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드러난 한국언론의 '줄서기'

李 후보 핵심 개혁법안 거부는 빼고 '개혁이미지'만 강조

"화난 이회창 '의원 일 안 한다'/ 예산안 철저 심의·정치개혁법안 처리 등 촉구"(매일경제)
"李후보 '정치개혁법안 회기 내 처리'/ 黨 선거전략회의에 요청"(조선일보)

8일 일부 일간지의 보도 내용이다.

***이회창 후보의 말 바꾸기**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지난 7일 선거전략회의에서 부패방지법, 인권위법,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 국회법 등 4개 정치개혁법의 연내 통과를 지시했다.

그러나 시민단체 등에서 그동안 줄기차게 연내 입법을 요구해왔고 사실상 정치개혁법안의 알맹이라고 할 수 있는 공직자윤리법, 자금세탁방지법, 정치자금법, 선거법, 검찰청법, 형사소송법 등에 대해선 "여야간 견해차가 크고 시민단체 요구도 다른 만큼 당장은 어렵다"며 다음 회기로 넘기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더욱이 이회창 후보는 수차례 이들 법안의 연내 입법을 약속했었다.
이 후보는 지난 10월 17일 3백여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2002 대선유권자연대' 대표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반부패 법안 중 현재 국회 상임위에 계류되어 있거나 심의중인 법안을 이번 정기국회 회기 내에 처리하겠다"고 약속했었다. 또 지난 10월 19일과 25일 TV토론에서 반부패 법안의 연내 통과와 대선자금 공개를 주요 내용으로 대선유권자연대에서 제시한 '국민과의 약속문'에 서명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따라서 이 후보가 선거전략회의에서 밝힌 입장은 그간 자신이 해온 약속을 뒤집는 발언이다. 겉으론 '반부패·개혁'을 촉구하는 것으로 비춰질진 모르지만 실상은 '반부패·개혁'에서 뒷걸음질친 셈이다.

***'수상한 보도'의 압권, 매일경제 보도**

그러나 8일 매일경제,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은 이회창 후보의 이날 발언을 정치개혁법안 개정을 촉구하는 '개혁적' 목소리로 부각시켰다. 부패방지법 등 4개 법안의 연내 통과를 촉구했다는 내용만 보도하고, 다른 법안에 대해선 연내 통과를 거부했다는 사실은 쏙 뺐다. 대다수 다른 신문들의 보도태도도 뒷전으로 발을 빼기란 마찬가지였다.

이날 '수상한 보도'의 압권은 매일경제였다.

매경은 6면 상단에 이 후보 발언 관련 기사를 싣고 "화난 이회창 '의원 일 안 한다'/ 예산안 철저 심의·정치개혁법안 처리 등 촉구"라고 제목을 뽑았다.

매경은 이 후보가 부친상 이후 일주일만에 선거전략회의를 주재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집권 말기 무기력증에 빠지고 민주당이 내부 혼란을 겪는 사이에 원내 제1당인 한나라당마저 나타해지면 안된다는 질책" 차원에서 이 후보의 발언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이 후보의 정치개혁법 관련 발언에 대해 매경은 "정치개혁에 관해서는 질타의 강도를 더 높였다"면서 부패방지법 등 4개 법안의 연내 처리를 "강력히 주문했다"고 밝혔다. '이회창 후보의 개혁의지'를 클로즈업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 인상이다.

매경은 그러나 이날 이 후보가 연내처리 불가 방침을 밝힌 핵심 정치개혁법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 후보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팩트 자체의 보도를 차단한 셈이다.

***조선·중앙도 팩트 조작 또는 팩트 전달 차단**

조선일보는 이날 5면 우측 상단에 "李후보 '정치개혁법안 회기 내 처리' 黨 선거전략회의에 요청"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조선일보 보도는 특히 "이 후보는 '반드시 처리해야 할' 대상에는 포함시키지는 않았으나 '공직자윤리법·자금세탁방지법·정치자금법·선거법·정당법·검찰청법·형사소송법 등 의견차가 있는 법안은 진지하게 검토해서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처리하는 등 제1당의 책임있는 자세를 보여주었으면 한다'고도 했다"고 보도한 부분이 문제다.

이 후보의 이같은 발언은 이들 법안에 대해 연내 통과가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의례적으로 덧붙인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연내 처리 불가' 부분은 쏙 빼고 '진지한 검토'를 강조한 부분만 부각시키는 '팩트 조작'을 했다.

중앙일보도 "이회창 黨 전략회의 참석 '부패방지법 등 꼭 처리하라'"는 제목을 붙여 이 후보 발언을 보도하면서, 이 후보가 핵심 정치개혁법안 연내 처리 불가방침을 밝힌 대목은 기사에서 아예 빼버렸다.

동아일보는 비교적 객관적으로 이 후보 발언에 대한 민주당 노무현 후보 측의 주장을 싣는 등 문제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李후보 '부패방지법 등 14일까지 처리'정치개혁법 개정 탄력"이라는 제목을 달아 이 후보 발언이 정치개혁을 촉구하는 것같은 인상을 주었다.

경향신문도 이 후보 발언을 다룬 박스 해설기사에서 이 후보가 개혁입법을 꺼낸 이유와 관련, "어차피 보수층은 '주머니표'인 만큼 20-30대 젊은층과 호남 유권자를 겨냥했다고 보인다"고 분석해 마치 이회창 후보가 대단한 '개혁카드'를 뽑아든 것처럼 보도했다. 다른 대다수 마이너 신문들의 보도에서도 이 후보 발언의 문제점을 지적한 대목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겨레, 사설 통해 이 후보 발언 비판**

이날 이 후보 발언의 문제점을 다룬 신문은 한겨레 한 곳에 불과했다.

한겨레는 "정치개혁 알맹이 법안도 처리해야"라는 사설과 "개혁법안 통과 기대, '졸속입법' 우려도"라는 제목을 기사를 통해 이 후보 발언의 의미와 한계를 비중있게 다뤘다. 또 이 후보가 연내 처리를 촉구한 4개 법안에 대해 각각의 쟁점 사안에 대한 현재 국회에 제출된 안과 시민단체 등의 주장을 비교하는 기사도 덧붙였다.

한겨레는 이날 사설에서 이 후보 발언과 관련 "문제는 정치개혁의 알맹이가 되는 법안이 우선 처리 대상에서 빠져 있다는 점"이라며 "(이 후보가) 진정으로 (정치개혁을) 할 용의가 있다면 대선 임박은 핑계가 될 수 없다. 본회의 일정을 여유있게 늦춰 잡으면 정치개혁의 이름에 걸맞은 법안의 처리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언론보도 태도를 접한 언론계의 한 관계자는 "이회창 대세론이 확산되면서 언론계에서도 줄서기가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며 "비판정신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물론, 팩트 자체까지도 왜곡하는 현상을 보면서 한국언론의 참담한 현주소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고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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