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적 논쟁을 위해 불식해야 할 '2가지 전제 조건'
편의상 현재의 논쟁을 '한국경제 성격 논쟁'이라고 이름 붙이기로 하자. 그런데 이 논쟁이 생산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문제가 우선적으로 전제될 필요가 있다.
첫째, '딱지치기'의 자제 필요성이다. 공자는 올바른 인식을 위해 '이름을 바로 짓는' 정명(正名)의 필요성을 특히 강조한 바 있다. 현재 장하준 등은 재벌개혁론자들을 '좌파 신자유주의자'라고 이름 붙였다. 반면, 김상조-이병천 등은 장하준 교수 등에 대해서 '재벌옹호론자'라고 이름 붙였다.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겠지만, '딱지치기'라는 표현은 2010년 하반기에 있었던 소위 '진보 논쟁'에서 진중권이 썼던 표현이다. 그런데 이들 장하준 등과 김상조-이병천 등에 따르면, 현재의 논쟁은 "좌파 신자유주의 대 재벌옹호론자"의 논쟁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약간의 균형 감각을 갖고 있는 진보-개혁 지지자라면 신자유주의도 나쁘고, 재벌옹호도 나쁜 것이다.
뭐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들의 딱지치기에 의하면, 나쁜 놈들 둘이서 서로 자기 잘 났다고 싸우는 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학문적 견해 차이가 있다고 할지언정, 김상조-이병천 등에 대해 마치 '이념적 소신'을 갖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라고 표현하는 것은 과한 표현일 수 있다.
논쟁에서 감정의 개입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감정의 개입은 논리적 논쟁을 보다 흥미롭게 하는 감초 같은 역할을 하는 측면도 있다. 또한 논쟁과 토론에서 상대 논적(論敵)에 대한 '규정짓기' 역시도 일정 정도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사람은 '감정'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기분 나쁜 표현'을 듣게 되면 어느 순간 논리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상대방을 비방하고, 이기려는 승부욕이 모든 것으로 전락할 가능성도 갖게 된다. 그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그렇다면, '규정짓기'의 필요성을 일정하게 인정하면서도, 논리적 대립각을 선명하게 구획하는 새로운 이름 짓기를 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재벌개혁론 대 주주자본주의 타파론"이란 용어를 제안해본다. 김상조 등은 재벌개혁이 주된 목표이며, 장하준 등은 주주자본주의 개혁이 주된 목표이기 때문에 상대방을 존중하는 '긍정의 언어'를 사용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재벌옹호론'이라는 부당한 딱지치기 - '계열사 체제'의 옹호 여부가 핵심 논점
▲ ⓒ프레시안 |
엄밀히 말해서 장하준 등이 중소기업, 노동자, 소비자의 부(富)를 수탈해가는 '현재의' 재벌체제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심지어 장하준 등은 재벌의 계열사 체제를 해체하는 것보다 '국유화'를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할 정도이다. 재벌 국유화를 재벌옹호론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억지'이지 않겠는가?
그렇게 볼 때, 장하준 등은 재벌옹호론도 아니고 재벌총수 옹호론도 아니다. 오히려 '계열사-그룹 체제 옹호론'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면, 장하준 등을 비판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재벌옹호론'이라고 상대방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개념적으로도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좋은 토론'을 위한 전제조건인 '좋은 논점' 만들기에 실패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또한 장하준 등의 '계열사-그룹 체제 옹호론'을 제대로, 생산적으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김상조-이병천 등은 이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면 된다. 예컨대, 재벌개혁을 주장하는 일부의 학자들은 계열사 분리를 통한 '전문 기업화'를 실제로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4.11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은 계열사 체제의 해체를 골자로 하는 재벌해체 방안을 발표한 바 있다. 또한 이동걸 교수 역시 2011년 12월 한겨레신문 칼럼을 통해 "40대 재벌체제를 깨고 4000대 기업체제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이동걸, 2011년 12월 12일, "만약 삼성그룹이 없어진다면", <한겨레> 칼럼). 이 칼럼에서 알 수 있듯이, 이동걸 교수 등이 주장하는 재벌개혁은 계열사 분리와 전문기업화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논점은 더욱 명료해진다. 장하준 등의 주장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계열사 체제'를 해체해야 하는 이유와 우려 지점에 대한 해명 및 재반박을 하면 된다(참고로, 계열사 체제는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상호소유 형태로 일본의 법인 자본주의도 계열사 체제를 유지하고 있고, 유럽의 경우도 지주회사 형태로 그룹체제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계열사 체제는 단점만큼이나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매우 '중요한 토론꺼리'인 셈이다).
논쟁의 철학적 본질
▲ ⓒ프레시안 |
장하준 등이 제기하고 싶었던 진짜 문제의식은 '경제민주화'라는 담론으로 추구되었던 많은 정책들이, 예컨대 한국은행의 독립성 문제, 관치금융 폐지 차원에서 추진된 은행 등의 민영화, 선별적 산업정책의 폐기, 금융자유화 등이 사실은 '경제 자유화' 또는 '경제의 시장화'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마치 우리 모두가 '민주주의'를 만장일치 수준에서 동의하지만, '오늘, 현재' 한국 정치의 핵심 과제가 '정치적 민주주의'의 실현인지 질문한다면, 견해가 갈릴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문제이다. 예컨대, 참여정부 시절 최장집 교수 등은 정치적 민주주의보다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한국 사회의 당면 과제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주장에 공감했었다.
마찬가지로, 1980년대 후반 '3저 호황' 이후 한국경제는 재벌의 힘이 더욱 강력해졌다. 게다가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사회의 정치적 민주화가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경제적-정치적 조건의 변화와 맞물려 '국가의 후퇴' 현상이 급격하게 벌어졌다. 그 결과, 1987년 이후 한국경제는 소위 '경제 민주화'라는 담론의 미명하에 오히려 국가 후퇴 현상이 벌어지며, 결과적으로 재벌의 힘만 더욱 강화되는 '경제적 자유화'로 귀결된 바 있다.
요컨대, 경제민주화라는 '선한 의도'로 추진된 정책적 '결과물'이 반드시 경제 민주화가 아니라, 오히려 '경제적 자유화'로 귀결될 수도 있음을 우리는 경험한 바 있다. 실제로 1997년 IMF 경제위기 사태는 국가후퇴로 인해 금융자유화 등이 추진되면서 단기 외채를 무분별하게 차입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상황이 그렇다면, 김상조-이병천 등과 장하준 등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한국경제 성격 논쟁의 본질은 <'어떤' 경제민주화>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1997년 금융자유화 이후에 국제적 금융자본의 한국경제에 대한 지배력이 과거에 비해서 높아진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논쟁의 본질을 이와 같이 정리할 때, 재벌옹호론이 더 좋은지, 주주자본주의가 더 좋은지의 '저급한' 상호비난성 논쟁을 극복하고, 보다 생산적인 방향으로 논쟁이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논쟁'을 위해 '논점'을 보다 분명히 해본다면…
'좋은 논쟁'은 서로 견해가 갈라지는, 그리하여 이견(異見)이 존재하는 '논점'을 선명히 할 때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서로 동문서답을 하게 되거나, 상대방을 '악마화'하여 허공에 대고 주먹질하는 부질없는 행위로 전락할 수도 있다. 이런 취지에서 논점을 몇 가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현재 한국 경제의 양극화와 투자율 저조의 원인은 '재벌' 문제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더욱 강한가? 아니면 '주주자본주의'의 단기적 수익 극대화 원리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더 강한가? 만약 양자 모두가 이유라면, 양자의 상호관계는 어떠한가?
2) 한국은행은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아닌가? 또한 현재 한국은행은 '물가안정'만을 정책의 중심 목표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에 덧붙여서 미국의 연준(Fed)처럼 '완전고용'을 추가하는 것은 타당한가? 그리고 만약 완전고용을 정책목표로 추가하게 된다면,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의 구성원으로 현재 재계의 의견만 반영되어 있는데, 민주노총-한국노총 등의 노동계 대표와 자영업자 및 소비자 대표 등의 정치적 대표성을 추가로 반영하는 것은 타당한가? (장하준 등의 주주자본주의 타파론자들은 정책목표에서 완전고용을 추가하고, 노동자 대표 등의 금통위 참여를 적극 주장하는 셈이다.)
3) 장하준 등이 박정희식 발전국가의 '긍정적' 업적이라고 평가하는 선별적 산업정책과 정책금융, 그리고 은행에 대한 공적 통제에 대해서 재벌개혁론자들은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는가? 아니면 이 지점도 잘못된 것이었다고 평가하는가?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도 계승-극복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는가?
4) 1997년 IMF 구제금융 이후 참여연대의 김상조와 장하성 등이 주도했던 '소액주주 운동'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예컨대 소액주주의 권리를 향상시킨 측면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동시에 주식시장을 매개 고리로 기업지배구조에 관여하고 있는 '국제 금융자본'의 발언권 역시 동시에 강화시켰으며, 이러한 소액주주 권리 강화가 오히려 경영자에 대한 '단기적 수익극대화'의 압력 수단으로 작용하는 측면은 없는 것인가? 또한 이에 대한 득실(得失)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5) 주주자본주의 타파론자인 장하준 등은 '계열사 체제'의 계승에 강조점을 두고 있고, 반면 재벌개혁론을 강조하는 김상조-이병천 등은 '총수 지배 체제'의 극복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양자는 모두 복지국가의 확대에는 동의하고 있다. 복지국가의 본질이 노동자와 서민들의 정치-경제-사회적 권한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총수 지배 체제 극복 △주주자본주의의 단기수익성 극대화 극복 △노동자-서민의 사회경제적 권한 확대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기업지배구조 등의 '구조적' 정책 대안은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 장하준 등은 기업집단법과 재벌 경영권 방어, 복지확대, 산별노조의 '대타협'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한 재벌개혁론자들의 대답이 필요해 보인다.)
경제민주화의 철학적 본질 - '힘의 균형' 그 자체
우리는 여기서 경제민주화의 본질이 무엇인지 환기할 필요가 있다. 흔히 (정치적)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주요 제도는 △의회주의 △보통선거권 △입헌주의(=법에 의한 지배)로 요약할 수 있다. 이들 각자는 역사적으로 도입 맥락이 약간 다르다. 의회주의는 왕권에 대한 귀족의 대항권, 보통선거권은 노동계급의 정치적 발언권 확대, 입헌주의는 선출직 공직자에 대한 권리남용의 견제 차원에서 각각 도입되었다.
이렇게 역사적 도입의 경위가 약간씩 다름에도 불구하고 세 가지 모두를 관통하는 한 가지의 원리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균형과 견제'의 원리이다. 결국 '힘(세력)의 균형'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 전후(戰後) 일본과 독일에서 재벌 및 콘체른을 해체하고, 노동3권의 강화를 비롯한 노동조합 육성에 연합국이 적극적이었던 것도 이러한 맥락이었다.
그렇다면, 경제민주화의 철학적 본질은 '힘의 균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주주자본주의로 인한 단기주의적 수익극대화와 재벌총수의 막강한 정치-경제-사회적 권력 행사가 문제다. 그렇게 볼 때 한국경제 성격 논쟁이 보다 발전적으로 전개되기 위해서는 재벌개혁론이든 주주자본주의 타파론이든, 최종적으로 노동자-서민-시민들의 정치-경제-사회적 '권한' 및 '힘의 균형'이 어떻게 강화된다는 것인지를 논증할 당위가 있다.
서민들과 재벌-국제금융자본 사이에 '힘의 균형'만 이룰 수 있다면 그 방법이 재벌과의 타협이든 아니든, 그것은 단지 '방법론적 유연성'의 대상에 불과할 것이다. 마치 '좋은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라면, 야권이 새누리당과 입법 타협을 한다고 해서 나무랄 일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