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부터 60여 년 동안 언론활동과 저술활동을 펼친 미국 탐사 저널리즘의 대가 I. F. 스톤(I. F. Stone; "Izzy"Ston)의 두툼한 전기 "All Govement Lie"가 나와 주목을 끌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에서 일했던 여성 저널리스트 마이러 맥퍼슨(Myra Mac-Pherson)이 펴낸 이 책의 내용과 서평을 컬럼비아 저널리즘 리뷰(CJR) 2006년 9/10월호에서 간추려 소개한다.
정부의 거짓과 기만을 폭로
19년 전에 숨진 저널리스트 I. F. 스톤이 요즘과 같은 정보화 시대에 다시 언론활동을 펼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60여 년에 걸친 그의 언론 및 저술활동 중에서 가장 눈에 두드러진 것이 20년 가까이 계속한 'I. F. 스톤 위클리' 발행이었는데 인쇄기에서 주간신문이 나오면 직접 우체국으로 싣고 가 수만 명의 구독자에게 2종 우편물로 우송했다. 요즘에는 버튼 한번 누르는 것으로 수많은 독자들에게 기사나 기사 내용을 즉각 전송할 수 있으니, 아날로그 방식에 푹 젖어있는 스톤으로서는 이런 디지털 방식이 다소 거북했을지도 모른다.
맥퍼슨이 펴낸 스톤의 전기는 숨김이나 거짓이 없다. 이처럼 공정하고 정직한 전기는 그 자체가 역사가 된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는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고 이런 교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맥퍼슨의 이 전기는 제목 그대로 '정부의 거짓'을 되새겨본다는 의미에서 시의성도 있다. 미국이 이라크 침공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대량살상무기 개발 주장이 허위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문제는 당시 미국 정부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일선기자건 편집간부건 그 누구도 의혹의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걸프전쟁 이후 이라크가 거의 무장해제 당하다시피 해 간신히 자위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무기밖에 없었다는 정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언론이 아무런 의심 없이 부시 행정부의 그런 거짓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스톤은 이들 저널리스트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사람이었다. 맥퍼슨이 이 전기에서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묘사한 것처럼 스톤은 정부의 거짓과 기만을 폭로했다. 또 협박으로 비판세력에 재갈을 물리려는 정부의 시도를 공격하는 것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 때문에 스톤의 오랜 저널리스트 생활이 중심 내용이 된 이 전기는 한 개인의 삶의 궤적을 좇은 기록으로 끝나지 않고 20세기 중 상당 기간에 걸친 정부의 여론조작 기도를 세밀하게 파헤친 기록이 되기도 한다. 그동안 주류언론은 정부의 이 같은 여론조작 기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거나 대응할 생각을 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스톤 같은 말썽꾸러기가 민주주의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 까닭이 거기에 있다.
공부보다 신문이 더 좋아
I. F. 스톤은 1907년 이사도르 파인슈타인(Isador Feinstein)이란 이름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인이었지만 탈영한 뒤 미국으로 이주한 유태인으로서 뉴저지주 해돈필드에서 판매점을 운영했다. 어머니도 우크라이나 흑해변 항구도시인 오데사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이었다. 스톤은 어릴 때부터 신문에 관심이 많았다. 이미 고등학교 2학년 때 고향인 해돈필드에서 '프로그레스(Progress)'란 신문을 직접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그 뒤 '해돈필드 프레스(Haddonfield Press)'와 '캠든 쿠리어-포스트(Camden Courier-Post)'에서 일하기도 했다. 펜실베이니아대 철학과에 들어간 스톤은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Philadelphia Enquirer)'에서 근무하기 위해 중퇴했다. 대학 공부보다는 신문사에서 일하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스톤은 40여 년 동안 잠시도 언론계를 떠난 일이 없었다.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에 이어 '뉴욕 포스트(New York Post)' '네이션(The Nation)' 'PM' 'I. F. 스톤 위클리(I. F. Stone Weekly)'로 이어지는 그의 언론활동은 건강이 안 좋아 결국 1971년에 끝났지만 이후에도 넓은 의미의 언론인 저술활동은 1987년 숨을 거둘 때까지 이어졌다. 그는 처음부터 시력이 굉장히 안 좋았을 뿐만 아니라 청력도 시원찮았다. 취재 현장을 누비고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일선기자로서는 심각한 핸디캡이었다. 이런 핸디캡 외에도 그에겐 또 다른 장애가 있었다. 과격하고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접근하려 하지 않았다.
급진성으로 취재원 잃어
스톤의 이 같은 급진주의 성향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스톤 자신이 젊은 시절의 사상 편력을 거의 밝히지도, 기술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맥퍼슨은 제정 러시아의 유태인 박해 속에서 그의 급진주의의 뿌리를 찾는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많은 개혁가와 부정폭로자들이 등장한 점도 그런 급진주의를 키우는 토양 구실을 했다. 그러나 스톤은 급진적 성향 때문에 뉴딜이 끝난 이후에는 워싱턴의 고위급 소스를 완전히 잃다시피 했다. 급진성 때문에 FBI가 그를 정밀 감시대상 리스트에 올려놓으면서 고위 관리들이 접근조차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관리들은 그와 만나 무슨 이야기라도 나누면 그것으로 공직생활은 끝장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톤이 이런 상황에 주눅이 들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통찰력이 뛰어나 거의 모든 취재원이 끊어지다시피 한 상황을 어려운 처지가 아닌, 오히려 잘 된 일로 생각했다. 이와 관련해 그는 언젠가 이런 속내를 드러냈다. "주류언론 기자들은 분명 내가 모르는 것을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알고 있는 것은 대부분 사실이 아니다." 여기서도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정부의 거짓'이 은근히 강조된다. 모든 정부는 예외 없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 그의 변함없는 믿음이다. 정부의 거짓은 곧 공직자들의 거짓말로 이어진다. 따라서 주류언론 저널리스트들의 취재원 구실을 하는 고위관리의 말은 거짓투성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스톤은 행정부나 의회가 내놓는 온갖 자료나 문건이 모두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때문에 그는 의회 청문회 기록과 특히 행정부 각 부처의 갖가지 보고서를 부지런히 수집해 열심히 검토하고 분석했다. 그는 관료조직 속 어딘가에는 항상, 실상의 전모나 일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의 전모나 일부를 문서나 보고서 형태로 드러내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런 사실의 전모를 밝힌 문서를 찾아내거나 사실의 단편들을 짜깁기해 실체를 찾아내는 일이다.
스톤은 이런 일에 적격이었다. "그는 집에 틀어박혀 수집한 모든 문건을 정독했다. 그가 인용하는 보고서는, 사람들이 그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기관이 내놓은 것이었다. 그는 이런 보고서를 수없이 모아 검토하고 분석해 흥미 있는 사실을 뽑아냈다."
스톤이 공직자들을 경계하는 태도는 유별났다. 드물지만 존경하는 공직자가 있을 경우에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정부가 밝히는 내용이 전적으로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는 정부가 내놓은 공문서나 보고서를 통해 정부의 공표 내용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였다. 이쯤 되면 정부라도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된다. 송곳처럼 깊숙이 파고드는 스톤을 그 어느 공직자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블로거들의 정직한 선구자
그는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PM, 네이션, 뉴욕 포스트에 이어 1952년부터 I. F. 스톤 위클리를 만들어 18년 동안 이끌어나갔다. 그는 이 위클리를 자신의 집에서 편집하고 발행했다. 맥퍼슨은 당시 그가 꽤 외로운 처지였다고 전한다. 전화벨도 거의 울리지 않았고 많은 주류언론 기자들은 그를 "성가셔서 피하고 싶은 대상"쯤으로 생각했다. 그런 속에서 스톤은 위클리의 독자를 늘려나갔다. 독자는 대부분 앞서 폐간된 좌파 간행물의 구독자이기 때문에 독자층의 이념적 동질성은 두드러졌다. 발행인과 편집인을 겸하고 있는 스톤의 이념적 성향도 독자층과 다르지 않았다. 사실 매카시즘이나 냉전상황, 베트남문제, 민권문제와 관련해 스톤과 생각이 다른 독자가 있다면 그들은 스톤을 감시하기 위해 배치된 FBI 요원 정도일 것이다.
스톤은 이 위클리에 탁월한 심층탐사물을 많이 실었지만 그의 목소리가 가장 컸던 것은 논설과 칼럼, 에세이였다. 당시 데이비드 레빈이 그린 유명한 스톤의 캐리커처를 보면 특유의 도수 높은 안경을 쓴 그가 삽을 어깨에 멘 채 의사당의 돔을 열어젖히고 그 안에 든 뱀과 돈다발, 오물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정작 스톤은 이런 캐리커처에 묘사된 내용과는 달리, 자유로운 사회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저널리스트가 진짜 해야 할 일은 이런 부정이나 캐내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보다는 국가와 국민, 시대가 복잡하게 뒤엉켜있는 상황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거드는 것이 진정한 역할이라고 지적했다.
오늘날 몇몇 사람들은 스톤을 정직한 블로거의 선구자로 본다. 그러나 그가 활동할 당시에는 톰 페인(Tom Paine)류의 팸플릿 저자로 비쳐지는 일이 많았다. 두 가지 모습 중 어느 쪽으로 비쳐지건 간에 인습을 타파하는 독불장군 식으로 행동했고 때로는 "독실한 유태인 무신론자"나 "집단적 행위를 혐오하는 사회주의자"라는 모순된 행태를 드러냈다. 그는 한때 실제로 사회당의 당원이 되었다. 그러나 "언론인이 어떤 정당에 너무 밀착되면 독립성을 잃는다고 굳게 믿기 때문에" 사회당에서 탈당했다. 그렇다고 해서 스톤이 시대적 상황으로부터 초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언론인이 시대의 큰 조류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톤은 시대의 큰 흐름을 따른다는 것은 파시즘에 반대하고 (그는 파인슈타인이란 유태인식 이름을 바이라인으로 붙일 경우 파시즘에 대한 자신의 비판이 곡해될 것을 걱정해 이름을 바꿨다고 밝혔다.) 민권 증진에 헌신하며 이스라엘 건국을 지원하고 (나중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처리문제를 걱정했다.) 또 조지프 매카시와 후버의 FBI, 하원 비애국활동 조사위원회가 시민들을 갖가지 형태로 괴롭히고 협박하는 행태를 공격하는 것이다. 그는 매카시나 FBI, 하원 비애국활동 조사위원회를 아메리카코사크로 생각했다. 그는 또 의회의 통킹만 결의를 초기부터 기만행위라고 비판했고 베트남전쟁 전반도 신랄하게 비난했다. "농업국가에서 지주 편을 들면서 어떻게 전쟁을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스탈린 강제노동수용소의 참상과 공포에 대해서는 서둘러 비판하지 않았다. 심지어 스탈린이 숨진 뒤에도 그를 "위대한 인물" 또는 "위대한 지도자"로 계속 지칭했다.
개성과 투철한 저널리즘 정신 돋보여
스톤의 위클리가 높은 평가를 받고 발행인겸 편집인인 그의 독특한 개성과 철두철미한 저널리즘 정신이 주목을 받으면서 'I. F. 스톤의 위클리'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다. 만년의 일이지만 이 다큐멘터리가 개봉되면서 스톤은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젊은 저널리스트들은 슬기로우며 재치 있고 묘한 매력을 풍기는 스톤이야말로 많은 감화를 줄 수 있는 인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스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재치나 유머, 매력 따위와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맥퍼슨의 이 책에 묘사된 스톤의 면모는 과거의 모습과는 판이했다. 그는 우선 용감했다. 1972년 숨을 거둘 때까지 반세기 가까이 FBI국장으로 재직하면서 막강한 권세를 부렸던 J. 에드거 후버와 스톤이 맞섰기 때문이다. 그는 강철 같은 의지와 냉철한 판단력을 지녔고 자신에게 엄격하기 그지없는 생활 태도를 보였다. 그렇다고 그가 경직된 사고방식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독불장군이나 이단자 구실을 하기 위해서 굳이 수도승이나 순교자가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특이한 개성과 또 저널리스트로서의 올곧은 자세와 탁월한 능력 때문에 그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가 발행한 위클리의 구독자 수는 얼마 안 되었지만 그의 수많은 분석기사와 논평은 전국적 이슈에 리버럴한 시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스톤은 공산당에 입당한 적은 없지만 그에 "동조"했다고 밝혔다. 1930~40년대까지도 스탈린 통치를 적극적으로 비판하지 않았지만 1956년 이후에는 러시아 공산주의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맥퍼슨은 스톤과 공산당, 스톤과 러시아와의 관계를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했다. 스톤이 1989년 숨진 이후 그가 2차대전 중 러시아 첩자 노릇을 했다는 비난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을 펼친 사람들이 내세운 근거는 빈약하고 모호했다. 1944년에 작성된 두건의 비망록에 'I'라는 약호로만 표기된 어느 미국 저널리스트와 만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스톤을 비방하는 내용이 블로그계에서 계속 떠돌아다니고 로버트 노박(Robert Novak)이나 앤 쿨터(Ann Coulter) 같은 사람들이 이를 이용하자 맥퍼슨은 스톤을 끊임없이 감시했던 FBI의 사찰 기록을 근거로 이를 반박했다. 그러나 5,000쪽에 달하는 FBI의 스톤 파일에 별다른 내용은 없었지만 그가 러시아의 스파이가 아님은 분명하다는 결론은 찾을 수 있었다. 첩자 노릇을 한다고 보기에는 그의 대인 접촉이 너무 훤히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맥퍼슨은 스톤이야말로 미국 민주주의와 자유로운 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보물 같은 존재라고 주장한다. 이런 기여는 미국 역사 속에서 어지간한 전공을 쌓은 장군들에 못지않다는 것이 맥퍼슨의 주장이다. 현실화 될 리야 없겠지만 만약 스톤의 동상을 세운다면 공문서 인쇄를 전담하는 기관인 미정부인쇄국 앞에 세우는 것이 제격일 것이다. 여기서 인쇄· 배포된 수많은 공문서와 보고서에서 상당수의 특종을 뽑아냈던 스톤은 아마 이 동상 속에서도 확대경을 든 채 실려 나오는 갖가지 인쇄물을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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