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 시절의 추석

추석은 그 전날 객지에 나가 공부를 하거나 직장을 갖고 있던 당숙들이 돌아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내(堂內)의 대여섯 집이 담을 맞대고 살고 있었는데 객지에서 추석을 쇠기 위해 온 당숙들은 자기 집에 짐을 던져 놓기가 바쁘게 사촌 집들을 찾아 인사를 하기 마련이었다.

몇째 집 누가 왔다 하는 소식은 담을 넘어 돌았고, 우리 집에 소식이 넘어 오면 어머니는 새로 송편을 찌고 술상을 차렸다. 인사 온 조카나 사촌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잡아두려고 먹을 것을 권하며 이 얘기 저 얘기로 자리를 끌던 할머니와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내가 추석과 함께 가장 먼저 떠올리는 광경이기도 하다.

당숙들은 시골에서는 듣기 어려운 소식들을 가지고 오곤 했는데, 내가 추석을 기다리는 것은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어떻고 여운형이 어떻고 김구가 어떻고 하는 얘기들을 그들로부터 듣는 재미 때문이기도 했다.

일본까지 가서 공부하고 돌아온 아들을 전쟁통에 잃은 키가 껑충하니 큰 셋째 할머니가 달이 동산에 한 말이나 떠오르도록 마을 앞 느티나무께를 서성거리던 모습도 잊혀지지 않는다. 할머니는 마루에서 그것을 내다보면서 “나나 저 형님이나 송편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를 않지” 하고 한숨을 내쉬곤 했다. 할머니 역시 젊은 아들을 비명에 보낸 것이다.

다례도 큰집서부터 차례로 지내, 막내 할아버지네까지 끝나면 늦은 새참 때가 다 되어 있었다. 할아버지들이 모두 일찍 작고한 탓에 다례는 시종 큰 당숙이 주재했는데, 다례가 한 차례씩 끝날 때마다 벌어지는 간단한 음복자리는 늘 격렬한 시사 토론자리가 되곤 했다.

특히 뒤에 면장을 지낸 당숙과 학교 교사로 있는 당숙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 곧잘 언성을 높여, 해방 이전에는 막무가내로 상투를 자르지 않고 버티다가 해방이 되던 날 이제 내 손으로라면 자르겠다며 잘라버릴 정도로 옹고집인 큰 당숙조차 “제 생각만 옳다고 하니까 얘기가 안 되잖아, 이제 그만해 둬” 하고 손을 들게 했다.

다례가 끝날 때쯤이면 당숙들은 얼큰히 취했다. 이렇게 취해서 증조할아버지 할머니와 여러 할아버지의 산소를 함께 도는 것이었다. 산소로 가는 들길 산길에는 노란 들국화와 자줏빛 쑥부쟁이가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추석이라는 말에서 내가 들국화와 쑥부쟁이를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성묘길 탓이다.

더 어렸을 때의 추석은 달맞이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당숙모, 고모, 당고모들은 추석날 저녁이면 큰댁에는 어려워 못가고 대개 우리집에들 모였다. 드물게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합류하기도 하는 이 자리에, 당연히 우리 아이들도 어머니들을 따라 모였다.

안사랑 앞에는 사철나무, 앵두나무, 단풍나무 등으로 빽빽한 작은 꽃밭이 있고 그 앞으로 우물이 있었는데, 마루에 서면 우물과 일직선으로 선 동산에 떠오르는 달이 환하게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 당숙모들, 고모, 당고모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몰려서서는 “와!” 하고 탄성을 올리고, 쟁반 같다느니 맷방석만큼 크다느니 하고 제각각 떠들어 댔다.

그 가을에 시집을 가게 되어 있던 고모가, 이제 저렇게 밝고 큰 달은 볼 수 없을 것이라면서 펑펑 울던 일도 생각난다. 어머니와 당숙모들은 둥글게 원을 그리고 둘러앉아 ‘수건 돌림’ 같은 놀이도 했다. 제 뒤에 수건이 몰래 떨어진 것을 모르면 술래가 되는 놀이에는 술래가 되면 노래도 한 마디씩 하는 벌칙 규정이 있었다.

신식 공부를 했고 고교 교사 경력도 가지고 있는 당숙모 한 분은 ‘스텐까라친’ 같은 러시아 민요를 곧잘 불러, 나는 그 당숙모가 늘 술래가 되기를 바랐다. 과연 그 당숙모는 가장 자주 일어서서 노래를 불렀고, 다른 당숙모들은 노래가 하고 싶으니까 일부러 져주는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수건 돌림에 싫증이 나면 ‘말꼬리 따기’ 같은 놀이도 하고 송편과 햇과일에 집에서 담근 술도 곁들여 밤참들을 먹는 것이 있는데, 밤이 이슥해서 할머니가 이제 그만들 가서 자라는 재촉이 서너 번 있은 뒤에야 자리를 파했다. 우리 아이들도 졸린 눈을 비벼가며 끝까지 자리를 지켰음은 말할 것도 없다.

큰 댁 행랑채 아랫방은 상머슴이 쓰고 윗방은 아기 머슴 차지로, 조금 더 커서는 나는 추석날 밤을 대체로 여기서 보냈던 것 같다. 냇가에 나가 달 구경을 한 다음 이곳으로 몰려가는 우리들의 주머니에는 다식이며 과자며 과일이며 곶감 따위가 불룩하게 들어 있었다. 아이들이라 해도 나이층이 많아 우리 같은 코흘리개로부터 총각 티 나는 큰 아이들까지 있어, 큰 아이들은 우리 주머니에 먹을 것이 많이 들어 있으면 무척 좋아했다.

큰 아이들은 곶감이며 다식 따위를 안주해서 막걸리를 마시고 우리들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담배 마는 법을 가르쳤다. 할머니나 어머니는 내가 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마땅찮아 했으나, 나는 이들을 통해 어른의 세계를 훔쳐보는 것이 여간만 재미 있지 않았다.

어느 선생이 어느 여선생과 어떤 사이고, 기름틀집 딸이 왜 소박맞아 왔으며, 정미소 주인이 어떻게 새 소실을 앉혔는가 등 이들은 모르는 것이 없었다. 나도 이들처럼 어서 어른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어 쓴 술을 입에 대보기도 하고 담배를 뻐끔거리기도 했는데, 이곳이 추석과 함께 떠오르는 것은 이날만은 이곳에서의 탈선이 어느 정도 용인되었기 때문이다.

큰아이들이 막걸리에 취해 마구 떠들면 아랫방에 모여 장기를 두거나 화투 패를 떼던 어른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주었고, 밤이 깊으면 큰당숙모가 “우리 보배덩어리 내년엔 장가 보내줘야지” 하는 덕담과 함께 정식으로 술상을 차려 들여놓아 주었다.

나는 할머니가 찾으러 와서야 자리를 뜨는 것이 보통이었다. 내가 밤이면 혼자서는 소변도 보러가지 못하는 겁쟁이였기 때문이다. 할머니를 따라 방을 나오면 마당은 은가루를 뿌린 것처럼 하얗고, 하늘 한복판에 박처럼 희고 큰 달이 걸려 있었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