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반도체 다니다 백혈병 얻어 죽었습니다"

고 황유미 씨 가족, 진상규명 및 산재인정 등 요구

속초상고를 다니던 황유미 씨. 지난 2003년 10월 졸업을 앞둔 동기들 10여명과 함께 삼성전자 기흥공장에 취직했다. 우리나라 경제를 이끈다고 하는 반도체 공장이었다.

그런데 입사한 지 2년이 채 안 된 2005년 5월께 피부에 멍이 생기고 구토와 피로, 어지러움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더니 '급성 골수성 백혈병 M2'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해 12월 골수 이식 수술을 받았으나 2006년 11월 재발했고, 끝내 올해 3월 숨졌다.

분노한 유미 씨의 아버지

그 사이 가족들은 만신창이가 됐다. 황 씨의 할머니는 유미 씨의 병을 걱정하다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딸의 치료와 간호를 하다 평생을 모은 재산을 거의 다 날렸다. 딸의 죽음에 속수무책이었던 어머니는 심한 충격을 받아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을 지경이 됐다. 이에 분노한 아버지가 "딸의 죽음은 반도체 공장의 유해물질"이라고 주장하며 거리에 나섰다.
▲ 20일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공장 앞 기자회견에 참석한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 ⓒ프레시안

고인이 된 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53) 씨는 20일 경기도 기흥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삼성 반도체 공장에 취직한 이후 병에 걸려 죽었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개인적 질병'이라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황 씨의 주장에 따르면 딸이 죽은 이후 죽음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수소문한 결과 최근 7년간 기흥공장에서 근무하던 노동자들 중 7명의 백혈병 환자가 발생하고 이 중 6명이 숨졌다는 것이다. 특히 황 씨가 딸의 죽음 원인으로 '반도체 공장의 설비'를 확신하게 된 것은 딸과 같은 공정에서 근무하던 동료의 죽음을 확인한 것이다.

황 씨에 따르면 딸은 '3라인 디퓨전(diffusion) 공정 3베이'에서 일을 했는데, 같은 작업장에서 근무하던 동료 이모 씨도 림프구성 백혈병으로 2006년 6월 사망한 것. 디퓨전 공정은 일종의 반도체 세척장으로 많은 화학물질이 사용된다.

이에 황 씨는 지난 6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인정을 요구하며 유족급여를 신청했다. 근로복지공단 평택지사는 지난 8월 산업안전공단에 역학조사를 의뢰했고, 산업안전공단 직업병연구센터는 지난 9월 5일간 역학조사(작업환경측정)를 실시했으며, 현재 역학조사 결과를 분석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황 씨의 얘기를 들은 건강한노동세상, 다산인권센터, 민주노동당 경기도당, 민주노총 경기본부, 삼성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등은 20일 경기도 용인시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공장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를 발족했다.

백혈병 유발 증거는?

이와 관련해 삼성전자 측은 "공장 작업환경과 백혈병 발병 사이에는 관련이 없다"는 입장이다. 언론보도 등에 따르면 해당 공정에는 벤젠과 같이 백혈병을 유발한다고 알려진 화학약품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삼성 측은 작업환경의 안전에 대해 자신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유미 씨가 일했던 디퓨전 공정이 유해한 화학물질에 노출돼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유미 씨가 근무한 디퓨전 공정은 반도체의 원판인 웨이퍼를 불산(HF), 이온화수(DI), 과산화수소, 황산암모늄 등의 혼합액에 담갔다 빼는 작업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의 공유정옥 소장은 "아직까지 문제의 공정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과 백혈병 발병 원인에 대해 밝혀진 적은 없지만, 이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라며 "같은 라인에서 똑같은 일을 하던 2명의 노동자가 비슷한 시기에 백혈병으로 사망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대적인 역학조사의 필요성이 인정된다"고 말했다.

유미 씨의 경우 발병원인에 대해 주치의는 "장기간의 화학물질이 발병에 일정부분 기여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소견을 밝힌 바 있다.

공유정옥 소장은 "반도체 산업의 경우 역사가 짧은데다, 생산기지도 서구에서 아시아 지역으로 이전되고 있기 때문에 생산 공정에서의 인체 유해성 연구가 거의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만 최근 영국 HSE(The Health and Executive)가 발표한 연구는 반도체 공장의 작업 공정이 노동자에게 해롭다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HSE가 2002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영국의 내셔널세미컨덕터(National Semiconductor)의 그리녹(스코틀랜드 서부) 공장의 노동자들 암 발생률을 조사했더니, 여성 노동자의 경우 폐암, 위암, 유방암의 발생률이 2~5배 가량 높고, 남성 노동자의 경우 뇌암 발생률이 4배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비록 이 조사에서 반도체 제작 공정과 백혈병의 관계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HSE는 "이 조사만으로도 노동자들이 심각한 암 발병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더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반도체 공장 유해성 대대적 조사 필요
▲ 황유미 씨에 대한 산재처리 및 반도체 공장 유해물질 노출 여부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촉구하고 있는 대책위 관계자들이 20일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공장 앞에서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프레시안

따라서 대책위는 정부가 대대적인 역학조사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 대책위 관계자는 "반도체 공정에서 근무했던 모든 노동자들에 대해서 역학조사를 실시해야 반도체 공정의 유해성이 규명될 수 있을 것"이라며 "정부는 이에 대한 조사를 실시해야 하고, 삼성도 적극 협조를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대책위는 또 "산재보험법은 노동자 보호가 목적으로, 업무환경과 질병의 발병 관계의 입증 책임은 사측에 있다"며 "근로복지공단에서는 황유미 씨 유족의 산재보험 급여 신청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공장이 '굴뚝 없는 산업'으로 깨끗하게 비춰지고 있지만, 공정에서 사용되는 유해 화학물질을 보면 결코 깨끗한 산업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며 "정밀도와 청결성이 생명인 반도체 공장에는 최고의 클린 설비가 투자되지만, 일부 공정의 유해성 여부에 대한 구체적 조사도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삼성에 노조가 있었더라면..."

한편 황 씨가 분노하게 된 데에는 유족에게 삼성 관계자들이 찾아와 보인 태도도 한 몫 했다는 주장이다. 황 씨의 주장에 따르면 딸이 투병 중이던 때는 김모 차장이 속초로 찾아와 "치료비를 주고 보상을 해주겠으니 좀 기다리라"고 했고 딸이 죽었을 때는 장례식장에 찾아와 "다 해주겠다"고 하더니, 장례가 끝나고 나니 다시 찾아와 "개인적인 질병으로 죽은 것이다. 우리와 관계없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하시라"고 말했다는 것. 황 씨는 "김 차장이 '삼성 상대로 이길 수 있으면 이겨보라'고 말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황 씨는 "삼성에 노조가 있어서 작업장의 유해 환경을 철저하게 감시했다면 유미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며 "삼성이 엄청난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하는데, 이런 돈을 뇌물로 쓰지 말고 직원들을 위해 써야 하는 것 아니냐"고 울분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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