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에 가구 세일즈맨 샘 빅(숀 펜 분)이 있다. 별거중인 아내 마리 빅(나오미 왓츠 분)과의 재결합이 꿈인 그 또한 잘 나가는 세일즈맨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내면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성과를 높이려고 양심까지 파는 위선적인 자기모습에 항상 번민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번민의 고통은 가시지 않고 매니저 잭(잭 톰슨 분)과의 관계 또한 점점 악화된다.
짧은 치마차림으로 카페에서 일하는 마리의 엉덩이가 손님들의 희롱의 대상이 되는 것에 분노하며 '지금 돈에 눈 먼 그들이 우리에게 하는 짓이 보이지 않냐'고 묻지만, 아이들과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그녀의 매몰찬 눈빛과 태도에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샘은 자괴감에 사로잡힌다.
물론 이 참을 수 없는 상황의 기저에는 노동력조차 상품화하는, 그리하여 모든 인간관계를 교환가치에 복속시키려는 자본주의의 완고한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거기에 더해 피부색의 차이는 자동차정비 일을 함께 했던 흑인 동료 보니(돈 치들 분)와의 '인간적 교감'마저 방해하는 견고한 장애이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에 자발적으로, 혹은 비자발적으로 순응하며 '모래알'처럼 흩어져 사는 2억여 명의 삶이 존재한다. 그나마 그들이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는 것은 그 구조의 작동원리를 이해하고 내면화한다면, 이 핏기 없는 구조 속에서도 '캐딜락'을 굴리는 삶을 향유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물론 샘도 그런 꿈을 가지고 있다.
"정치는 소시민들의 상처를 위무하고 있나"
최근 국내에서 개봉한 닐스 뮐러 감독의 <대통령을 죽여라>(원제: The Assassination of Richard Nixon)는 이 믿음이 절망으로 변하며 비상구조차 잃어버리게 된 샘의 일상을 따라 차분히 앵글을 움직여 나가면서 오만과 위선으로 점철된 정치를 신랄하게 고발하고 비판한다.
별거 중인 가족과 재결합해 오손 도손 사는 꿈, 피부색에 관계없이 친구, 형제들과 웃으며 일하고 술 한 잔 기울이며 담소할 수 있는 그런 삶을 그리는 것이 진정 과도한 것인가. 그것을 서부개척시대에 그들 할아버지, 할머니가 꿈꾼 '아메리칸 드림'의 편린으로, 그래서 그 광활한 대지가 거대 자본에 의해 선점된 지금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한낱 '소시민의 꿈'으로 치부할 것인가. 하지만 그 꿈 자체는 '풍요의 땅 미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며 이 세상을 사는 모든 '모래알들'이 지니고 있는 것이기에 결코 사치일 수 없다.
그렇게 정겹고 정직하게 살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정직한 삶, 양심? 그것은 이윤이 지배하는 이 냉혈한 시장의 이치를 모르는 철부지들, 그로부터 도태된 패배자들이 하는 소리이다. 하지만 다른 그 무엇은 속일 수 있어도 자기 자신마저 속일 수는 없기에 그 와중에 크고 작은 상처는 점점 쌓이고 곪아간다.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혹은 그에 순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반복되어 그냥 감각 없는 무딘 살이 되고 만다. 하지만 그 이치를 알지 못하는, 아니 알면서도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샘과 같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살을 에는 칼날이 되어 고통을 주고 결국 그 아픔은 내부로 파고들어 자신의 생기마저 고갈시키는 암세포가 된다.
그것이 진정 고통인 것은 돈, 명예, 지위 등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거기에서 진정 자신이 보듬고 싶었던 사랑, 우정, 형제애 등 '그 어떤 가치들과 관계들'이 파편화되고 허물어져 가는 아픔의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고통에 흐느끼는 것은 '아름다운 희망을 가졌던 과거 그 어느 순간'이 자꾸 아른거리며 발목을 붙잡아 이 위선적이고 구차한 삶과 단절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아니 죽음 자체가 두려워 그렇게 할 수 없는 소심한 자기존재에 대한 연민 때문이다.
이처럼 암울한 샘의 일상은 시작과 함께 흐르는 베토벤의 애잔한 아다지오 선율을 배경으로 잔잔한 파장이 되어 우리의 눈가를 자극하다가 결국 우리 가슴과 하나가 되는데, 그 이유는 우유부단하고 심약한 소시민의 외양을 지닌 숀 펜의 섬세한 내면연기 덕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샘의 존재 상황이 지금 우리를 감싸고 있는 삶의 구조 및 조건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우리가 겪는 이 고통의 근원인 글로벌 신자유주의 출발점이기도 한 바로 그 시기, 70년대 초 위기의 미국사회에 샘의 고통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뮐러 감독은 묻는다. 그렇다면 닉슨대통령, 아니 그것이 상징하는 정치는 이 소박한 꿈을 가진 사람들의 아픔과 상처를 위무하기 위해 과연 무엇을 하고 있으며, 할 수 있는가. 하지만 항시 그렇듯이 그들이 즐겨하는 행태는, 제도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이 투쟁해 자신들과 힘의 균형을 만들거나 압도하지 않는 한, 그 목소리를 무시하고 더욱 외진 곳으로 내몰 뿐이다.
인디언과 흑인 차별에 대한 항의는 경찰 방패와 몽둥이세례의 대상이 되고 급진 흑인인권단체 블랙팬더스(Black Panthers)는 살해되며 노동자의 저항은 파업파괴자들의 음모의 도구가 된다. 제국주의의 거짓과 탐욕의 상징인 베트남전쟁으로 인해 정글은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폭탄에 죽음의 숲이 되어 간다. 샘과 같은 소시민의 삶의 고통은 은행의 이런저런 대출조건을 통과하는데 약간의 도움을 줄 낡은 참고자료로조차 취급되지 않는다.
샘이 어깨를 짓누르는 위선과 공모의 구조가 자신의 정직함을 위협하고 갉아 먹는 것에 대해 번민하고 고통을 느낄 때마다, 대통령 닉슨은 밝은 조명을 받으며 TV에 나와 호소한다.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그 순간 삶은 끝난다고 엄숙하게 말한다.
워터게이트사건에 연루된 닉슨 대통령은 자신의 정직성과 결백을 단호하게 강조하며 정의는 지켜질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제는 다른 남자의 여인이 된 아내와 보고 싶은 아이들, 친구, 형제가 떠나버려 덩그마니 남은 고립감과 외로움에 어두운 방에서 흐느낄 때도, TV에 나온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우아한 차림의 상류 사교계 여인들과 유유자적 스텝을 맞춘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은 위대한 미국에 감사해야 한다'는 말을 남기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 거짓을 합리화하는 오만함과 천박성은 복제돼 세기가 바뀐 지금도 이 사회는 물론 지구 도처를 유령처럼 날아다니며 수많은 '모래알들'을 동일한 색으로 물들이고자 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더 이상 줄 것이 없는 대중이 도대체 무엇에 또 감사해야 하단 말인가. 그것은 국가의 또 다른 동원의지를 상징하는데, 삶에 지친 대중에게 그런 여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에 대중에게 그것은 위안이 아니라 삶에 대한 또 다른 긴장과 압박으로 다가온다.
권력의 위선과 거짓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권력의 눌림으로부터, 그 위선과 거짓으로부터 우리는 언제 벗어날 수 있는가. 샘의 말처럼 "자립은 너무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믿음으로 현실의 고통을 넘고 꿈을 이루 수 있다고 주장하는 권력자의 눈을 정면에서 응시하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그 눈빛의 이면에서 흔들거리는 위선의 그림자를 읽어내지 못한다면, 외견상 너무도 확신에 찬 그 말과 눈빛에 압도되어 우리는 마지막 세포의 생기마저 그들에게 건네주고 말라 죽어가거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그림자 같은 창백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의 정치학'을 떠받치고 있는, '모든 사회에는 각각 지배하고 지배받는 이질적인 두 국민이 존재하며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자연적 질서'라는 철칙을 계속 암송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런데 만일 이런 상황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면, 이제는 행동으로 그것을 끝장내야 한다. 그렇다면 '대통령을 죽이자.' 샘은 비행기를 납치해 백악관에 충돌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우리는 낯익은 이 계획이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다. 그 실패의 징후는 여리고 소심한, 그래서 때로는 격정적으로 폭발하는 샘의 성격에, 탑승구로 이동하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엄마의 손을 잡고 스쳐지나가는 천진한 꼬마를 바라보는 그의 긴 눈길에 이미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것은 설령 그가 '대통령'을 제거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상징하는 바, '위선과 오만의 정치'를 죽이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에 좀 멀게는 9.11테러, 가까이로는 '5.31지방선거와 테러의 추억'이 말해주듯, 오히려 그것은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고, 술자리에서 선정적 안주거리가 될지는 몰라도 저 만치 서서 우리를 조롱하며 대상화하는 그 정치에 더 큰 '광기'를 부여해 주고 그 결과 우리를 더욱 소외시킬 뿐이다.
그렇다면 "믿음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원천"이라고 강변하며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는 그 거짓과 오만의 정치를 어떻게 죽일 수 있을까. 「대통령을 죽여라」는 그것을 위해 거기에 어떤 드라마틱한 반전의 장치도 설치하지 않는다. 긴박감도 잠시 너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죽고 싶지 않다고 호소하는 여성 인질을 놓아주는 순간 경찰 저격수가 쏜 총에 맞아 피범벅이 된, 그 미묘하고 복잡다단한 감정 선이 교차하는 샘의 얼굴을 클로즈업시키는 것으로 그 질문에 답할 뿐이다. 샘은 자기가 왜 이 일을 하게 됐는지 세상에, 권력자들에게 말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스스로에 총구를 겨누어 이 세상과 이별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세상은 그가 왜 그 일을 하게 됐는지 알지 못하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 우리는 처음부터 샘의 독백을 들으며 그의 여리고 지친 뒷모습을 지켜보던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5번 2악장과 바이올린소나타 5번 2악장 아다지오의 애잔한 멜로디가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 시나브로 만들어 놓은 그 어떤 진실의 공명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콧등을 자극하는 이 짠한 경험을 통해 왜 샘이 자신이 이런 일을 하게 된 이유를 녹음하여 생면부지의 뉴욕 필하모닉 지휘자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에게 남기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에게 "음악은 순수하고 진실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에 동화된 우리는 고통스러워하는 샘의 거친 숨소리 속에서 고통 받는 대중에게 의미 있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해준 것 없으면서도 오직 위선과 오만으로 거드름피우는 정치가 함께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서서히 올라가는 엔딩 자막에 보며 조용히 되묻는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이 그토록 역설하는 희망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들의 작은 꿈들은 이제 진정 접어야 하는가.
이 '죽음의 정치'를 어떻게 넘어갈 수 있나
분명 그들이 말한 대로 희망을 잃는 순간 우리는 죽는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과 분리된 주의설적 희망이 아닌, 모순과 갈등으로 점철된 현실의 고통스런 삶을 뚫고 자란 희망인 한에서만 그렇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토록 믿음과 확신에 찬 어조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그들의 희망이 그들 자신의 삶이 아닌 고통스런 대중의 눈물과 땀을 담보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중의 꿈을 숙주로 하여 기생한다. 그래서 그들은 비난의 대상이 될지언정 대중의 삶을 책임지지 않는다. 그들은 그 비난조차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것이라는 '시간게임'에 기대어 즐기고 있을 뿐이다.
바로 그렇기에 그들은 한편으로 천박한 '개성 춤바람 정쟁'을 일으킨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다른 한편 이 민감한 정치정세에서 듣기만 하여도 등골이 오싹한 전쟁이라는 말을 너무도 쉽게 입에 올리고, 아픔의 역사를 지닌 제주의 거리를 핏물로 물들이며 한미FTA협상을 밀어 붙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죽음의 정치'를, 이를 떠받치는 자본의 거대한 힘을 어떻게 넘어 나아갈 수 있는가. 대중의 기쁨과 고통의 숨결이 관철되는 '삶의 정치'를 누가, 어떻게, 무엇을 통해 보듬어 나갈 것인가. 샘은 "한낱 모래알일지라도 바로 그 안에 권력자들을 파괴할 힘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그것은 결국 또 다른 샘을 양산할 뿐이기 때문이다.
모래알들을 하나의 힘으로 모으기 위해서는 시멘트(cement)가 필요하다. 블랙팬더스를 방문했던 샘은 그 리더에게 아이디어 하나를 제안한다. "블랙팬더스는 흑과 백이 어울린 얼룩말(Zebra)이 되어야 한다." 바로 연대(solidarity)다. 그 강도가 어느 정도가 될지 미리 예견할 수는 없지만, 변화를 희구하며 대안을 모색하는 다양한 주체들의 연대를 통하지 않고는 이 세상은 단 한 발자국의 의미 있는 진전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분명하게 다가오는 것은 오직 하나이다. 그 연대를 위해 우리 스스로를 경계 지어 소통을 막고 고립시키는 완고한 장벽들을 너도나도 과감히 허무는 것이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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