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조선족의 큰 별로, 조선족 사회의 정신적 지주(支柱)로 받들려온 김학철 선생님께서는 지난 9월 25일 오후 3시 39분에, 정판룡 선생님께서는 10월 7일 오후 5시 50분에 12일 사이를 두고 타계하셨다.
김학철 선생님은 지난 8월 29일 한국에서 병치료를 하다가 귀국했고 9월 5일부터 "작가가 책을 보지 못하고 글을 쓰지 못하면 생명이 끝난거야. 로마도 죽음을 막는 처방은 만들지 못했다고 했어"라는 말씀을 하시고 금식을 시작, 그리고 금식 닷새째 되는 9월 9일에 아래와 같은 유언을 남기었다.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더는 연연하지 말고
깨끗이 떠나간다
병원, 주사 절대 거부
조용히 떠나게 해달라
김학철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금식을 시작해서 김학철 선생님께서는 생전 소속 직장인 연변작가협회 김학천 주석을 불러서 담화를 하고 그외 극히 개별적인 사람 몇을 만났을 뿐으로 일체 면회 사절하고 평생 자기가 즐겨온 ‘목포의 눈물’ ‘가거라 3.8선’ 등 흘러간 옛 노래를 감상하면서 조용히 죽음을 불렀다.
그리고 단식 보름이 된 이후에는 물까지 사절, 사망 이틀전에는 간호사를 불러서 관장을 대어 속을 깨끗이 씻어냈고 또 이발사를 청하여 머리를 깎았다. 항일독립운동 당시의 모습을 되찾으므로 ‘최후의 분대장’으로 떠나려고 했다.
사망되던 날 새벽 2시 반에 김학철 선생님은 아내와 아들 며느리하고 집에서 운명을 하게 되면 식구들이 늘 눈에 삼삼 밟혀서 연연하게 될 것이니 병원으로 가자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날이 새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테니 새벽에 가서 입원하자고 했다. 그리하여 연변병원 간부병동 103호실에 입원, 침대만 빌렸을 뿐 치료는 거부, 오후 3시 39분에 가속들이 지켜보는 속에서 조용히 운명을 하셨다.
이틀 후 장례식에는 김학철 선생님께서 사망 전에 지적해주신 12명이 부고를 받고 참가하였다.
선생님께서는 유서에 “부고를 내지 말라. 고별식과 추도회를 일체 하지 말라. 골회는 두만강 하류에 뿌리고 남은 것을 우편 종이박스에 담아 두만강물에 띄워 고향 원산으로 가게 하라’고 하셨다.
그 뜻을 따라서 9월 27일 오전에 화장을 하고 오후에는 아들 해양씨 내외와 김학철 선생님께서 생전에 자기의 장례식에 초청을 한 12명과 기자 등 20여 명이 훈춘시 영안진 앞 두만강가에서 고별식을 갖고 골회를 두만강에 뿌리고 얼마간 나머지는 우편 종이박스에 넣고 ‘원산 앞바다 행/ 김학철(홍성걸)의 고향/ 가족친우 보냄’이라는 주소까지 쓴 종이를 붙여서 흐르는 두만강에 띄워서 보냈다.
그리고 김학천 주석이 선생님의 생전의 유언에 따라 김학철 선생님께서 항일시기 태항산에서 작사하신 ‘조선의용군 추도가’의 가사를 읊어서 배웅을 했다. 그 가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나운 비바람이 치는 길가에
다 못 가고 쓰러진 너의 뜻을
이어서 이룰 것을 맹세하노니
진리의 그늘 밑에 길이길이 잠들어라
불멸의 영령
나라를 찾기 전에는 살아서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뜻을 지니고 상해로 와서 독립운동에 참가했던 김학철 선생님은 죽어서야 귀향길에 오른 것이었다.
***정판룡 교수님도 별세**
전 연변대학 부교장이자 중국 조선족의 걸출한 교육가이며 문학평론가이신 정판룡 교수님은 10월 7일 오후 5시 50분 연변대학 복지병원 217호 실에서 서거하셨다.
서거하기 전인 9월 28일 정판룡 교수님은 병상에서 제5차 ‘정판룡 장학금수여식’을 가졌다. 정판룡 장학금은 1997년 한국 KBS해외동포상을 수상하고 수상금으로 설치한 것인데 매번 6명의 빈곤생을 골라서 장학금을 발급하였다.
병상에서 학생들과 일일이 악수하면서 공부를 잘 하라고 배려를 했다. 그리고 7월 2일 70회 생일을 맞아 박사제자들이 마련한 간단한 행사장에 참가하시어 “사람이 살면서 좋은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남을 위해 사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삶은 없습니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사망에 앞서 자기의 모든 도서를 연변대학 조선어문학학부에 기증한다고 하였고 부인 왕유 교수에게는 약간한 생활금을 내놓고 모든 돈을 연변대학에 기증할 것을 부탁하였다.
장례식은 9일 오전에 연길시 빈의관 추도회장에서 거행, 전국 각지에서 온 근 5백여 명이 참가하였다.
정판룡 교수의 서거의 소식을 듣고 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조남기 동지께서 조전을 보내왔고 전국민족사무위원회 주임 이덕수 동지께서 화환과 조전을 드렸다.
그리고 북경대학, 복단대학 등 전국 수십개의 유명대학에서 조전을, 그리고 전국 각지의 조선족 단체와 유지들과 조선족 신문, 출판, 교육, 예술, 문화단체 등에서 대표들이 참가하였다.
추도회장 정면에는 가로 ‘鄭判龍同志祭奠儀式’이라는 글 밑에 정판룡 선생님의 유상이 걸려 있고 유상 왼쪽 켠에 ‘영령영수인세간(英靈永垂人世間)’, 오른 쪽켠에 ‘미덕상여천지존(美德常與天地間)’이라는 현판이 있었다.
연변대학 교장 송동식 동지는 추도사에서 정찬룡 교수는 중국 조선족뿐 아니라 전국 교육계에서도 저명한 교육가이시며 문학평론가이시며 사회활동가이시라고 평가하였고 중국 특색의 중국 조선족 교육과 문화와 문학적 기반을 다졌고 마멸할 수 없는 공헌을 하였다고 하였다.
연변대학 부교장 김병민 교수는 일찍 김학철, 정판룡 “두 분은 우리 민족 문단의 대표적인 작가로, 교육가로 한 평생 혼신의 정열을 쏟아 일해왔고 우리 문단의 양심과 지성,그리고 무궁한 저력을 대변해왔습니다...당면한 조선족 사회의 진통과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중흥을 이룩하는 사업에서도 우리 민족의 기수(旗手)로, 정신적인 기둥으로 되어주었습니다”라고 하였다.
***타협 모른 김학철 정신과 문학**
“빼앗긴 땅을 붓으로 찾지 못하면 총으로 찾자!”(김학철 저 ‘나의 길’에서)
이것이 16살 어린 김학철이 고향 원산을 떠나 중국 상해로 와서 ‘장총을 멘 조선독립군’이 되었을 때의 다짐이었다.
대서업자인 그의 큰아버지마저 “제 놈이 총 한자루 들구 숫제 제국군대와 맞서보겠다구? 그놈이 돌지 않았다면야 언감생심그 따위 짓을 할 리가 있나, 허 참!”(김학철 저 ’나의 길‘에서)라고 어이가 없어했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무모한 짓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목숨보다 더 중한 사랑, 그 사랑보다 더 중한 자유”(김학철 저 ‘나의 길’에서)를 위하여 항일의 성전에 나선 것이다.
일제 감옥에서 다리 하나를 잃고 ‘우산귀신’이 되어 서울로 들어온 다음부터 그는 붓을 들고 ‘자유를 위한 투쟁’을 계속하였다.
그후 평양으로 온 그는 “장편소설 하나 넉넉히 엮을 만큼 복잡한 사정”(김학철 저 ‘나의 길’에서)을 안고 북경으로 왔으나 불과 7년 후에는 ‘우파’로 숙청을 당했고 미발표작 ‘20세기 신화’로 10년간의 옥살이까지 하였다.
그는 “일본감옥에서 4년, 중국 감옥에서 10년, 징역살이 복”(김학철 저 ‘나의 젊은 시절’에서)이 터졌어도 단 한번도 “죽을 죄를 지었으니 용서해줍시사”라는 표시로 ‘디터우(低頭)’나 ‘하야오(哈腰)’ 한번 하지 않았다.
그는 “한번 들어가기만 하면 강산이 두세번씩 바뀌어야 겨우 벗어날 수가 있”는 “이 ‘반동’이라는 무시무시한 명칭으로 불리는 땅굴”(김학철 저 ‘무죄를 선고하는 공판정에서의 발언’에서)을 “나름대로의 신념”을 지켜서 “지겨운 줄도 모르고, 한눈도 팔지 않고 오로지 한길을 걸어나왔다. 제멋에 겨워서 자신만만하게 걸어나왔다.”(김학철 저 ‘나의 젊은 시절’에서)
김학철 선생이 말한 ‘나름대로의 신념’은 바로 정의(正義)였다. 그는 정의와는 공존할 수 없는 불의와 지칠 줄 모르는 사투를 벌여왔다.
바로 그가 평생 견지해온 정의는 그 어떤 편의와도, 그 어떤 일시적 표준과도 상관이 없이 인간성의 근본에 깊숙히 뿌리를 박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의의 깃발을 들고 20세기 어려운 시대를 개척해왔다. 외로움과 고독은 그의 인생의 반려였다. 잡초 속에 묻힌 한포기 난초, 바로 그것이었다.
잡초가 무성해 오랫동안 난초가 영양실조로 시들고 약해지기도 했지만 벌초를 하거나 김을 매주는 이는 없었다. 잡초들은 천지만엽 무성한 가지를 펴서 햇빛을 막고 또 천만오리 뿌리로 난초의 뿌리를 감싸고 말려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끝내 “1980년의 12월도 이미 하순에 접어들어 ‘삭풍이 나무 끝에 불고’라고 읊은 어느 분의 시조가 떠오르는 계절”(김학철 저 ‘제2차 공판’에서)에 “살인자가 잠깐을 처벌을 피할 수 있지만, 늦게 온 정의가 범죄를 뒤따라 잡을 것이다”(‘수탉과 여우’에서)라고 한 드라이든의 예언이 김학철 선생의 몸에서 실증되었다.
“공판정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명예를 회복하고 보니 내 나이 자그마치 65살이었다. 나의...최후의 분발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김학철 저 ‘나의 길’에서)
지상에 불의가 득실거리는 한, 그리고 이 세상 어디에서나 정의가 불의에게 억압되고 있는 한 김학철 선생은 어려운 행차를 계속했다.
“문학의 정상에로의 등반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이젠 잘 알았지만 그래도 죽을 때까지 견지할 작정”으로 “자신만만하게 걸어나왔다.”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의 편력은 명실공히 우리 민족의 영광의 역사이고 수난의 역사의 축도로 되었다. 그리고 꺾일지언정 휘지 않는 대쪽같은 불요불굴의 정신, 손톱눈만한 불의와도 타협을 할 줄 모르는 김학철식 정신은 바로 우리 민족의 영혼으로 굳어졌다.
“민족의 질을 돋워올리는데 이바지하지 않는 문학이란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런 무의미한 문학에다는 정력을 허비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자 신조다.”(김학철 저 ‘나의 길’에서)
이것이 바로 김학철 선생의 문학선언이며 정신이다. 김학철, 그 인간과 그의 문학과 우리 민족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김학철 선생은 바로 그 글 자체이며 그 글 또한 우리 민족 자체이다.
***정판룡, 조선족의 걸출한 교육가**
17살 어린 나이에 책보따리를 메고 상지를 떠나 연변대학으로 올 때부터 정판룡의 앞길엔 탄탄대로가 펼쳐있었다. 그리고 소련 유학을 마치고 북경으로 돌아왔을 때 그 탄탄대로에는 아름다운 무지개 한끝이 걸려있었다. 꽃구름 흐르는 푸른 하늘로 휘우듬히 뻗어올라간 무지개길은 선남선녀가 사는 천국과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천국의 유혹을 물리치고 주어진 운명의 길을 택했다. 자기 세계에 대한 책임을 떠맡아야 했던 것이다.
“나에게는 과학원 연구소로 가느냐 아니면 연변대학으로 다시 돌아가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과학원에 있는 나의 친구들은 자기가 배운 전공을 살리고 학술연구에서 큰 성과를 거두자면 산골대학으로 갈 것이 아니라 북경의 연구기관에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그러나 나는 나의 소위 전도를 위해 우리 동포들의 부름을 거절할 용기가 그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연변대학은 비록 북경에서 수천리 떨어진 초라하고 설비없는 학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중국에 하나밖에 없는 우리 민족의 대학이 아닌가!...우리 민족의 정성과 희망이 담겨진 학 교가 아닌가! 우리 말, 우리 글로 중국에 있는 우리 민족을 위해 진정 민족 인재를 양성하는 유일한 대학이 아닌가!”(정판룡 저 ‘고향 떠나 50년’의 ‘23 큰 포부를 안고’에서)
민족적 의무는 정판룡의 운명을 결정했고 그로 하여금 우리 민족의 저명한 문학이론가로, 걸출한 교육가로 성장하게 하였다.
그는 일생을 통해 우리의 민족과 이 사회를 위해 가장 값진 선물을 바친 사람 중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수많은 제자들을 두었고 우리 민족의 박사와 석사들을 키웠다. 이 세상에서 남북한과 중국 조선족의 박사를 배양한 분은 오직 정판룡 한 분이다.
그가 선택한 의무의 길은 영광으로 직결되어 있었다. 연변대학을 우리 민족의 학문의 광장으로 만들고 그 속에서 젊은이들을 육성한 교육시킨 것보다 더 큰 영광이 또 있으랴!
올바른 자기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재를 배양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에루화 데루화 쾌지나 칭칭’을 부르며 남의 장단에 춤을 추어온 광대극을 종결짓는 위대한 사업이 아니었던가!
교육은 인간을 만들고 민족교육은 민족의 운명을 밝게 한다. 민족교육의 성당에서 정판룡은 자기가 배운 지식을 사회생활에 적용하여 민족문제 해결의 궁극적인 열쇠를 찾아냈다.
“중국의 조선족은 왕왕 자신을 친정부모의 슬하를 떠나 멀리 중국으로 시집 온 딸로 간주할 때가 많다. 사실 조선족 대다수는 ‘살기 위해’ 중국으로 흘러들어온 이민들이니 부모님 슬 하를 떠나 중국으로 시집간 딸로 자신을 생각하는 것도 퍽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국에 시집온 이상 중국 남편도 잘 모셔야 하며 중국 시부모도 잘 모셔야 한다. 그리고 친정집과는 좀 거리를 두어야 하며 우선 먼저 시집의 가법(家法)을 잘 지켜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친정집을 영영 잊으라는 것도 아니며 또 잊을 수도 없다.“(‘정판룡 문집 2(연변인민출판사 1997년출판)’ 422페이지에서)
정판룡 선생이 말한 가법이란 중국의 국법, 구체적으로는 소수민족 우대정책을 가리킨 것이다. 소수민족 우대정책의 실질은 자연동화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집에는 참한 며느리로, 친정에는 착한 딸로 거듭 태어나 중국과 남북한 두 사돈간의 우의를 돈독히 해야 할 의무를 다하는 것만이 중국땅에서 영구히 자기를 보존하면서 한족과 기타 민족과 더불어 살아가는 길인 것이다.
정판룡, 그는 민족의 수요에 명실공히 모든 것을 바친 교육자이다. 그는 학술을 생활화한 이론가이며, 우리 민족의 예술가다.
***두 분은 조선족의 양대 정신 지주**
전국권 교수는 김학철과 정판룡, 두 문학 정상의 정신문화의 특징을 하나는 ‘비판-지양문화’이고 다른 하나는 ‘찬송-인도문화’라고 개괄한 바 있다.
성격적으로 보아 김학철 선생은 꺾일지언정 휘지 않는 분이고 정판룡 선생은 휠지언정 꺾이지 않는 분이며 글로 보아 김학철 선생은 그 비판력에 비해 포옹력이 약하고 정판룡 선생은 포옹력에 비해 비판력이 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꺾일지언정 휘지 않는 것이나 휠지언정 꺾이지 않는 것은 다같은 자기보존의 목적을 위한 것이다.
이 두분의 성격적 차이는 고군분투의 작가적 생활과 동료와 더불어 제자를 거느리는 교육자생활의 차이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얼핏 생각하면 이 두가지는 불과 물처럼 조화되지 않을 것 같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이 두가지는 서로 상반되면서도 보완되는 사물의 두 측면이다. 둘을 갈라서 각자로 보면 모자라지만 둘을 합하면 완전한 것으로 된다.
김학철과 정판룡을 우리 민족의 대표자로, 이 두 분의 사상을 우리 민족의 정신적 기둥이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김학철의 정신이 없다면 우리 민족은 개성이 없는 민족으로 완전히 자신을 잃고 동화되고 말 것이며 정판룡의 처세정신이 없다면 우리 민족은 다민족 국가인 중국 땅에서 생존을 영위해나갈 수 없을 것이다.
21세기 첫 해에 두 별의 추락은 중국 조선족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두 분의 타계는 조선족 사회에는 미봉할 수 없는 손실이다.
이제는 김학철 선생님을 대신하여 ‘불의에 도전’하여 감히 필봉을 날려 비판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며 정판룡 교수님을 대신하여 넓은 가슴에 모두를 포옹하여 새 길로 인도해줄 사람이 없다.
그러나 두 분이 생전에 창조하신 정신은 영원할 것이며 두 분을 따르는 문학도와 제자들이 사회의 중견으로 활약하고 있는 한 조선민족사회의 미래는 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유한한 생명의 모든 정력을 내일의 세대를 위한 무한한 사업에 바쳐 민족의 생명을 생동케 한 김학철, 정판룡 두 분은 우리 민족과 함께 영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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