 이은 세계화라는 이름 하의 개방화 속에서 재벌들은 국가 권력이 권위주의 시대처럼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을 보호해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에 대비할 수 있는 장치들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갖추어 나갔다. 국내적으로도 지배 동맹의 범위는 언론과 각종 정치 엘리트, 관료들, 전문가들, 그리고 이들과 여러 인맥으로 얽혀 있는 각종 사회 기득권 집단으로까지 확장되어 국가는 철저하게 이들에 의해 포획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외환위기 이후 국제금융자본이라는 위력적인 세력의 침투는 재벌들과의 잠시 동안의 긴장 관계 이후 곧바로 공생 관계로 전환했다는 사실이다. 역사가 증명하듯, 자본은 자신을 스스로 파괴할 정도로 경쟁하지 않고 언제나 공생의 길을 찾는다. 현재 국내자본 역시 국제금융자본과 동화되거나 공동행보를 하기 때문에 양자의 구별은 의미가 없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국제금융자본은 한국 사회 과두지배 동맹의 주축으로 급속히 성장했다는 점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국제금융자본의 이해관계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것이 재벌들의 이해관계와 일치되거나 융합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본시장 개방으로 국제금융자본이 침투하게 되면서 한국의 재벌들을 포함한 많은 기업들 역시 주주가치 경영을 중요시하게 되었고, 주주를 내국인과 외국인으로 구별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아졌다.

게다가 국제금융자본뿐 아니라 재벌들 역시 자신의 기업 주가를 높이기 위해서 주주들에게 더 많은 배당을 지급하는 것이 주요 목표가 되었다. 즉 주주자본주의의 수혜자는 해외 자본만이 아닌 것이다. 주요 재벌 대기업들의 주식분배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외환위기 이후 급속히 증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주주가치 경영의 강화로 이익을 본 것은 외국인 투자자만이 아니라 재벌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으며, 재벌 스스로 자본소유자로서 막대한 자본 축적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국제금융자본의 유입은 기업의 경영권 방어를 둘러싸고 재벌과의 관계에 있어서 갈등관계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이해관계가 서로 밀접하게 얽히면서 유착구조가 형성되는 모습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재벌 기업의 경영권에 관심을 갖고 있는 국제금융자본들도 분명 존재하지만, 경영권 교체로 재벌 회사의 안정성이 떨어져 자신들의 이익 창출 구조가 위험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적어도 한국과 같이 강력한 대자본이 정치력까지 장악한 국가들의 경우 총수 일가의 지배를 더 선호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동맹 구조 속에서 재벌들은 국제금융자본의 위협을 과장하며 정부에 더 많은 특혜를 요구했고, 정부는 재벌들에게 더 많이 규제를 풀어 주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국의 특권 과두 지배 동맹 체제는 개발독재식 발전주의 시스템과 신자유주의적 요소들이 혼재되어 있으며, 재벌과 국제금융자본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 독특한 지배 체제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 하고 논자들은 엉뚱한 대립각만 찾게 되는 것이다.

세계체제 속의 신자유주의의 다양성

바로 이러한 착각과 무지는 신자유주의, 그리고 그와 관련된 국가와 시장의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재현되고 있다.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를 구별해서 가치를 별도로 부여할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순진한 관념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이야기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한 형태인 신자유주의를 현재의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돌리다 보면, 그 어느 누구도 즉각적인 시장 폐지를 주장하지 않는 한, 신자유주의자라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며, 따라서 늘 상대를 신자유주의자로 몰아 버리는 아무런 의미 없는 논쟁으로 결말이 나고 만다.

무엇보다 신자유주의는 마치 시장근본주의이며, 국가(개입)에 대해서 적대적인 이념으로 착각하는 분위기는 하루라도 빨리 타파되어야 한다. 2008년 금융 위기 당시 미국과 영국 정부 등이 자국의 은행을 국유화한 조치를 들어 '국가가 개입했다'며 신자유주의의 종언을 선언한 황당한 논자들이 기억난다. 신자유주의는 시장만능주의도 아니며, 국가의 시장 개입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국가가 특정 과두 지배 세력의 이익을 위해 시장에 개입하는 매우 정치적인 기획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즉 신자유주의는 정의부터 바꿔야 한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지역과 국가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너무도 쉽게 간과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당연히 주주자본주의, 혹은 금융자본이 경제를 지배하는 현상인 금융자본주의라고 보는 장하준 그룹의 주장 자체는 사전적 의미에서 올바르다. 그러나 본질이 그러하다고 전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모든 지역과 국가, 영역 등에서 똑같은 질의 위협이 가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즉 소위 '신자유주의의 다양성'이란 단순 나열적, 병렬적인 다양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양한 신자유주의 체제란 역사적으로 구조화된 세계자본주의체제 내 지역과 국가에 따른 다양성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얼마든지 발전주의 국가와 결합할 수도 있으며, 토건 개발주의와도 결합할 수 있다. 주주자본주의와 금융자본주의는 얼마든지 재벌과 같은 독점 대자본 체제와도 결합될 수 있다. 그들은 경쟁하고 잡아먹고 먹히는 관계이면서도 얼마든지 서로 공생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그리고 국내 재벌인 것처럼 보이는 삼성이나 LG 등은 실제로 여타 반주변부나 주변부 국가에서는 초국적 자본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실제로 그러한 역할과 기능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을 무시한 채, 초국적 엘리트들이 지역 엘리트들과 늘 경쟁관계에 있으며, 전자가 언제나 후자에 우위에 서 있다는 착각은 많은 이들의 논지 전개를 방해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오히려 외적 요소들에 대한 탁월한 감각의 소유자들이 국내적 맥락과 닿는 지점에 대해 무지한 것은 의외이다. 가령, 장하준 그룹은 한국의 점령하라(Occupy) 운동이 국제금융집단으로 향하지 않고 재벌에게로 향한 것을 이해하지 못 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 운동 진영이 국제 금융집단들의 폐해를 몰라서가 아니라, 현재 한국에서 가장 큰 폐해는 바로 재벌들이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 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소위 '장하준 그룹'의 주장에 대한 비판

장하준 그룹이 제기한 문제들 중에서 본격적인 코멘트를 하기 전에 꼭 짚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즉 장하준 그룹은 상대를 아예 신자유주의자로 규정하는 무례는 기본이고, 상대가 하지도 않은 말들, 의도하지도 않은 주장들을 끄집어내고 확대 해석하면서 지엽적인 논쟁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부분이다. 특히 그들이 한꺼번에 묶어 버린 소위 경제민주화 진영은 단일하게 주장을 하는 집단도 아닐 뿐 아니라, 그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하다. 따라서 그 내부에서 비판도 많고, 스스로 반성하기도 하는 '소액주주운동'을 주로 예로 들어 그것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시도 때도 없이 이들을 통째로 비판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먼저, 필자가 보기에 장하준 그룹이 경제민주화론자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상당 부분은 과장되거나 왜곡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가령, 소위 경제민주화론자들이 재벌개혁만을 외치고 있는 것처럼 왜곡하는 부분이 대표적이다. 장하준 그룹이 평면적으로 나열한 부분, 즉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권익을 향상시키고, 나아가 노동자공동경영제와 같은 산업민주주의를 이루는 것, 협동조합 경제를 지원하여 국가와 시장이 아닌 사회적 경제를 확장시키는 것, 중앙은행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는 것 등등, 그 모든 단위 속에서 민중의 직접적 참여를 보장하는 경제를 창출하는 것이야말로 경제민주화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정한 경제민주화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세력은 누구인가? 적어도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에서 국제금융자본보다는 그 국제금융자본을 포함한 그 국가의 과두지배세력 중 주요 동맹 세력인 대자본이 그러한 세력의 핵심이다. 따라서 이러한 요소를 무시하면서 경제민주화론자들이 '재벌 개혁과 경제민주화를 거의 동의어로 쓸 정도로 재벌 해체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경제민주화로 나아가는 데에 우선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재벌 개혁이기 때문에 재벌 해체를 우선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따라서 재벌 개혁들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다른 정책들은 실현 불가능은 아닐지라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경제민주화론자들은 경제민주화를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이러한 진정한 경제민주화를 강조하고 있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장하준 그룹의 주장처럼 재벌 개혁 운동과 복지 국가 운동은 병렬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에 대해 경제민주화론자들이 반대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정반대로 복지 국가는 재벌의 양보가 아니라, 재벌 체제의 개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판단으로 재벌 체제 개혁을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하자면, 언제부터 재벌이 복지 국가로 가는 길에 있어서 주요 행위자가 되었고, 재벌의 양보가 주요 과제가 되었는지 매우 당황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복지 국가로 가기 위해서는 강력한 좌파 정당과 노조가 있어야 자본과의 협상이 가능하고 양보를 얻어낼 수 있다는 식의 고전적인 어구들만 끄집어 내 나열만 하며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적 소유와 시장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이 없는 현재, 최소한 복지 국가로 나아가려면 자본과의 타협과 고소득층의 양보는 필수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 세계 언제 어디서나 이러한 일이 쉽게 일어날 수 있다고 일반화하는 것만큼 우둔한 짓도 없다. 특히 한국에서 재벌의 양보로 복지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착각은 주주자본주의의 폐해를 모른 채 소액주주운동을 추진한 일부 경제민주화 세력의 착각만큼 심각한 것이다.

국가에 대한 부분도 오류가 엿보인다. 장하준 그룹의 주장과 달리, 경제민주화론자들이 '국가'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국가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시장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다. 경제민주화론자들이 국가의 시장 개입을 거부한다는 주장은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즉, 관치 금융이나 정경유착을 비판하는 것을 두고 엉뚱하게도 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을 비판하는 것으로 왜곡하거나, 더 나아가 국가를 축소하고 시장을 옹호하는 것으로 매도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간과한 주장에 불과하다. 나치와 군사독재 국가의 시장 개입의 룰과 내용, 서구 복지 국가의 시장 개입의 룰과 내용을 국가 개입이라는 같은 틀 속에 놓고 비판할 수 있는가? 따라서 경제민주화론자들이 박정희식 국가 개입과 자본 통제(그리고 재벌 체제 형성)를 '비시장적' 자본주의라고 칭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여전히 모종의 비시장적 사회가 가능하다는 꿈을 꿨던 시대였다면 모를까, 자본주의를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는 대안적 모델이 부재한 현재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그들의 주장이 '자유주의적 경제 민주화가 제대로 되어야만 그 위에서 본격적인 복지 국가가 된다'는 것이라는 장하준 그룹의 주장은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그리고 장하준 그룹이 주주자본주의의 위협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부분도 상당히 당혹스럽다. 한국에서는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그리고 현재에도 친노동, 친중소기업적인 정책과 복지 정책 발전이 그 어떤 국가보다 훼방을 받고 있는 상태인데, 이러한 현상은 대기업집단을 약화 혹은 해체시켰기 때문에, 국제금융자본을 중심으로 한 주주자본주의의 영향력이 증폭된 결과인가? 당연히 최소한 현재까지는 '아니올시다'이다.

정반대로, 그들이 이야기하는 '고용 없는 성장, 비정규직 양산, 인건비와 하청단가의 삭감, 청장년층 실업과 빈곤층의 만연'과 같은 현상은 재벌 체제 하에서 양산된 것이다. 그리고 그 재벌은 주주자본주의의 희생물이 아니라, 그 주주자본주의의 한 축으로서 이러한 현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물론 이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영향 속에서 전적으로 주주자본주의 이전 식의 재벌 체제가 주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사회경제적 현상들은 재벌 체제가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적극적으로 내재화하여 이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즉 현재 벌어지고 있는 한국 사회의 심각한 위기는 국제금융자본과 재벌 양자가 모두 강제할 수 있는 것이다.

국적 자본은 일국 내 타협 기제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의 예처럼, 고용과 복지를 내팽개치지 못 할 것이며, 따라서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복지 국가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대자본의 양보와 타협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이 장하준 그룹의 주장의 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현재,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 상당한 기간 동안 한국의 재벌을 개인과 제도로 쉽게 구별 지을 수 있을 만큼 그들이 스스로 구별을 자처할지에 대해서는 매우 비관적이다.

또한 복지 국가와 관련해서도 심각한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장하준 그룹이 주장하는 복지 국가의 강화 자체가 재벌 개혁이기도 하다는 점은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 언명이다. 누진 소득세 강화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은 고소득 계층이겠지만, 그리고 조금은 재벌에게도 타격이겠지만, 그것이 곧바로 재벌 체제가 이끌어 온 전체적인 과두지배세력의 지배 구조에는 타격을 주지 않을 것이다. 보편적 의료 복지나 노인 복지가 재벌계 보험 회사들이 주도하는 보험업계의 이익을 침해한다고 재벌이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 역시 매우 순진한 생각이다. 장하준 그룹이 주장하는 '복지 국가 수준으로 고소득층에 대한 강력한 누진 소득세' 제도가 쉽게 도입될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강력한 저항을 받는다면 그 저항의 주도 세력은 누구일까? 그것은 바로 재벌을 필두로 한 과두지배세력일 것이다.

따라서 누진 소득세 등의 도입을 위한 싸움과 출자총액제한과 순환출자 금지와 같은 특정 형태의 재벌 개혁은 당연히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재벌 개혁과 다른 경제민주화 과제들이 같이 추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막상 본인들은 보편적 복지 국가를 향한 운동(?)을 먼저 한 후에 재벌 개혁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슨 이치인가? 결론적으로 말해서, 경제적으로 큰 역할을 하는 정부와 대기업 집단이 경제적 민주주의의 달성을 위해 긴요하며, 그래야만 참된 경제민주화가 달성될 수 있다는 장하준 그룹의 주장은 비중심부 국가들에서는 실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며, 매우 위험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선진국 문턱까지 도달한 한국 경제의 발전 수준과 국민의 성숙도로 볼 때,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정치적, 사회경제적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다. 따라서 현재 경제 발전 수준과 국민의 성숙도로 볼 때 곧바로 스웨덴식 복지 국가로 나아갈 수 있다는 장하준 그룹의 주장 자체도 황당하지만, 그 '민주성'에 대한 치밀한 문제의식 없이 국가와 대기업 집단의 존재가 복지 국가의 토대라고 주장하는 정승일 등의 주장은 (재벌 문제에서) 개인과 제도를 구별하자는 주장만큼이나 매우 비현실적인 주장이다.

개인적으로 기대가 컸던 대안으로 제시된 부분도 허술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가령, 주주자본주의의 규제 대안으로 제시된 창업자나 경영자들에게 1주 10표를 주자는 주장이나 황금주 제도의 도입 등은 일국 내에서 부분적으로는 가능할 수 있어도 결단코 지속적이고 보편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 '한 국가에서 주주자본주의를 규제할 수 있는 수단은 없으며, 세계적인 금융규제 강화 조치가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정태인 원장의 주장의 이면에는 동시적인 국제적 규제가 없다면 건전한 투자자까지 포함한 그 거대한 자금이 특정 국가로부터 물밀듯이 빠져나가 국민 경제가 붕괴할 수도 있고, 반대로 그러한 규제가 없는 국가로 몰려갈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토빈세를 한국만 도입할 경우 경제적으로 어떤 결과를 야기할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장하준 그룹의 이러한 일부 대안과 같은 규제는 일시적으로 가능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이상과 그 이후를 전혀 바라보지 못 하는 매우 허술한 주장이다.

양 진영이 단점 보완해 공동의 대비책 마련했으면

결론적으로 이야기해서, 의도했든 아니든 장하준 그룹은 사실상 재벌 체제의 온존을 강변하고 있다. 더욱이 역사적으로 구조화된 한국 재벌 체제 유지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그를 바탕으로 복지국가를 건설하자는 주장으로 논지를 확장시키는 것은 더더욱 받아들이기 어렵다.

거시 경제적 지표상으로는 10위권에 육박하고 있고, 국제정치적으로도 영향력이 비약적으로 증대되어 이미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중심부 국가군에 진입해 있나 하는 착각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여전히 한국은 비중심부 국가들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정치, 경제적 발전 궤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그 핵심에 정권의 교체와 무관하게 돌아가는 과두지배세력의 지배가 있으며, 그러한 지배세력들 중 재벌과 국제금융자본은 대립하여 공멸하는 길보다는 동맹관계를 맺으며 공생하고 있다. 제도로서 재벌 역시 자본주의 체제의 중심부가 아닌 지역에서는 특히 더 그 자체가 신자유주의의 주요 행위자이다.

계속 이어지고 있는 전 세계적 경제 위기 속 국제금융자본의 위기 탈출 전략의 변화와 대선으로 인한 과두지배세력의 재편과 지배 양식의 변화가 예상되는 현재, 장하준 그룹이 강조하고 있는 국제금융자본/주주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고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차원이 아니라, 국제금융자본의 공격을 방어해 줄 구원자로 이미 국제금융자본과 동맹하고 주주자본주의의 일원이 된 재벌을 옹호하는 것을 넘어 복지 국가 건설의 주역으로 승격시키는 것은 급진적이기만 한 관념론에 불과하다. 경제민주화론자들의 주장은 '진보의 가면을 쓴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이 아니라, 국제금융/재벌 자본의 지배 동맹을 깰 수 있는 이론과 정책들을 합심하여 창출해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진보적 경제학자들의 소중한 주장들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따라서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지만, 필자의 바람은 양 진영이 대립할 것이 아니라, 각자의 전문 분야를 잘 살려 서로 단점을 보완하고 공동의 대비책을 마련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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