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묵시록? 미래를 향한 뒷걸음질!

[프레시안 books] 볼프강 울리히의 <예술이란 무엇인가>

볼프강 울리히의 <예술이란 무엇인가>(조이한·김정근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는 그 제목의 호기로움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그런데 정말 호방한 것일까. 어떤 면으로 이러한 제목은 익숙하고 진부한 것은 아닐까. 예컨대, 국내에서 동일한 제목으로 출간된 책만 꼽아 보아도 톨스토이, 에른스트 피셔, 수잔 K. 랭거 등 다양한 저자들에 이른다는 사실은 이 질문의 피할 수 없음과 보편성을 확인시켜준다.

우선 짚고 넘어갈 점. 이러한 동명의 책들의 원제가 (톨스토이의 저서를 제외하면) '예술이란 무엇인가'는 아니라는 것. 피셔의 <예술이란 무엇인가>의 원제는 'Von der Notwendigkeit der Kunst'(영어판 제목은 'Necessity of Art')이며, 랭거의 <예술이란 무엇인가>의 원제는 'Problem of Art'이다. 반면, 울리히의 <예술이란 무엇인가>의 원제는 'Was war Kunst?'로서, (비록 원제의 과거형이 번역서에서는 현재형으로 뒤바뀌긴 했지만) 애초부터 대담하게도 예술의 정의를 목표로 쓰인 책이다.

▲ <예술이란 무엇인가>(볼프강 울리히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예술의 역사에서 예술을 정의하려는 노력은 헛되고도 필사적이었다. 무용하지만 절박함. 바로 여기에 예술을 정의하려는 시도의 핵심이 담겨 있다. 말하자면,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예컨대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든가 '자연이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과 전혀 다른 유형의 질문이라는 뜻이다. 애초부터 명확한 답이 있을 수 없는 질문임은 물론이지만, 그럼에도 예술에 대한 질문은 예술 자체와 떼어놓을 수 없다. 즉 예술의 개념을 구하는 것은 다양한 자연적, 물리적, 사회적, 심리적 현상들을 분석하고 정의하려는 노력과는 달리, 그 무용함에도 불구하고 예술 행위의 본질에 맞닿아 (혹은 속해) 있는 것이다.

밝혀둘 것은 여기서 예술이란, 조형예술 혹은 미술이라 분류되는 협소한 의미의 예술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여타' 예술 장르들과도 비교될 필요가 있는데, 결국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예컨대 '문학이란 무엇인가?'나 '음악이란 무엇인가?'와도 사뭇 다르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오늘날 동시대 소설가나 영화감독이 작품을 구상하기에 앞서 문학이나 영화의 정의를 고찰하는 경우는 드물(고 있다 해도 작품의 성격에 결정적인 경우는 거의 없)지만, 현대미술 작가의 작업은 '미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하며, 나아가 현대미술 작업 자체가 사실상 이 질문으로 대체된다.

그러므로 이 책이 1장 '알 수 없는 그 무엇'으로 시작하여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나타내는 선', '고귀한 단순함과 조용한 위대함' 등을 거쳐, 10장 '확장된 예술 개념'과 11장 '예술의 종말'로 마무리되는 것은 매우 분명한 여정을 구성하고 있다 하겠다. 근대예술은 정의내릴 수 없음과 개념적으로 파악될 수 없음으로부터 출발하여 이러저러한 일련의 정의 시도들을 거쳐 가며 성장해왔고, 종내에는 예술의 종말 선언으로 또 다른 단계의 재(再)정의 국면에 돌입하게 되었음에 대한 (선명하지는 않지만 확고한) 방향 지시인 것이다.

개념을 통해 예술의 역사를 관통하겠다는 저자의 야심은 이중으로 실현된다. 한편으로 한 챕터에서 다음 챕터로의 전환은 르네상스로부터 고전주의, 로코코, 낭만주의, 인상주의 등으로 진행되는 어떤 느슨한 미술사를 형성한다. 다른 한편, 각 챕터가 각각의 개념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그 최초의 주요 주장과 이에 대한 비판 및 반론, 나아가 오늘날 이 개념이 어떤 식으로 변형되어 재해석되고 있는가를 아우르며 특정 개념의 통사(通史)를 서술한다.

이러한 이중의 역사 접근이야말로 (호기로워 보이지만 실은 진부한 제목을 가진, 아니, 얼핏 진부하지만 실상은 호기로운) 이 책의 변별 요소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야말로 이 책의 원제가 '예술이란 무엇이었는가'라는 과거 시제로 설정된 이유일 것이다. 즉 이 책의 목표는 단지 예술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나열하려는 것이 아니라, 왜 오늘날 예술이 개념의 재정의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러한 재정의는 왜 (불)가능한가를 설명하기 위한 전략적 회고이다.

따라서 각각의 챕터는 이러한 연대기적 서술은 물론 현재의 지형 파악 및 방향 제시에도 부합하도록 정교하게 특기되어 있다. (그렇게 보자면 '예술의 패러다임을 뒤흔든 11가지 개념'이라는 부제는 그 적확함과는 별개로 상당히 효과적이다.) 앞서의 그 유사-동명의 책들이 '예술의 기능', '예술의 기원', '내용과 형식', '표현성', '창작' 같은 추상적 개념으로 포진되어 있다면, 또한 번역서의 제목은 다를지라도 개념의 역사를 다뤘다는 점에서 울리히의 본 저서에 가장 잘 대응되는 책, 타타르키비츠의 <미학의 기본 개념사 A History of Six Ideas>의 경우 '예술', '미', '형식', '창조성', '미메시스', '미적 경험' 등 포괄적인 개념을 다루고 있다면, 울리히의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이루는 구체적이고 특정적인 개념 목록들은 가히 매혹적이다.

각각의 개념을 전부 요약할 수는 없지만, 책의 전반적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도록 한 예를 살펴보자. 가령, 4장 '그림과 같은 시'. 호라티우스가 <시학>에서 시를 회화에 빗대어 설명한 문장으로부터 유래한 세 단어 '그림과 같은 시'는 자유교양학문에 속하지 못한 조형예술 분야의 종사자들에게는 구원의 메시지였다. 17세기 화가와 조각가는 "수사학과 시학의 교과서를 좌표로" 삼아야만 현재의 열등한 처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푸생 같은 '학식이 높은 화가'를 통해 화가의 자아 이해를 증명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텍스트에 구속되어 있던 그림 개념은 레싱의 <라오콘 군상 혹은 회화와 시의 경계에 대해서>(1766)와 같은 저작의 출현과 더불어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거부되었으며, 시와는 다른 조형예술만의 독창적 미의 형식이 탐구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림과 같은 시(Ut pictura poesis)'가 '그림은 결코 시가 될 수 없을 것이다(Ut poesis pictura non erit)'로 바뀌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그림이 온전한 독자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율성과 독자적 법칙의 정수로서의 '절대 음악'을 모범으로 삼아야 했다.

모든 예술 사이의 경계를 무화시키려는 낭만화 현상에 대한 비판은 어빙 배빗의 <새로운 라오콘>(1910)을 거쳐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더]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1940)에서 정점에 달했지만, 이처럼 세 번의 '라오콘 논쟁'을 거치며 미술이 획득한 자율성은 여전히 순수음악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으며, 따라서 오늘날 미술계는 새로운 문학화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결과적으로 에세이와 선언문을 작성하거나 강연을 하지 않는 현대 예술가들은 거의 없게 되었다. (…) 오늘날 사람들은 반드시 '지식이 많은 화가'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야깃거리를 지닌 화가를 여전히 요구하고 있다. (…) 다시 라오콘이라는 제목을 지닌 네 번째 새로운 책이 나올 시간이 된 것인가? 아니면 모방과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 근본적으로 조형예술의 속성에 속한다는 사실에 만족해야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외부에서 빌려온 개념으로 스스로를 정의해야 하는 것이 조형예술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143쪽)

이러한 서술들이 <예술이란 무엇인가>의 마지막 장 '예술의 종말'을 향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이렇듯 이 책은 과거 특정 예술 개념들을 통해 오늘날 예술의 종말의 필연적 도래와 그 이후를 살아내는 방법론을 모색한다. 말하자면 이 책은 매번의 죽음과 종말을 고함으로써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묵시론적 전략서이다.

이 책이 추구하는 다양한 개념들의 출몰은, 각각의 개념에 대한 묵직하고 치밀한 논증을 원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가벼워보일지 모르며, 시대와 시대를 구분하는 보다 선명하고 친절한 설명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다소 복잡하고 혼란스러울지 모른다. 그러나 그 엇박자의 스텝이 실은 벤야민의 역사의 천사처럼 단호한 회고의 시선을 견지한 미래로의 뒷걸음질이라는 것을 눈 밝은 독자들은 간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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