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후보가 스스로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로 내세운 정계개편론. 이건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할 '전가의 보도'가 될 것인가, 아니면 노 후보를 낙마시킬 '덫'이 될 것인가.
아직까지 그의 정계개편론에 공개적으로 호응을 표하는 세력은 거의 없다. 오히려 비난과 비판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다. 반응이 싸늘하다.
노 후보 정계개편론의 내용, 이에 대한 정가의 반응을 살펴보자.
***노무현 정계개편론 "민주ㆍ개혁ㆍ통합세력 결집"**
노 후보는 지난 24일 "정계개편론은 지난 10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가 시작"이라고 밝혔다. 10월 4일자로 게재된 당시 인터뷰를 다시 보자.
기자는 당시 정가에 떠돌던 정계개편론들의 가능성을 물었다. '개혁신당론', '신3김연합론', '영남신당론' 등이었다. 이에 대해 노 후보는 "가능성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래서 "그럼 다음 선거는 민주당, 한나라당 양당 구조로 치러지는 것인가"라고 묻자 노무현식 정계개편론이 등장했다.
노무현 : 내가 민주당의 후보가 되면 국민들에게 정계재개편을 제안할 생각이다. 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 대 반민주의 여야구도가 호남 대 비호남의 지역구도로 확실하게 고착됐다. 이것을 다시 되돌려야 한다. 그러나 복원해야 한다고 해서 과거의 민주세력만 복원해서 되는 것은 아니고 민주세력과 개혁세력들을 모으고, 통합의 정치를 이뤄 나가야 한다고 결단하는 사람들이 함께 나와서 민주당이 중심이 되든, 또는 중심을 어떻게 새롭게 건설하든 말하자면 민주와 개혁의 통합 정당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프레시안 : 이 제안을 국민들에게 하겠다는 말씀인데 후보로서의 공약이라는 말이냐.
노무현 : 그렇다. 내가 후보로 됐을 때다.
프레시안 : 그런 재결집의 중심은 그럼 민주당 후보 노무현인가.
노무현 : 그렇다. 노무현이 중심이다.
이 인터뷰기사에 드러나는 노무현식 정계개편 구상은 분명하다. "내가 후보가 되면, 내가 중심이 되어서 민주세력, 개혁세력, 통합을 추구하는 세력이 총결집, 민주와 개혁의 통합정당을 만들자고 국민 앞에 공약으로 공개 제안하겠다"는 것이다.
최근 노 후보의 말을 통해 여기에 살이 덧붙여졌다.
"민주당이 깨지는 정계개편이 아니라 한나라당이 깨지는 정계개편을 생각하고 있다."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공개제안하고 접촉에 나설 것이다." "후보가 되면 YS를 찾아가겠다."
이러한 언급에서 정계개편의 대상이 구체화됐다. 1차적으로 한나라당의 개혁 성향 의원들, 과거 민주계 의원들을 민주당에 영입하겠다는 것이다.
"후보가 되고 당내 합의가 이뤄지면 당 중진들과 함께 공개 제안하겠다." "후보결정-정계개편-대선승리-중대선거구제 도입의 순서를 통해 지역구도를 극복할 것이다."
이 말에서 수순이 드러난다. 후보 확정-민주당내 공론화-당내 합의-공개 제안-한나라당 의원 및 외부인사 영입-신당 창당-대선승리-선거구제 개편. 노 후보가 구상하는 대략적인 순서다.
***한나라당, 'DJ 정권연장 음모', '노무현은 DJ 장학생'**
노 후보는 이러한 자신의 정계개편 소신을 연일 피력하며 점점 더 구체화시켜 가고 있다. 하지만 정가의 반응은 아직 냉랭하다.
'한나라당이 깨지는 정계개편'이란 언급이 튀어나오자 한나라당은 노 후보를 향해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음모에 의해 후보 옹립이 추진되는 노 고문은 후보를 사퇴해야" 이상득 사무총장. "비열하게 한나라당을 부숴서 제2의 DJ정권을 창출하려 한다면 분연히 맞설 것" 이재오 총무. "임기중 각종 정책실패와 친인척 비리게이트 등을 감추기 위해 정계개편을 추진하고 정권연장을 시도한다면 국민이 용서치 않을 것" 이강두 정책위의장. 당 3역이 모두 나섰다.
한마디로 한나라당은 노 후보의 정계개편을 'DJ의 정권연장을 위한 한나라당 깨기'로 규정했다. 그리고 노 후보를 'DJ 모범생', 'DJ 장학생'으로 못박았다.
노 후보가 기대하는 한나라당내 개혁파들은 아직 아무런 대꾸가 없다. 이 총재의 '총재직 사퇴' 카드가 나온 이후 당의 단합을 위해 앞장서 노력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 '소 닭 보듯' 하는 태도다.
***자민련, '경륜 없는 급진 소수세력'으로 규정**
자민련은 보혁구도론의 시각에서 접근했다. 우선 JP가 나섰다.
JP는 26일 "우리 정치구도는 보수와 혁신을 기본구도로 재편돼야 한다"며 노 후보 정계개편을 보혁구도 쪽으로 평가했다. 이에 대해 노 후보 측이 '색깔론' 공세라며 비판하고 나서자 "노 고문이 진보나 혁신의 대부가 되느냐"며 "세상의 진운을 좀 더 배우라고 하라"고 비아냥댔다.
자민련 정진석 대변인은 한층 구체적으로 "노 고문의 정계개편이 진보세력 중심의 민주당 재편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며 "이제 와서 자신들이 '급진소수 세력'으로 몰리지 않기 위해 말을 바꾸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말투나 용어선택 자체가 다분히 충동적이고 급진적이며 웃어른에 대한 예의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며 '인신공격'도 가했다.
한마디로 '경륜 없는 소수 급진 진보세력의 주장' 쯤으로 치부한 것이다.
***이인제 경선불복의 빌미 될 수도**
민주당 내에서도 아직은 비판 목소리가 높다.
이인제 후보는 '경선 계속'을 선언한 27일 "인위적인 정계개편은 좋지 않은 것"이라며 "자기 노선에 맞게 새로운 정당구도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있어서도 안된다"고 비판했다.
또 "어느 후보가 이제 곧 새로운 집단지도체제가 출범하는 마당에 후보직을 내놓고 정계개편하겠다고 했다. 일개 후보의 자격으로서 그러한 구상을 공개적으로 할 수 있는가. 그 배후엔 어떤 큰 움직임이 있는 것 아닌가"라며 '음모론'과 연계시킨 공세도 계속 폈다.
28일에는 한걸음 더 나갔다.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 "노 고문이 후보가 되는 순간 정계개편을 하겠다고 하는데, 그리 되면 새 판이 짜이는 것이고, 나는 거기 반대한다. 함께 할 수 없다"고까지 말했다.
정계개편을 빌미로 경선결과에 불복할 수도 있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이렇게 되면 노 후보의 구상과 정반대로 민주당이 쪼개지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
***김근태, "노 후보는 기분파"**
소장개혁파인 정동영 후보 역시 27일 경남지역 TV토론에서 "야당에 이용당하는 것은 경계해야 하며 노 후보의 이런 고집은 꺾는 게 좋다"면서 "국민경선을 어떻게든 분산하지 않고 잘 가꿔 가는 것이 중요한데 공연히 분란만 일으키는 것으로 이 시점에서 증폭시키는 것은 누군가에게 악용당할 소지가 있다"고 경계의 뜻을 표했다.
역시 개혁파인 김근태 의원도 "내가 말해 온 '신민주대연합론'과 같은 맥락으로, 방향은 옳으나 실현되기 쉽지 않을 것"이라며 "한나라당 의원들이 '배신했다'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당을 옮기긴 쉽지 않고 민주화세력을 끌어모으는 것도 어려운 문제"라고 정계개편론의 현실화 가능성에 우려를 표했다. 심지어 노 후보에 대해 '기분파'라는 지적까지 했다.
노무현식 정계개편론의 우군이자 동력이어야 할 당내 개혁파들마저 아직은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김윤환 대표의 '편들기' 득보다 실 클 수도**
이처럼 당 안팎에서 정계개편론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다만 한 곳 민국당 김윤환 대표만이 편들고 나섰다.
김 대표는 27일 "노 고문이 민주당 대선후보로 부상함에 따라 박근혜 의원의 영남후보로서의 명분이 없어졌다"면서 "노 고문으로 영남권 후보가 단일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 "민주당 후보만으로는 정권 창출이 힘든 만큼 민주화세력과 개혁세력의 통합, 그리고 지역통합을 통해 힘을 결집해야 한다"며 "한나라당 내에서도 정계개편에 동참할 사람이 있을 것이고 구 민주계가 그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논리적으론 김 대표의 이 주장이 노 고문의 정계개편론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 듯 보인다. 민주-개혁-지역통합의 논리, 한나라당 민주계를 향한 구상 등이 거의 흡사하다.
하지만 노 후보가 이러한 김 대표의 '편들기'를 반가워 할지는 미지수다. 노 후보의 정계개편 구상에 있어서 김 대표가 1차 대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또 김 대표의 이러한 '편들기'는 지난해부터 정가에 떠돌던 '박지원-김윤환 커넥션의 정계개편설'과 맞물리면서 한나라당 역공의 빌미만 제공해 주고 말 가능성도 크다.
아무도 호응하지 않는 상황에서 유독 편들어 주는 것은 좋으나, 사실 따지고 보면 득보다 실이 더 많은 '편들기'가 될 우려가 다분하다.
***YS, 노무현에겐 '립 서비스', '거래'는 이 총재와**
노 고문이 후보가 되면 찾아가겠다고 말한 YS 쪽은 어떠한가.
YS의 대변인격인 박종웅 의원은 노풍이 한참 몰아친 지난 21일 "YS는 최근의 구도변화를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 YS와 노 고문은 각별한 인연이 있다. 노 고문도 YS가 고려하고 있는 대상 후보군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며 호의적 태도를 밝힌 바 있다.
노무현 후보가 듣기 좋은 얘기들이다. 하지만 실제 상황전개는 노 고문 구상과 달리 돌아가는 흔적이 역력하다.
합의추대를 요구하며 경남지사 후보경선 불참 뜻을 밝힌 김혁규 경남지사의 출판기념회에 이회창 총재가 직접 참석, '달래기'에 나섰다. 문희갑 대구시장의 비자금 파문 이후 김용태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한나라당에 입당하며 대구시장 후보신청서를 냈다.
김혁규 지사는 YS의 오랜 측근이다. 김용태씨는 YS 임기말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다.
YS가 노 후보 측에는 '립 서비스'만 해 주고 정작 실제 '거래'는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와 하는 모양새다. '립 서비스'는 '거래'를 위한 위장전술로 읽힌다.
***정계개편론, 노무현의 '칼'인가 '덫'인가**
노무현 후보의 정계개편론. 그의 구상이 옳은지 그른지를 떠나서 지금까지 정치권의 반응은 신통치 않다. 정계개편이 현실화될 가능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정계개편은 혼자서 못한다. 맞장구가 있어야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허공을 향한 메아리 없는 외침인 듯 보인다. 아니 오히려 강한 역풍을 자초하고 있는 중이다. 노 후보의 발언이 한번씩 거듭되고, 그래서 정계개편론의 내용이 구체화되면 될수록 그를 향한 역풍도 거세지고 있다.
아직 후보로 확정되기 이전 단계이어서인가. 노 고문의 말대로 그가 후보로 확정되고, 당내 합의를 거치면 상황이 달라질 것인가.
예단은 금물이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이미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 '현실의 벽'을 뚫고 노무현의 구상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려면 벽을 뚫을 힘이 있어야 한다. 노 후보에게 그런 힘이 있는지, 후보로 확정되면 그런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인지, 이제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랐다. 노 후보가 스스로 책임져야 할 몫이다.
정계개편론이 노무현에게 '칼'일지 '덫'일지가 대선정국 최대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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