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동 키드'는 대치동에만 있는 게 아니다"

[교육감이 찾아갈 곳ㆍ上] 사교육 1번지 대치동 학원가

서울시 교육감을 주민직선으로 뽑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이제 드물다. 시내 곳곳에서 선거차량을 볼 수 있을 만큼 선거전이 꽤 달아올랐다. 하지만, 교육정책의 방향을 정하는 과정에 시민이 참여한다는 교육감 직선제의 취지가 제대로 살아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인 목소리가 높다.

정책에 대한 차분한 토론 대신 '색깔론'에 가까운 흑색선전만 난무하는 선거가 됐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이런 지적도 한편 공허하다.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는 현장에 대한 차분한 성찰이 빠진 정책 토론이 활기를 띨 수 없다는 점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레시안>은 우리 교육의 가장 예민한 장소를 골라 나섰다. 새로 선출될 교육감이 꼭 방문했으면 하는 장소다.

먼저 찾아간 곳은 서울 대치동. '사교육 1번지'라 불리는 곳이다. 특목고와 자율형 사립고 관련 정책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이기도 하다. 또 아이들의 학습 부담이 가장 큰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대치동 키드'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게 된다. '입시 트레이너' 역할을 하는 부모가 고액 사교육을 통해 키워낸 아이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런데, 막상 대치동에서 만난 숱한 '대치동 키드'들은 대부분 대치동에 살고 있지 않았다. 먼곳에서 대치동까지 찾아와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이 많았다.
'대치동 식 교육'은 대치동을 떠나 한국 교육의 한 특징이 된 지 오래라는 뜻이다. '대치동 식 교육'을 통해 길러진 아이들이 만들어 갈 미래는 어떤 것일까? <편집자>

"잠실에선 이게 평균이에요"

초등학교 6학년인 서연이(가명)는 하루가 바쁘다. 학교가 끝나면 하루 세 시간 영어, 수학 학원을 다니고 올해부터는 논술 학원도 다니기 시작했다. 학원에 가지 않는 시간엔 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온다. 과학실험, 피아노, 바이올린 개인교습을 받고 국어, 한자, 논술은 학습지까지 병행하려니 친구들과 놀 시간이 없다. 얼마 전부터는 학교에서 특별 수업으로 오케스트라 반을 들어 아침 8시까지 학교에 가야 해서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그나마 최근까지는 서울 잠실에 있는 집 근처 영어 학원을 다녔지만 다음 주부터는 대치동 영어 전문학원에 다니게 돼 더 바빠질 것 같다. 서연이 엄마는 지난 6월 한 특수목적고 전문 학원이 개최한 입시설명회에 다녀온 후 대치동 학원 쪽에 관심을 갖게 됐다. 서연이 엄마는 대치동까지 아이를 보내는 이유에 대해 "대치동 영어학원은 1:5의 소수과외 형태여서 다른 곳과 달라요"라며 "또 대치동에 모이는 아이들이 아무래도 다른 데랑은 차이가 있죠"라고 말했다.

학원과 개인레슨 때문에 제대로 놀 시간이 없는 초등학생이 서연이만은 아니다. 서연이 엄마는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잠실에선 이게 평균 정도에요"라며 "교육비가 보통 한 달에 한 아이 당 100만 원 정도 든다"라고 말했다. 아이가 둘인 집에선 매달 꼬박 200만 원이 사교육비로 빠져나가는 셈이다.

"초등학교 4~6학년, 특목고 못 가면 바보다?"
▲ 이른 시각, 대치동 학원으로 향하는 아이들. ⓒ프레시안

이명박 정부는 '자율화 조치'와 '영어 공교육 강화' 등을 통해 사교육비를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공약을 일찌감치 내놓았지만 지난 몇 달 간 오히려 사교육 시장은 요동치고 학생들은 무한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인수위의 '영어몰입교육' 정책은 큰 반발 끝에 결국 없던 일이 되긴 했지만 '어륀지' 발언의 파장은 학부모들 사이에서 매우 컸다. 입시정책에 민감한 학부모들 사이에는 "초등학교 때 영어는 끝내 놓아야 한다"는 말까지 생겼다.

또 '학교 다양화 프로젝트 300'의 일환으로 전국적으로 자율형 사립고 100개가 생길 거라는 계획이 발표되면서 "지금 초등학교 4~6학년 아이들 중에 특목고에 못 가는 아이들은 바보다"라는 말이 돌았다. 사교육 시장은 더욱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분당에서 왜 대치동까지 오냐고요?

대치동 학원가에는 특수목적고 전문 학원이 몰려 있어 대치동에 사는 학생들 뿐 아니라 타지역에 사는 학생들로도 붐빈다. 분당에 사는 효준(중2) 양도 일주일에 두 번은 대치동에 영어 수업을 들으러 온다.

"국제청심중학교에 떨어지고 외고를 준비하고 있어요. 만약 떨어지면요? 그럼 일반고에 가 외고 편입 시험을 볼 거에요. 외고 나와서 미국으로 유학 가는 게 꿈이에요."

효준 양 반 40명 중 20명은 특목고 준비를 하고 있다. 특목고를 준비하는 학생들 중 상당수는 효준 양처럼 외국 유학을 가고 싶어서 특목고를 선택한다. 수년 전부터 유학반을 운영하는 민사고, 외고 등에서 미국 아이비리그 합격자를 다수 배출하자 특목고의 인기는 더 높아졌다.

그러나 특목고 준비를 위한 길은 쉽지 않다. 들여야 하는 노력도 노력이지만 유명 특목고 전문학원에서 공부하려면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특목고 시험을 몇 개월 앞둔 윤영(중3)군은 지난 학기에는 6시간씩 다니던 학원을 방학 때는 하루 9시간씩 다니고 있다. 점심을 먹고 난 오후 두 시부터 밤 11시, 때론 자정까지 학원에서 공부한다. 전 과목 수업을 듣다 보니 비용도 한 달에 170만 원이나 한다.

"선행학습…초등학생이 고등학교 수학 공부"
▲ 대치동 학원가 풍경. ⓒ프레시안

특목고 준비는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된다. 초등학교 5, 6학년 중 특목고를 준비하는 아이들은 이른바 '선행학습'의 수준이 매우 높다. 지한이(초5) 엄마는 "보통 5학년이면 10-가, 그러니까 고등학교 1학년 수학을 공부한다"라고 말했다. 선행학습은 최소 두세 번 많게는 네다섯 번 반복하게 된다.

대치동의 초등학교 6학년 담임교사인 이선영(가명, 26) 교사는 "한 반에서 반 정도는 선행학습을 하고 온다"며 "아주 앞서 선행학습을 하지는 않더라도 대부분 한 두 단원은 미리 공부하기 때문에 수업시간은 아이들이 이미 알고 있는 걸 짚어주는 정도가 된다"고 말했다.

이같이 많으면 3~4년 정도의 선행학습이 이뤄지면서 다양한 학생을 대상으로 가르쳐야 하는 공교육 현장은 어려움이 많다. 이선영 교사는 특히 수학 과목은 아이들 수준 차이가 매우 커서 수업내용이 모든 아이들을 만족시키기가 어렵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자율형 사립고…"수요 만큼 늘어나니 좋다" vs "학원 배불리기일 뿐"

대치동 일대에서 만난 학부모들에게 이명박 정부가 전국에 자율형 사립고 100개를 설립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한 것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어떻게든 특목고나 자사고에 입학하고 싶은 학생들의 수요만큼 자사고 수가 늘어나는 게 좋다는 반응이 많았다.

초등학교 6학년 영민이(가명) 엄마도 "원래 외고를 생각했었는데 일찍부터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자사고에 보내는 걸 생각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반면, 결국 늘어난 입시생 수요를 학원에서 끌어가 학원 배불리기밖에 더 되겠냐는 부정적 반응도 있었다.
'대치동 키드'는 다르다…인성, 철학과외까지

대치동 안에서도 차이는 있다. 학원 앞에서 마주친 지한이(5학년) 엄마는 대치동에 살지만 '대치동 키드'는 아니란다. 지한이는 영어, 수학, 피아노, 태권도를 다니는데 "이건 조금 다니는 거에요"라며 "대치동 키드는 인성교육, 철학 이런 거까지 배워요. 다 나중에 논술 준비로 이어지는 거죠"라고 말했다.

실제 대치동에서 초중고 시절을 보내고 현재는 미국 명문대에서 유학 중인 정재(20, 가명) 군은 외고를 나와 미국으로 유학 간 일명 '대치 도곡 패밀리'의 하나다. 대치동 키드는 과연 어떤 교육을 받을까? 정재 군은 "자신이 대치동의 평균적인 경우라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정재 군은 "어릴 때부터 영어를 좋아해서 영어로 된 책과 영화를 많이 봤다"며 "오히려 원어민 수업은 도움이 별로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열 명이 팀을 짜서 학원 강사 선생님을 불러 공부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주로 언어나 영어 과목은 그렇게 공부한다"고 말했다. 당시 과외비는 일인당 백 만원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논술 강사로부터 철학 과외를 받았다. 정재 군은 "어린 학생들에게 논술의 바탕이 되는 철학과 문학을 가르치는 게 당시 시작됐다"며 "요새는 좀 더 어린 나이부터 하는 걸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4살, 영어유치원을 시작할 나이"

다른 교육보다도 대치동 학부모들이 일찍부터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이 '영어 교육'이다. '영어 공부는 어릴 때 시작할수록 좋다'고 알려져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는 연령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 3~5세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부터 영어 교육이 시작되고 4~5살이 되면 본격적으로 원어민 선생님이 영어로만 수업하는 영어유치원을 다니게 될 지 고민하게 된다.

3년째 영어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민지(가명, 7)는 외국인과 프리토킹이 가능할 정도로 영어를 잘한다. 민지 엄마는 "작년까지만 해도 잘 몰랐는데 올해 들어 갑자기 영어가 많이 는 거 같다"며 "혼자서 10분 동안 영어로 떠드는 걸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유치원에서는 교포 선생님이 미국 초등학교 2~3학년 교재로 모든 수업 시간을 영어로 진행한다. 민지 엄마는 "일반 유치원과 달리 영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만 차이가 있다"며 "한국의 예절, 노래, 만들기, 음악, 체육 등 전인교육을 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 골랐다"라고 말했다.

영어 공교육에 대한 불신…"100만 원짜리 사교육만 하겠어요"

영어 유치원 비용은 매년 크게 늘고 있는 추세다. 2년 전에는 60만 원 정도이던 유치원비가 요새는 100만 원 정도 한다고 민지 엄마는 말했다.

이 같이 취학 전부터 영어 교육 붐이 크게 불면서 학교에서 제공하는 영어 교육은 아이들 수준에 비해 턱없이 낮은 수준이 돼 버렸다.

학교에서 진행되는 원어민 수업에 대한 평가는 별로 좋지 않았다. 영민이(가명) 엄마는 "학교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원어민 수업을 하는데 애들이 거의 듣지 않고 도움이 안 된다"며 "아무리 학교에서 영어 공교육을 강화한다고 해도 사교육만 하겠냐"고 말했다.

한국으로 영어 배우러 들어오는 유학생?

외국으로 유학을 간 학생들도 방학이면 바빠진다. 짬을 내어 한국으로 들어와 영어 학원을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영어가 모국어인 사회로 유학 간 학생이 한국에 와서 영어 학원을 다닌다? 얼핏 들으면 납득이 안 되지만 한국의 사교육 산업은 이미 국제적이다.

동이 군(중2)은 지난해 9월 미국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이번 방학 때는 한국으로 돌아와 영어 학원을 다니고 있다. 동이 군은 "한국에 SAT와 TOEFL 학원을 다니러 오는 거다"라며 "이 수업은 한국이 더 잘 가르친다고 소문이 나서 유학생들이 방학을 이용해 한국에 많이들 들어와 학원을 다닌다"고 말했다.

선행학습·고액 사교육, 비싼 만큼 효과 있나?

대치동 학부모보다 입시 정책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학원 강사 등 사교육 산업 종사자들이다. '대치동 키드' 모델이 확산된 대가로, 큰 돈을 벌어들인 이들은 '대치동 식 교육'의 미래에 대해 어떻게 전망할까.

30대 중반 수학 강사 강 모 씨. 수재들만 모인다는 과학고에서도 최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던 그는 '시험 치는 일'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결국 지금은 '시험 치는 법'을 가르치는 대가로 생계를 유지한다.

강 씨는 "학원이 아이들을 바보로 만든다"라고 잘라 말했다. "당장 점수를 올리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길게 보면 아이에게 손해다. 혼자서 공부하는 힘을 기를 기회가 사라지기 때문이다"라는 설명이다.

강 씨가 특히 비판한 것은 선행학습이다. 학원을 통한 선행학습은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돕는 게 아니라 문제 풀이 요령을 외우게 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 선행학습을 한 아이들 중 상당수가 개념을 모르면서도, 아는 듯한 착각에 빠져 있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해당 내용에 대한 수업을 할 때는 '이미 다 아는 내용'이라는 생각 때문에 수업에 집중하지 않게 된다는 것.

사교육의 도움을 받지 않고 개념을 터득한 학생들과 달리, 이런 학생들은 문제 유형이 조금만 바뀌면 당황하기 일쑤라는 게 강 씨의 설명이다. 또 스스로 고민하면서 공부한 경험이 없는 까닭에, 조금 어려운 개념을 만나면 혼자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 쉽게 포기하고 남에게 의존하려고만 한다는 지적도 곁들였다.

유명 학원 강사 출신인 이 모 씨도 비슷한 지적을 했다. 그는 "대기업 인사 담당자들이 '서울 강남 출신 SKY(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졸업생을 조심하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는다"라고 이야기했다. 사교육에 의존하는 버릇이 몸에 밴 까닭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또 '점수 경쟁'에 지나치게 민감한 탓에 동료와 협동하여 과제를 수행하는 능력은 오히려 부족한 경우가 많다는 지적도 소개했다.

이 씨의 설명은 이렇다. "사교육에 대한 비판은 흔히 교육 공공성이라는 측면에서만 이뤄진다. 교육 양극화를 초래한다는 비판이다. 옳은 비판이다. 하지만, 고액 사교육을 받는 아이들 역시 피해자다. 스스로 공부하는 능력을 키우지 못한 아이들이 지식경제시대에 적응하기 힘들리라는 점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교육감이 찾아갈 곳·下'에서는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에 있는 지역 아동센터를 다룹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