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사무총장의 발언들 가운데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것이 바로 '의지'의 강조였다. '세계 평화와 인류 번영'을 위해 당장 필요한 것은 막대한 자금이나 첨단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정치적 의지'이다. 인류애를 기반으로 한 인도주의적인 노력들은 국제사회 힘의 역학관계나 자국 내 정치 상황에 좌지우지될 위험에 노출되어있기 때문에, 성숙한 시민의식과 정치적 의지로 인류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늘 환기시켜야 한다.
반기문 사무총장의 방한으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역할과 정치적 의지에 대한 보다 다양한 논의들이 나오기를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다. 이는 일차적으로 전 국민을 회오리로 몰아넣은 '쇠고기 정국'이기 때문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현 정부가 국제사회의 기여와 신뢰도 구축에 큰 무게를 싣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즉, 정치적 의지의 실종이다.
세계화장실협회라는, 화장실을 통해 인류의 생명을 구하는 목적으로 출범한 국제 NGO에 대한 정부의 약속 불이행이 그 단적인 예이다. 세계화장실협회는 2007년 11월 21일부터 닷새간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린 창립 총회를 통해 발족한 기구다. 대한민국 정부와 한국화장실협회가 공동으로 창립 총회를 개최했으며,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 세계 66개국에서 170여명의 대표단과 유엔 관련 기구 인사들이 서울을 방문했다.
참석자들은 국제사회에서 중요한 이슈로 취급되지 못한 화장실 문제의 문제해결을 위해 전 세계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열정을 확인했다. 또한 세계화장실협회는 유엔이 지정한 '세계위생의 해'인 2008년을 앞두고 창립되었다는 점에서도 국제사회의 큰 관심을 받았고, 화장실 관련 전문성을 바탕으로 향후 유엔 자문기구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화장실만을 다루는 기구의 창립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화장실은 여전히 냄새나는 '금기'의 공간이자 한 국가의 치부로 인식되기 때문에, 화장실을 국제적으로 공론화 하는 것 자체가 편견과의 힘겨운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에 홍보사절단은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호주 등 전 세계를 누비면서 화장실이 생명의 공간임을 알렸고, "누구도 그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던" 화장실 기구를 창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화장실 혁명의 발원국으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세계화장실협회 창립에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화장실을 공공서비스의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고 국민의 보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정부가 발 벗고 나서는 한국의 사례는 각국 정부부처 인사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그처럼 힘겹지만 성공적으로 세계화장실협회가 출범했다. 2008년은 WTA 활동의 원년으로서, 화장실 전문 국제기구의 방향성과 역할을 정립해야 하는 중요한 해다. 저개발국 공중 화장실 지원사업과 워크숍, 글로벌 캠페인 등 WTA가 시작해야 할 일은 많으며, 국제사회는 WTA의 활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출범한지 6개월이 지난 현재 세계화장실협회가 좌초할 위기에 놓여있다. 이는 협회의 창립을 주도했던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사회에 약속했던 사항을 이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며, 신생기구로서의 자립방안을 찾고 있는 세계화장실협회의 다양한 노력을 정부가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상반기가 지난 지금까지 국회라는 입법기관의 심의를 통해 정당하게 책정된 예산을 세계화장실협회에 배정하지 않고 있다. 이는 "NGO의 재정 자립도롤 판단하고 정부 보조금을 지원하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NGO 지원 방침 때문이다. 이제 막 출범한 기구가 자생력을 갖기 까지 최소 5년~10년이 소요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정부가 창립을 주도한 기구에 예산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것은 협회를 정상화할 어떤 의지도 없다는 뜻이다.
정부 보조금의 지급이 지연됨으로 인해 세계화장실협회는 크나큰 손실을 입고 있다. 출범 초기 조직의 마스터플랜을 완성하고 핵심 사업을 전개하는 모든 일이 중단되고 있는 것이다. 케냐 빈민촌이나 캄보디아의 학교 등 개발도상국의 위생 시설이 열악한 지역에 화장실을 지원해주는 일은 시작도 못하고 있다. 또한 얼마 전 대재난이 강타한 중국과 미얀마 지역에서 시급을 다투는 화장실 긴급구호 활동을 벌이려는 세계화장실협회의 노력도 무산되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신뢰도가 큰 타격을 입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이 화장실을 통해 가난한 나라를 돕는다면 세계가 경탄할 일"이라고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던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의 참가자들에게 했던 약속들을 지키지 못한다면, 이 자체가 국제사회에서 불명예스러운 이슈가 되어 한국의 대외 신뢰도를 추락시킬 것이다.
이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는 NGO 지원방침이라는 규정을 근거로 협회를 압박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인큐베이팅했다는 사실도, 이제 막 출범한 신생기구라는 것도 외면한 채 규정만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이 같은 태도를 계속 고집한다면, 협회는 자생적으로 살아남을 기회도 갖지 못한 채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이는 협회를 창립하기 위해 2006년과 2007년 2년 동안 41억 원이 투입된 국고의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작년 창립총회에서 당시 한덕수 대한민국 국무총리는 "대한민국 정부는 국제사회의 개발·환경·위생 관련 NGO에 대한 지원을 점차 확대해 나갈 것"이라는 약속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이같은 정부 기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이전 정부와의 정책적 단절을 강화하며 NGO 지원 방침을 달리하겠다는 태도만 보이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국가의 신뢰도를 높여가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도 중요한 일이다. 세계화장실협회 창립을 통해 한국은 다른 나라가 오랫동안 다져왔던 국제사회 위상을 단번에 획득하는 성과를 얻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창립 총회를 통해 국제기구의 사무국을 한국에 유치했으며 이는 명실공이 한국이 세계 화장실 문화운동의 종주국으로서의 위상을 갖게 됨을 의미한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국제 원조의 수혜자였던 한국이 한국만의 독특한 화장실 문화운동의 성과를 바탕으로 어려운 국가를 돕는 '베푸는 국가'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며, 세계 66개국이 이를 지켜보면서 축하했던 것이다.
국제사회의 축하는, 반기문 사무총장의 말대로 한국이 국제사회 참여자로서 진정한 기여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 때문이다. '진정한 기여'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인류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노력들이다.
안전한 식수와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인한 전염병 때문에 오늘도 1분에 4명의 어린아이가 죽어가고 있다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것, 위생적인 화장실 시설을 갖는 것만으로도 많은 생명을 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기여인 것이다.
화장실을 통해 인류의 생명을 구하는 세계화장실협회의 창립은, 정권교체나 이전 정권과의 정책적 단절 등의 조악한 정치논리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위생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일에 한국 정부가 기여하는 것은, 국제사회 일원으로서 놓칠 수 없는 소중한 기회라는 것을, 이명박 정부는 부디 깨닫기를 바란다. 정치적 의지란 바로 이런 깨달음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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