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만이 우리를 '사랑'하게 하리라!

[프레시안 books] 알폰소 링기스의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

사회주의의 몰락! 어떤 식으로든지 그것은 인류 지성사에서는 하나의 좌절, 혹은 퇴보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자본주의의 도플갱어인 사유재산제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근본적인 시험대에 올랐기 때문이다.

사유재산제는 단순하다. 어느 누구든 자신만의 재산을 가질 수 있어야 하고, 동시에 그것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니까. 그렇지만 사유재산제는 공동체의 원리라기보다는 야만의 원리이기도 하다는 것,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와 사유재산제를 숙고했던 모든 지성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왜일까. 사유재산제는 공동체를 지탱하는 사랑의 원리를 무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적인 소유를 당당한 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사랑은 일종의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법이다.

사랑은 무엇인가를 갖기보다는 오히려 무엇인가를 타인에게 주도록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배도 고프다면, 나는 기꺼이 자신이 가진 음식을 내놓을 것이다. 또 사랑하는 사람이 지쳐 있다면, 나는 나의 방을 흔쾌히 그에게 내어줄 것이다. 또 사랑하는 사람이 추워한다면, 나는 외투를 벗어주면서 추위를 기쁘게 감당하려고 할 것이다.

바로 이런 사랑으로 인해 나와 타자는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 그러니까 사랑이 강제하는 묘한 힘, 그러니까 당신의 소유권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역설적인 힘이 없다면, 공동체는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반면 타인이 배가 고프건, 지쳐 있건, 혹은 추위에 떨고 있건 간에 내가 가진 음식, 내가 가진 방, 그리고 내가 가진 옷을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순간, 우리에게 공동체란 애초에 불가능한 꿈에 지나지 않는 법이다.

사회주의의 핵심에는 사적 소유를 폐기하면 사랑이 복원되리라는 소박하지만 강렬한 꿈이 잠재되어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실 사회주의는 사적 소유, 그러니까 사유를 폐기하는 대신 국유를 선택하고 말았다.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어리석음을 범한 셈이다. 국유도 어차피 소유의 형식이기에 사랑이란 공동체의 원리와 모순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쉽게 간과한 것이다.

특히나 제도권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가 인간의 공동체와 사랑에 반기를 들 수 있다는 것을 68혁명을 통해 경험했던 프랑스 지식인들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국유가 사랑의 원리를 복원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단지 국유란 독점적이고 절대적인 사적 소유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동구권이 몰락하기 전에, 이미 현실 사회주의는 이론적으로 극복되었거나 거부당한 꼴이다.

1983년은 인류 지성사에서 사유나 국유를 모두 극복하려는 체계적이고 진지한 노력이 시작된 해라고, 사랑과 공동체의 원리를 우회하지 않고 정면으로 씨름했던 해라고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그해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2003)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La Communauté inavouable)>라는 책을 썼고, 낭시(Jean-Luc Nancy, 1940년~)는 <무위의 공동체(La communauté désoeuvrée)>를 집필하기 때문이다. 1994년 이런 거대한 흐름에 미국의 철학자 링기스(Alphonso Lingis, 1933년~)도 합류하며 중요한 성과를 하나 덧붙인다. 20년이 지난 올해 마침내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어 쉽게 읽을 수 있게 된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The Community of Those Who Have Nothing in Common)>(김성균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라는 책으로 말이다.


▲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알폰소 링기스 지음, 김성균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바다출판사
2000년 이후 차근차근 블랑쇼와 낭시의 책이 번역되다가 마침내 올해 링기스의 책도 번역된 것이다. 2, 30 여 년이 흐른 뒤, 세 권의 책이 연이어 번역되었다는 것은 무척 의미심장한 일이다.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안긴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우리에게 대안을 고민하라고 압박했던 것이다. 사랑과 공동체의 원리가 붕괴되는 삶을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다는 것을 자각할 만큼 그 압박은 생각 이상으로 강했던 탓일까. 이제 우리도 뒤늦게나마 국유도 아니고 사유도 아닌 공동체의 형식, 그러니까 일체의 소유 형식을 극복한 진정한 공동체를 모색하게 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길은 전혀 외롭지만은 않다. 너무나 든든한 우군, 블랑쇼, 낭시, 그리고 이제 링기스가 곁에 있기 때문이다.

아마 독자들은 블랑쇼와 낭시의 책보다는 링기스의 책에 더 큰 호감을 느낄 것이다. 프랑스 지성인 특유의 화려한 수사와 현란한 글쓰기보다는 아무래도 미국적 간결함을 가진 문체가 더 편하게 다가올 테니까 말이다.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는, 아니 정확히 말해 망각된 진정한 공동체를 되찾으려는 링기스의 사유는 사실 책 제목으로 간결하게 요약된다.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 이것이 바로 그가 꿈꾸던 사랑의 공동체다. '공유'라는 말에서 우리는 링기스도 소유의 문제를 집요하게 문제 삼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책을 넘기다보면 링기스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사회 형식들에 내재된 친족 관계에 대한 유력한 인식을 벗어나면 또 다른 어떤 것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어떤 공통적인 것도 소유하거나 생산하지 않는 개인들의 형제애, 죽어야 할 운명을 짊어지고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 개인들의 형제애다."

나와는 전혀 공통성이 없는 사람, 그것은 바로 타자이다. 결국 링기스가 꿈꾸던 공동체는 타자와 공존하는, 아니 정확히 말해 타자를 사랑하는 공동체였던 셈이다. 그렇지만 타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나와 공통된 것이 하나도 없기에 내게는 그지없이 불편하고 불쾌한 존재일 테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링기스는 타자에 대한 사랑, 혹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형제애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그것은 나나 타자가 모두 피할 수 없는 숙명, 그러니까 "죽어야 할 운명"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와는 전혀 공통성이 없어서 불쾌감을 주는 사람일지라도 그를 죽어가는 존재로 아주 절실하게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그에게 형제애를 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때 링기스가 책 도처에서 강조하던 "죽음 공동체"가 구성된다.

가치관, 관습, 지식, 재산 등 우리가 가진 것들이 무가치해지는 지점, 그것은 나나 타자가 모두 죽는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바로 이 엄연한 사실에 우리는 굳건하게 서 있는 순간, 우리는 마침내 타자를 형제로 느끼게 된다. 이 순간이 바로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진정한 공동체, 그러니까 사랑의 원리가 관철되는 공동체가 가능해지는 순간이기도 한다. 아이러니한 일 아닌가. "죽음 공동체"만이 "사랑 공동체"를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렇지만 죽음 공동체에 이른다는 것은 또 얼마나 힘든 일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영원히 살 수 있기라도 할 것처럼 자신의 소유물을 늘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링기스도 약간은 절망적인 뉘앙스를 풍기며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죽음 공동체를 발견하려면 우리가 친족 관계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극한들에 처해지는 상황을 체험해봐야 하든지 적어도 상상해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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