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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 타도' 외침, '분단 철폐' 함성으로 번지다
2017.04.16 16:5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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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53·마지막 회> 6월항쟁, 서른다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6월항쟁 후 들불처럼 번진 통일 운동

프레시안 : 6월항쟁 이후 분단을 해소하고 남북 관계를 새롭게 모색하는 움직임이 활발하지 않았나.

서중석 : 1960년 4월혁명이 일어나자 몇 달 후 통일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지 않았나. 그것과 마찬가지로 1987년 6월항쟁이 일어난 후에도 통일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6월항쟁과 7·8·9월 노동자 대투쟁이 계승 관계에 있다고 지난번에 얘기했는데, 6월항쟁으로 기본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쟁취되면 또 바늘에 실 가듯이 통일 운동이 일어나게 돼 있었다. 6월항쟁, 노동자 대투쟁, 통일 운동 이 세 가지는 서로 밀접한,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70년대 후반에는 해외에서 통일 문제에 대한 관심이 컸지만, 1980년대에 들어와서 국내에서도 통일과 관련된 큰 움직임들이 있었다. 1983년에 있었던 KBS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은 남남 이산가족 찾기였지만 분단의 아픔을 진하게 느끼게 했다. 1985년 9월에는 남과 북의 정부 수립 이후 37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 이산가족이 상봉했다.

1980년대에 활약한 주요 재야 단체들도 통일을 대단히 중시했다. 1983년에 결성된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1984년 6월에 조직된 민중민주운동협의회, 1984년 10월에 창립된 민주통일국민회의 모두 통일을 중시했다. 민주통일국민회의는, 그 의장 문익환이 1980년대 통일 운동을 상징하기도 했지만, 이름부터 민주주의와 통일을 똑같이 중시한다는 걸 보여줬다. 1985년에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 만들어졌는데 역시 의장은 문익환이었고 민주주의와 통일, 그리고 이제는 민중까지 세 가지를 중시하며 재야 세력의 중심축 역할을 했다.

학생들, 남북 학생 회담 제안하고 올림픽 공동 개최 요구

프레시안 : 6월항쟁 이후 통일 운동, 어떻게 전개됐나.

서중석 : 6월항쟁 직후인 1987년 8월 19일 NL계를 주축으로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 출현했다. 97개 대학으로 이뤄진 전대협은 활동 방향의 두 번째 항목에 "조국의 자주적, 평화적 통일을 앞당기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명시했다.

통일 운동은 1988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장 후보로 나선 김중기가 남북한 대학생 체육 대회와 국토 종단 순례 대행진을 제안하면서 폭발하듯 불이 붙었다. 김중기는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에게 드리는 공개서한'에서 민족 화해를 위한 남북한 청년 학생 국토 종단 순례 대행진을 1988년 8월 1일부터 14일까지 북한 청년 학생은 백두에서 판문점까지, 남한 청년 학생은 한라에서 판문점까지 하고 8월 15일 판문점에서 만나 한판 대동제를 하자고 제안했다. 남북한 청년 학생 체육 대회를 그해 9월 15일에서 17일 사이에 서울대와 김일성종합대학 중 한 곳에서 하자는 제안도 했다. 그러면서 실무 회담을 6·10항쟁 1주년인 1988년 6월 10일 판문점이나 제네바 같은 제3국 지역에서 열자고 제안했다. 김일성종합대학 학생위원회는 이것에 동의했다. 그러면서 남북 학생 회담은 사회적 이목을 끌며 큰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시기 통일 운동과 함께 강렬하게 주창된 것이 남북 공동 올림픽 개최였다. 이에 앞서 1985년 7월 북한 부총리 정준기가 올림픽 남북 공동 개최를 들고나왔다. 그 후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의 중재로 1988년 1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남북 체육 회담이 열렸지만, 이 문제에 대해 합의하지는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학생들과 재야 세력이 올림픽 공동 개최를 강력히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1988년 5월 28일 민통련을 비롯한 65개 사회단체는 남북 공동 올림픽과 6·10 남북 학생 회담 성사를 촉구하는 시국 선언을 발표했다.

노태우 정권, 창구 단일화 조치와 7·7선언으로 대응

프레시안 : 노태우 정권은 어떻게 대처했나.

서중석 : 학생들을 비롯한 각계각층에서 통일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남북 공동 올림픽 개최와 남북 학생 회담에 대한 요구가 분출하자, 노태우 정부는 1988년 6월 2일 소위 창구 단일화 조치를 발표했다. '통일 논의를 적극 개방하고 건전한 통일 논의의 활성화를 뒷받침하되, 대북 제의나 접촉의 창구는 정부로 일원화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속에서 남북 학생들이 실무 회담을 열겠다고 한 6월 10일 전날인 9일, 전국 25개 대학의 학생 1만여 명이 6·10 남북 학생 회담 성사를 위한 100만 학도 총궐기 대회를 열었다. 6월 10일 전국에서 모여든 학생들이 출정식을 열고 판문점으로 가려 했으나, 경찰에 의해 봉쇄됐다. 학생들은 곳곳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로 890여 명이 연행되고 32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통일 운동이 거세지자 노태우 대통령은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 선언', 즉 7·7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서 노태우는 6개 항의 정책을 발표했다. 먼저 5항까지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1) 남북 동포 간의 상호 교류를 추진하고 (2) 이산가족들의 생사 확인과 상호 방문 등을 적극 주선하고 (3) 남북 간 교역의 문호를 개방하고 남북 간 교역을 민족 내부 교역으로 간주하며 (4) 비군사적 물자에 대해 우방들이 북한과 교역하는 데 반대하지 않고 (5) 남북 간의 소모적인 경쟁 대결 외교를 종결하기를 희망한다고 표명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 6항이었다. 노태우는 여섯 번째로 "북한이 미국, 일본 등 우리 우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협조할 용의가 있으며 또한 우리는 소련,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한다"고 밝혔다. 6항이 중요한 이유는 소련,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 관계 개선을 추구한다는 것, 나중에 이걸 북방 외교라고 하는데 그런 북방 외교를 실현한다는 것과 함께 북방 외교를 실현해 북한을 포위하고 고립시킨다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6·10 남북 학생 회담이 실패로 돌아가자 8·15 남북 학생 회담을 다시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야당과 재야 단체들이 이를 지원했지만 정부 당국이 불허해 8·15 남북 학생 회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8월 15일 학생들은 연세대에 모여 출정식을 열고 판문점으로 향했지만, 경찰에 막혀 도심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 1988년 6월 9일, 6·10 남북 학생 회담 성사를 촉구하며 궐기 대회에서 드러누운 학생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88올림픽과 북방 외교…남북 관계에서 공세적 위치에 선 남한

프레시안 : 남북 공동 올림픽 개최 주장도 실현되지 않지 않았나.

서중석 : 어떻게 해서 88올림픽이 열리게 됐는가는 예전에 얘기한 바가 있는데,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열린 88올림픽은 주목받았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에는 미국 등 서방 60여 개 국가가 불참했고 1984년 LA올림픽에는 소련을 위시해 동구권 18개 국가가 불참했는데, 서울올림픽에는 북한, 알바니아, 니카라과, 쿠바 등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 160개 국가가 참여했기 때문이다. 보도진만 해도 인쇄 매체 취재 기자 3864명, 사진 기자 533명, 외국 기자 4297명 등 1만 5293명에 이르렀다. 제24회 서울올림픽에서는 세계 신기록이 33개 나왔다. 금메달 55개를 획득한 소련이 종합 1위, 동독이 2위, 미국이 3위를 했고 한국은 서독보다도 많은 금메달 12개로 4위를 했다.

1986년에서 1988년까지 연평균 13퍼센트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경제 상황이 좋았던 것이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뒷받침해줬다. 그와 함께 이 대(大)호경기는 노태우 정권의 북방 외교를 뒷받침하는 힘이 됐다.

프레시안 : 북방 외교, 어떻게 전개됐나.

서중석 : 7·7선언이 표면적으로 북한은 물론 사회주의 국가들과 관계 개선을 추구한다는 것을 내세웠지만 북한을 고립시키려는 북방 정책과 연계돼 있다고 앞에서 얘기하지 않았나. 이 선언 이틀 전인 1988년 7월 5일에 이미 노태우 정부는 유고슬라비아에 무역 사무소를 개설했다. 그해 9월에는 헝가리와 상주 대표부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노태우 정권이 북방 외교를 펴는 데 있어 여러모로 운이 좋은 면이 있었다. 대호황기라는 점도 그랬고, 또 하나는 동구권이 몰락할 때 이러한 경제적인 뒷받침을 받으면서 돈과 관련을 지어서 빨리빨리 동구, 소련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1989년 2월 1일 한국은 공산권 국가로는 최초로 헝가리와 수교했다. 이것은 남북 관계에서 남한이 공세적 위치에 섰음을 보여줬다. 이어서 그해 11월 폴란드와 대사급 수교를 했다. 1990년 10월에는 소련과도 수교했다. 이 시기에 연이어 벌어진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 붕괴, 서독의 동독 흡수 통일, 소련 붕괴는 남한에 아주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지만 북한에는 엄청난 고통을 안겨줬다.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는 데에는 북한과 중국의 관계 때문에 시간이 걸렸다. 1992년 8월 한국은 베이징에서 중국과 수교 의정서를 교환하며 국교를 수립하고, 대만과 단교한다고 발표했다.

불가침과 상대방 실체 인정을 약속한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오월의봄

프레시안 : 노태우 정권이 대외적으로 북방 외교를 통해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하던 시기에 국내에서는 공안 정국이 조성되지 않았나.

서중석 : 통일 운동은 1989년에 들어와 방북 공안 정국을 초래했다.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가 방북했고, 6월에는 전대협 대표 임수경이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다. 또한 평화민주당 서경원 의원이 1988년에 방북한 사실이 1989년 6월에 드러났고, 작가 황석영도 1989년 상반기에 북한을 방문했다. 문 목사와 임수경 등의 방북은 서경원 의원 방북 사건과 함께 공안 정국을 불러왔다.

이때에는 문 목사가 북한에 간 것에 대해 참 논란이 많았는데, 2000년대에 들어와서 남북이 그전보다 폭넓게 왕래할 수 있게 됐을 때 문 목사의 방북이 남북 화해와 통일에 다리를 놓는 데 얼마나 크게 기여했는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임수경은 북한 주민들에게 환영을 받았고 '통일의 꽃'으로 불렸다.

남북 관계는 1990년대에 들어와서 급진전됐다. 1991년 9월 남한과 북한은 동시에 UN에 각각 가입했다. 그해 12월 남북 고위급 본회담에서는 대한민국 정원식 국무총리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연형묵 정무원 총리가 서명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다.

남북한은 이 합의서에서 남북 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 관계'로 규정하고 상대방의 국가적 실체는 인정하되 국가로는 승인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상대방 체제의 인정과 존중, 내정 불간섭을 명시하고 불가침과 교류 협력에 관한 여러 사항을 규정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분단 후 남한과 북한이 공식 국가 명칭을 합의 문서에 표기한 첫 사례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당시 정식 국호도, 서명자들의 직책도 넣지 않고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 이후락 김영주"로 서명자 부분을 애매모호하게 처리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합의서 채택 후 북한은 "중앙인민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연합회의의 심의를 거쳐 국가수반인 김일성"이 비준했다. 이와 달리 남한에서는 국회의 비준 동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노태우 대통령 재가로 비준 절차를 마무리했다. 총선(1992년 3월)을 앞둔 시기라는 점 등 국내 정치 상황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편집자')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세기의 만남'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초석을 놓다


프레시안 :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후에도 남북 관계는 숱한 역풍을 맞았다. 이동복의 훈령 조작 사건(1992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국내 수구 세력의 반발, 북핵 문제로 촉발된 한반도 전쟁 위기 그리고 김일성 사망과 김영삼-김일성 정상 회담 무산(1994년), 북한 붕괴론 확산과 북한의 이른바 고난의 행군 등의 상황이 이어지면서 남북 관계는 부침을 거듭했다. 그러다가 남한에서 처음으로 정권 교체가 이뤄지고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남북 관계에 큰 변화가 생기지 않았나.

서중석 :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 남북 관계는 급격히 호전됐다. 새로운 전기를 만드는 데 현대 그룹 총수 정주영이 큰 기여를 했다. 1998년 6월 정주영은 소 500마리를 끌고 판문점을 넘었다. 10월에는 소 501마리와 현대 자동차를 가지고 판문점을 넘어갔다. 그해 11월 18일, 드디어 금강산 관광선이 닻을 올렸다. 이날 관광객 826명 등 1418명을 태운 배가 동해안에서 금강산을 향해 북한의 장전항으로 떠났다.

세기의 만남은 새 천년의 첫해에 이뤄졌다. 2000년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을 때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공항까지 나와 영접했다. 6월 15일 두 정상은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통일 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하고,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해나가기로 합의했다는 내용이었다.

두 달 후인 8월 15일, 공동 성명에 따라 남북 이산가족 방문단이 교환됐다. 9월에는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북한으로 갔고, 임진강에서 경의선 복원 기공식이 열렸다. 2000년 남북 정상 회담은 남한과 북한 주민들의 이해와 화합, 협력과 한반도 평화, 나아가 통일을 향한 거대한 초석을 놓았다. 그뿐 아니라 사상과 양심의 자유, 학문의 자유도 넓혔다.


▲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포옹하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국가기록원



남북 공동 올림픽 개최 주장과 북한 바로 알기 운동, 어떻게 볼 것인가

프레시안 : 소떼 방북, 금강산 관광선 출항과 남북 정상 회담 사이에 1차 서해 교전(1999년)으로 인한 위기가 있었음에도 대북 화해·협력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한 것이 남북 관계를 크게 개선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개성공단까지 폐쇄된 오늘날 새로운 남북 관계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대목이다.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전에, 앞에서 다룬 사안을 조금 더 짚었으면 한다. 88올림픽 전에 나온 남북 공동 올림픽 개최 주장을 앞에서 다뤘는데, 냉정히 따져볼 때 공동 올림픽이 당시 실행 가능한 일이었을까? 북측의 정치 공세라고 볼 수 있는 측면도 있지 않았나.

서중석 : 북쪽의 정치 공세라는 측면도 있지만, 남북 공동 올림픽 개최는 그게 성사되느냐 안 되느냐를 떠나서 남북 협력과 상호 방문 그리고 한반도 평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그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이후 남북 간에 축구 대회라든가 여러 경기 교류가 바로 이뤄지지 않았나.

프레시안 : 1980년대 후반 통일 운동과 더불어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이 시기에 전개된 통일 운동,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모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과연 북한에 대해 객관적으로 파악하려 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북한에 경도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경우도 일부 있는데, 이 시기 통일 운동과 북한 바로 알기 운동에 대해 평가할 때 그런 부분까지 포괄해 살펴야 하는 것 아닐까 싶다.

서중석 : 6월항쟁을 전후해 주사파가 등장·확산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북한 바로 알기 운동에는 분명히 주사파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그 이전에 남쪽에서 북한 그리고 사회주의권의 실상을 접할 기회 자체를 너무나 극단적으로 차단한 점, 다시 말해 예술, 문화, 정치 등 모든 면에 걸쳐 아예 사실 자체를 아는 것을 통제했다는 점을 충분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일부 주사파의 문제점은 분명히 지적해야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이 시기에 있었던 통일 운동, 북한 바로 알기 운동 등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편을 끝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연재를 마칩니다. 박근혜 정권이 출범한 해 여름(2013년 8월)에 첫 번째 마당을 열었는데, 어느덧 3년 8개월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에 적폐의 상징 박근혜는 탄핵됐습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고 은폐된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함께 나아가야 할 길이 박근혜 탄핵으로 끝난 것은 아니겠지요. 그 길이 멀고 험하더라도, 역사에 대한 관심과 깊이 있는 이해가 그 길을 가는 데 큰 힘이 되리라 믿습니다.

앞으로는 연재를 바탕으로 다시 정리한 책(<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8권, 9권 이후 근간)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긴 시간 동안 현대사 이야기와 함께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기획·정리자 김덕련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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