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코메티와 페기 구겐하임, 그들의 삶과 예술

[북 앤 시네마]

내가 아는 어떤 이는 자신의 책장에 꽂혀 있는 '현대예술의 거장' 시리즈(을유문화사)만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고 한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글렌 굴드, 히치콕, 트뤼포, 헬무트 뉴튼, 마일즈 데이비스, 빌 에반스, 피나 바우쉬, 피아졸라, 토스카니니 등 클래식, 영화, 재즈, 사진, 무용 등 20세기를 빛낸 예술가를 깊이 있게 조망한 이 시리즈를 보고 있노라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정도란다. 책을 만들고, 책에 관한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진 내가 보아도 이 시리즈는 부럽기 짝이 없다. 책의 겉과 속을 찬찬히 볼 때마다, '이거 만드는 데 고생 좀 했겠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지만, 세상에 이런 책을 내놓는다는 건 정말 괜찮은 일이다. '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 중 내가 특별히 아끼는 책은 20세기 현대 미술계의 전설적인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의 생애를 다룬 『페기 구겐하임: 모더니즘의 여왕』과 키 크고 빼빼 마른 조각으로 유명한 자코메티의 삶과 예술을 묘사한 『자코메티, 영혼을 빚어낸 손길』이다. 책을 만들기 전 미술기자로 살아온 이력을 숨길 수는 없나 보다.
페기 구겐하임: 모더니즘의 여왕자코메티, 영혼을 빚어낸 손길
페기 구겐하임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립한 솔로몬 구겐하임의 - 그녀가 평생 동안 경쟁해야만 했던 - 조카딸이다. 20세기 현대미술사를 수놓은 유명 작가들의 네트워킹을 따라가다 보면 그녀의 이름을 만날 수밖에 없는, 대표적인 후원가이자 수집가이다. 그녀로 인해 잭슨 폴록과 로버트 머더웰이 우리를 찾아올 수 있었고, 그녀의 열정적인 컬렉션이 있었기에 자코메티, 파울 클레, 몬드리안, 데 키리코, 달리, 막스 에른스트, 이브 탕기 등 당대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2001년 베니스비엔날레를 현장 취재할 때, 그녀가 살았던 집, 즉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을 방문하는 행운을 잡을 수 있었다(그녀는 1946년 전쟁이 끝나자 뉴욕 생활을 정리하고, 베니스에 정착했다. 1948년 자신의 소장품을 베니스비엔날레에 전시했다). 머리 위 천장에 칼더의 작품이 마치 아이들 장난감처럼 떠 있고, 이름만 듣던 거장들의 작품이 집안 곳곳에 그야말로 '아무렇지 않게' 걸려 있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미국 미술계가 활력을 잃었을 것이라는 얘기가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페기 구겐하임: 모더니즘의 여왕』은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메리 V. 디어본의 꼼꼼한 관찰과 고증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문학과 비교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페기 구겐하임의 가족과 친구와의 인터뷰 등 자료 조사에 상당한 시간을 바쳤음을 숨기지 않는다. 무엇보다 저자는 평생을 얼마든지 유유자적할 수 있는, 그렇게 살아도 될 권리를 가진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했다는 사실에 반한 것 같다. 『코코 샤넬』(앙리 지델 지음, 작가정신)을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역시 '평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철저한 자료 조사에 있는 듯하다. 『자코메티, 영혼을 빚어낸 손길』, 앙상한 그의 작품에 살을 붙이다
자코메티 작품 ⓒ프레시안무비

자코메티의 조각 작품을 최근에 본 건, 지난 봄 스위스 아트 기행에서였다. 취리히의 어느 미술관을 찾은 나는 내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그 유명한 자코메티의 조각 작품이 미술관 복도, 그것도 아이들이 뛰어놀고, 많은 사람들이 담배와 커피를 즐기며 담소를 나누는 한복판에 떡 하니 서 있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뻬뻬로'처럼 마른 그의 작품이 넘어지지나 않을까 걱정하던 나와 달리, 그곳의 사람들에게 자코메티의 작품은 거의 친구나 다름없었다. 이 책은 1985년에 출간되었다. 저자(제임스 로드)는 2차 대전 당시 파리에 거주하면서 자코메티와 직접 교류를 가졌다. 자코메티 역시 1920년대 초에 파리에 정착했으니, 제대로 된 전기인 셈이다. 그 시절이 어떤 때던가. 피카소, 마티스, 달리 등 20세기 미술사를 좌지우지한 대가들의 에너지가 유럽에 자욱하던 때가 아니던가. 동시에 제 1, 2차 세계대전의 화약 냄새가 불안과 허무라는 이름으로 유럽 대륙에 내려앉던 때가 아니었던가. 이 책이 자코메티가 초현실주의에 경도되고, 그로부터 다시 벗어나는 과정, 그리고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자신만의 스타일에 이르는 시간을 추적할 뿐만 아니라, 혼돈스런, 그렇기에 자꾸 되돌아보게 되는 20세기 초 유럽의 예술사를 함께 조망한 이유가 십분 이해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시대가 작품을 만든다는 말이 새삼 와 닿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 책이 자코메티의 예술세계에 책의 전부를 할애한 건 아니다. 저자는 그의 여자 관계 등 우리가 미처 몰랐던, 아니 알 수 없었던 그의 삶을 과감히 '공개'하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자코메티, 영혼을 빚어낸 손길』을 읽는다는 것은 삐쩍 마른 자코메티의 조각 작품에 보이지 않는 '살'을 붙여나가는 것과 같다. 물론 책장을 다 덮어도, 삶과 죽음, 존재와 비존재를 고민하던, 아니 고통스러워하던 자코메티라는 한 예술가가 그토록 찾고자 했던 '예술의 진실'은 발견하기 힘들 테지만. (* 이 글을 쓴 윤동희씨는 월간미술, 씨네버스 등에서 미술기자와 영화기자로 활동했으며 최근까지 출판사 안그라픽스에서 미술 및 예술관련 서적을 기획하는 일을 했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