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석 동의대 교수 | 2007-02-06 17:12:00 | 2007-02-06 16: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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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100여 년 전. 배우로 출발해서 극작가로 활동하던 그리피스는 '바이오그래프사'라는 영화사에 몸을 담으면서 5년간 약 500편에 달하는 단편영화를 연출하게 된다. 감독으로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게 된 그는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규모의 영화 <국가의 탄생 (The Birth Of Nation, 1914)>을 연출하게 된다. 상영시간만도 세 시간에 달하는 이 영화는 단숨에 영화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뒤바꾸어 놓을 정도로 압도적인 작품이었다. 하지만 흑인 병사에 대한 부정적 묘사와 더불어 인종사냥을 일삼던 KKK단에 대한 긍정적 묘사 등이 문제가 되면서 영화는 격렬한 논쟁에 휩싸이게 된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그리피스는 이듬해 '편협'이라는 제목을 단 또 하나의 대작 <인톨러런스 (Intolerance, 1916)>를 발표하게 된다. '시대에 걸친 사랑의 투쟁'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인톨러런스>는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에서 벌어진 전쟁,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생애, 16세기 유럽 종교개혁 당시에 일어난 신교도 학살 사건, 그리고 20세기 초 미국 젊은이들의 삶이라는 네 가지 굵직한 에피소드를 교차시키면서 인류의 역사가 얼마나 많은 인톨러런스, 즉 편협함으로 얼룩져있는지를 살피는 영화다.
그로부터 약 100년이 지났을 무렵, <매드 맥스>와 <리썰 웨펀>의 광기 넘치는 형사 멜 깁슨은 예수의 생애를 다룬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The Passion Of The Christ, 2004)>를 연출한다. 예수의 33년에 걸친 생애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히기 직전의 고난의 순간에 초점을 맞춘 이 영화는 예수의 신성(神性)보다는 인성(人性)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종교영화들과는 큰 차이가 있다.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의 채찍질로 피투성이가 된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을 극사실주의적인 기법으로 재현한 이 영화는 그 잔혹성 때문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여기에 음주운전을 단속하던 경찰관에게 취중에 '유대인이 모든 전쟁의 근원'이라고 말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멜 깁슨은 반유대주의자라는 혐의를 받게 된다.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난을 비껴가기 위해 고심하던 멜 깁슨은 고대 마야 문명을 소재로 한 일종의 액션 영화를 기획한다. 정글을 배경으로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는 추격 장면을 중심으로 기획되었던 이 영화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애초의 의도와는 다른 얼굴을 가진 영화로 변화되고 만다. "위대한 문명은 외세에 정복당하기 전에 내부로부터 붕괴되었다"는 윌 듀란트의 문장으로 시작하는 영화 <아포칼립토 (Apocalypto, 2006)>는 멜 깁슨의 전작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와 비슷한 일종의 수난 영화다. 주인공 '표범발'은 자신의 부족과 함께 정글에게 평온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이 평화는 제물을 찾아 정글을 헤매던 마야전사들을 만나면서 깨지게 된다. 포로가 된 표범발은 동료들과 함께 도시로 끌려가고 그곳에서 당시 마야문명의 핵심세력들과 조우하게 된다. 거대한 피라미드 위에서 산제물이 될 운명에 처했던 표범발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 그리고 이때부터 정글 속에서 숨막히는 추격전이 펼쳐진다. '새로운 출발'이라는 의미 외에도 그리스어로 '계시' 혹은 '드러냄'이라는 의미를 가진 제목 그대로 <아포칼립토>는 사라져버린 고대 문명의 최후의 순간을 우리 앞에 재현한다. 마야인들이 건설한 피라미드와 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종교의식, 그리고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잔혹한 살육의 현장이 생생하게 재현된다. 거대한 피라미드 위에서 살아있는 남자의 사지를 묶고 그의 가슴을 열어 심장을 꺼낸 후 목을 치는 마야의 종교의식을 재현한 장면은 이 영화에서 후반부의 숨가쁜 추격 장면보다 더 선명하게 우리 뇌리에 남아있는 장면이다.
인톨러런스 ⓒ프레시안무비
그리피스 역시 <인톨러런스>에서 <아포칼립토>에 못지않은 스펙터클을 만들어낸다. 그가 선택한 것은 바로 고대 바빌론 왕국이었다. 그 높이가 100m에 달했으며 그 위로 전차가 오갈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고 전해지는 바빌론의 성벽과 인간보다 몇 배나 큰 거대한 신상을 생생하게 재현한 이 영화의 백미는 이 장대한 성벽을 사이에 두고 펼쳐지는 전투장면이다. 당시 최첨단의 촬영기법이 총동원된 이 전투장면은 단색조의 영상이라는 사실 외에는 그 규모나 박진감에서 현대의 어떤 영화에 비해서도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리피스가 재현한 위대한 스펙터클보다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인류의 역사를 한 편의 영화 속에 담고자 했던 그의 시도다. 고대로부터 중세, 근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발전과 소멸을 반복해 온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편협'이라는 것이 그리피스의 해석이다.
인톨러런스 ⓒ프레시안무비
멜 깁슨의 <아포칼립토>에서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를 떠올리게 되는 이유는 두 영화가 제작된 배경이 유사하다거나 두 영화가 보여준 인상적인 스펙터클 때문이 아니라, 두 감독이 모두 자신의 영화 속에서 인류와 그들이 구축한 문명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사성은 <아포칼립토>를 멜 깁슨이 이전에 연출한 작품들과 연관지어 생각할 때 더욱 뚜렷해진다. 개별적으로 <아포칼립토>는 비교적 선명한 줄거리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만드는 영화다. 일각에서 제기하는 것처럼 제국주의적 관점이나 인종차별주의적인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며, 또 이 감독의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잔혹함을 근거로 정신병리학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 영화를 (배우가 아닌) 감독 멜 깁슨의 필모그래피 속에서 살펴볼 때 이 영화는 인류와 문명에 대한 고고학적 탐색이라는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스코틀랜드 수난사를 다룬 <브레이브 하트>와 예수의 수난을 그린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그리고 마야문명의 최후를 그린 <아포칼립토>에는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의미를 포착함으로써 인류의 문명사를 재정의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리피스가 한 작품 속에 그 의도를 녹여 넣었다면, 멜 깁슨은 자신의 (감독으로서) 필모그래피 전체를 통해 그것을 행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피스가 인류의 역사가 '편협'의 역사라고 말한다면, 멜 깁슨의 영화는 인류의 역사가 '수난'의 역사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편협'과 '수난'이라는 주제를 통해 이들은 인류는 끊임없이 진보해왔다고 믿는 자들에게 우리는 그저 오류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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