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레시안 books'는 창간 3주년을 맞아 '번역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열두 명의 번역가들이 어떤 식으로든 기억에 남는 자신의 번역서 한 권을 골라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편집자> |
온갖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한데 모아놓은 인물군상화 같은 걸 그린다면 번역가는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까? 화폭 구석, 빛이 닿지 않는 가장 어두운 곳에 잔뜩 웅크리고 앉아 무언가를 부지런히 옮겨 적는 사람이 아마 번역가일 것이다. (그 옆에는 번역가와 함께 "가내 노가다"라는 직업군에 속하는, 인형 눈을 붙이는 사람이 비슷한 자세를 하고 있다)
뒤따라 떠오르는 이미지는 골방에 틀어박혀 촛불 하나 켜놓고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고전이나 성서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옮기려고 고심하는 중세 연구자의 모습이다. (이때 번역은 수행 방법 가운데 하나로 장려되었다고 한다) 아니면 역시 골방에 틀어박혀 안 그래도 적나라한 통속소설을 더욱 선정적인 문구로 옮기며 남몰래 붉은 희열을 느끼는 통속소설 전문번역가도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은 동시대 대중의 요구를 최우선에 두기 때문에 가장 생생하고 매끄럽고 맛깔난 번역을 해낼지도 모르겠다. 대부분 번역가는 이 두 사람 사이 또 어딘가에 있는 골방에 존재할 것이다.
| ▲ <밴버드의 어리석음>(폴 콜린스 지음, 홍한별 옮김, 양철북 펴냄). ⓒ양철북 |
어떤 책인지 소개하자면, 내가 개인적 팬심 때문에 팔리든 안 팔리든 전작 번역을 고집하고 있는 논픽션 작가 폴 콜린스의 첫 작품 <밴버드의 어리석음>(홍한별 옮김, 양철북 펴냄)이라는 책이다. 한때 재능과 인기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으나 실수를 저질러서, 운이 없어서, 혹은 시대가 알아봐 주지 않아 순식간에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져 결국은 역사에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못한 불운한 열세 사람의 이야기를 모아 놓은 책이다. 이들의 B급 상상력과 핀트가 안 맞는 재능, 숭고한 헛발질 덕에 이 세상이 더 재미나고 풍요로운 곳이 되었으니, 반드시 성공해야만 가치 있는 삶은 아닐 것이다.
<밴버드의 어리석음>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가 조지 살마나자르(1679?~1763), 희대의 사기꾼, 백인이면서도 자기가 유럽에 온 최초의 포모사(오늘날 타이완)인이라고 주장해서 온 세상을 속였던 사람이다.
| ▲ 스스로를 '일본의 속국 포모사인'이라고 거짓말했던 조지 살마나자르. (출처 Wikimedia Commons) |
그러자 영국 상류층 사람들이 "이국적인 개종자" 살마나자르를 만나고 싶어 앞 다투어 집으로 초대하는 일이 벌어졌다. 살마나자르는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이국적이고 신비롭고 엽기적이기까지 한 포모사 이야기를 신나게 지어내서 들려주었고 상류층 신사와 숙녀들은 살마나자르의 이국적 매력에 푹 빠져 입을 떡 벌리고 구경하곤 했다.
한 선교사가 포모사는 일본의 속국이 아니라 중국의 속국이라는 사실을 지적했지만 그의 말은 살마나자르의 뜨거운 인기에 묻혀 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영국에는 포모사에 가본 사람은커녕 포모사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본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심지어 동양인과 서양인이 생김이 다르다는 사실조차도 몰랐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영국 전체가 살마나자르에게 속아 넘어가게 되었다.
살마나자르는 말로 떠드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의 속국 포모사의 역사와 지리>라는 책을 펴내, 유혹적인 상상력을 마음껏 펼치며 식인 습관을 비롯한 포모사의 온갖 신비하고 기이한 역사와 풍습을 들려준다. 주식은 뱀이고, 아내가 부정을 저지르면 남편이 아내를 잡아먹어도 되고, 매년 1만 8000명의 아이들을 산제물로 바치고…기타 등등. 포모사라는 나라 전체를 통째로, 무에서부터 환상적으로 창조해 버린 것이다.
| ▲ 살마나자르가 지은 책 <일본의 속국 포모사의 역사와 지리> |
뿐만 아니라 살마나자르는 참 성의 있게도 포모사어도 직접 만들었다.
아래는 살마나자르가 주기도문을 포모사어로 번역하여 음차한 것이다.
Amy Pornio dan chin Ornio vicy, Gnayjorhe sai Lory, Eyfodere sai Bagalin, jorhe sai domion apo chin Ornio, kay chin Badi eyen, Amy khatsada nadakchion toye ant nadayi, kay Radonaye ant amy Sochin, apo ant radonern amy Sochiakhin, bagne ant kau chin malaboski, ali abinaye ant tuen Broskacy, kens sai vie Bagalin, kay Fary, kay Barhaniaan chinania sendabey. Amien.
(조용히 읽어보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효과가…)
이렇듯 신비로운 나라를 자세히 소개한 책이니 당연히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독일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로도 속속 번역되었다. 안타깝게도 화려한 나날은 오래 가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지만. 책 내용이 순전히 허구임이 드러나면서 살마나자르는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살마나자르는 속마음은 순진한 사람이었는지 나이 들면서 자기가 늘어놓은 거짓말에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다. 사기가 폭로된 뒤에도 살마나자르를 좋아해서 계속 후견인 노릇을 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살마나자르는 가짜 정체성으로 사람들의 호의를 사는 대신 정직한 밥벌이를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노년에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번역 일을 하면서 경건하게 살았다고 한다. (내가 해 봐서 아는데 돈 욕심을 버리고 정신을 수양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정직한 밥벌이! 한 나라의 역사와 지리와 언어를 통째로 창조해 낸 사람이 결국엔 마냥 소박하게도 번역가가 되었다니! 살마나자르같은 천재가! 오늘날 한국에 태어났다면 창조경제의 전범이 되었을 텐데! 그러나 (포모사어 말고 다른 제대로 된 언어로) 책을 번역하는 일을 하고 살면 아무도 무얼 창조했다는 이유로 비난하지는 않을 터이니, 안전한 밥벌이이기도 했다.
한때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려고 애썼던 살마나자르지만, 말년에는 최대한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게 조용하게 살고 싶었다. 그런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역시 골방의 번역가였다. 창작의 열정을 지닌 사람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글로 된 세계 안에서 글을 쓰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 역시, 번역이라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 일을 하는 까닭도 살마나자르와 비슷한 것 같다. 아니, 정신수양은 빼고.
홍한별의 주요 역서
<가든 파티>(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강 펴냄)
<피와 천둥의 시대>(햄프턴 시드 지음, 갈라파고스 펴냄)
<밴버드의 어리석음>(폴 콜린스 지음, 양철북 펴냄)
<민주주의는 가능한가>(로널드 드워킨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우울한 열정>(수잔 손택 지음, 이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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