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소녀'가 농사를 꿈꾼 이유?

[프레시안 books] 이계삼의 <청춘의 커리큘럼>

해마다 새 학기가 되면, 대학 구내 서점은 미어터질 정도의 책들로 꽉꽉 채워졌다. 평소에도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이라 엄선된 장서의 콜렉션이었던 그 매장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책을 뱉어내는 시간이었다. 각종 수업 교재들이 책장 옆으로 위로 쌓인 채 수업과 교수 이름이 적힌 종이를 이름표처럼 달고 있었다. 학기 초 구내 서점은 책을 사러 나온 아이들과 계산대에 늘어진 줄에 더해 구석구석 늘어진 책들로 언제나 '더웠고' 에어컨 바람에 날리는 건 대학생들에게 필요하다 여겨지는 과목들의 이름들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미사문(미디어 사회 문화의 이해)', '세평국(세계 평화와 국제 관계)', '현사심(현대 사회와 심리)'등의 줄임말로 불렀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강당 크기의 강의실에서 열린 대형 강의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지각을 자주 했던 나는 늘 뒤에 앉았고, 그 자리에선 교수님이 새끼손가락 크기로 보였다. 천문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환상을 일거에 소거해주는 '우주의 이해' 시간에 파워포인트로 보는 드레이크 방정식에서 우주의 신비를 배울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신기하게도 그 방대한 '대학생을 위한 교양 세계'를 접하게 되는 공간은 강의실보다 서점이었던 것 같다. 책덕후들 중에는 이 시즌을 즐기는 이들이 꽤 있었는데 (난 아니다!), 수강하는 수업의 교재가 아니더라도, 일련의 교양서들의 흐름을 직접 체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수업의 주교재와 부교재 중에는 딱딱한 대학 교재도 있었지만, 의외로 대중 교양서도 많았다.

▲ <청춘의 커리큘럼>(이계삼 지음, 한티재 펴냄). ⓒ한티재
'고민하는 청년들과 함께하는 공부의 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청춘의 커리큘럼>(이계삼 지음, 한티재 펴냄)을 읽으며 쌓여있던 책들의 풍경을 떠올린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먼저 제목을 잠깐 살펴보자. 나는 사실 이 제목을 보고 다소 식상하다는 생각을 감출 수가 없었는데, 이른바 '여기저기 만만하게 동원되는 청춘'에 나 자신이 당사자로 아직 포함된다는 생각을 해서인지, '청춘'이 들어가는 2000년대 후반 이후 교양 도서들의 콘셉트에 큰 불만이 있는 편이다. 청춘들을 위한 인생 질문의 해답이라거나, 청춘의 독서라거나, '꼭 그 나이가 타깃이 아니어도 되잖아?'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혹자는 이것을 아직 치기, 또는 행복이라고도 말한다).

자고로 참된 교양이란 특정 나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나 나이를 넘어 보편적인 쓸모에 닿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독 청춘들을 그 대상으로 한정하는 것은, 지금의 청춘들이 유난히 훈계가 필요한 세대여서일까? 아니면 '21세기 탈식민 시대의 지식인'과 같은 멋진 말을 마케팅적으로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일까? 자문자답할 수는 없으므로 세대라기보다는 시대 탓일 것이다.

이 말을 다시 이 책에 적용하자면, <청춘의 커리큘럼>은 그래서 꼭 청춘이 아니더라도 이 시대를 사는, 시대와 사회를 고민하는 이들을 위한 독서의 실라버스(syllabus, '강의 요강'이란 뜻으로 매 학기 대학에서 교수들이 수강 신청 시기에 올려놓는 수업 계획표를 말한다. 이 이상한 단어는 내가 다닌 학교에서는 원래 발음 그대로 쓰였는데, 그 어감이 주는 느낌이 있어서 그대로 적는다. 아마 다른 학교도 그랬을 거라 추측해본다)라 할 수 있다. 나는 실라버스 읽기를 꽤 좋아했는데, 간혹 '똘끼' 넘치는 실라버스를 발견하면, 꼭 청강을 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교수의 관심사는 무엇이며, 이 수업에 어떤 학생들이 들어왔으면 좋겠고, 이런저런 책은 안 사도 되지만, 어떤 책들은 이런 이유로 추천한다… 같은 것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서평 모음'이라기보다는, '이것을 고민하고 싶다면 이것을 읽고, 마땅히 이것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책을 거치면 좋다'를 알려주는 실라버스와 같은 책이다. 이것은 다양한 현장을 찾아다니며 녹색과 함께 교육 현장을 성찰하는 저자가 읽은 책에 관한 이야기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심지어 저자는 '이 책에서는 이것 이것을 더 주의 깊게 살펴보고, 이런 부분에서 더 깊이 공명하라'는 메시지를 주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실제로 배경 지식이 없어도 무척 재밌게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책을 넘길 수 있다. (저자가 선생님이라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책을 주객전도 시킨 '교양 안내서'라 보는 것이 이 제목을 지은 사람들의 뜻을 존중해 책을 읽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된다.

"10대와 20대가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저자는, "이런저런 책을 탐독하고 자투리 공부를 하면서" 아마도 더 굳건해졌을 교육 철학을 통해 마침내 농사와 인문학을 목표로 하는 대안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로 결심한다. 저자는 "청년들은 서로 손을 잡아야 하며, 함께 공부하는 기쁨과 반역하고 땀 흘리는 기쁨으로 몸이 뜨거워진다면 우리 몸에 꽂혀있는 은행과 핵발전소, 온갖 쇼핑몰들의 플러그를 하나씩 뽑아내는 자유와 해방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그래서 책은 석유 고갈의 문제, 원자력 문제, 농업에 대한 강조 등에 대한 시선도 놓지 않고 있다.

저자는 오늘의 한국 사회를 좌표가 없는 시대로 규정하며 좌파 이념은 시대와 함께 호흡하고 있긴 하지만, 시대의 사상적 좌표가 되기에는 시효가 지났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생태론 경제 사상가인 E. F. 슈마허의 '적정기술론'과 지속 가능한 삶의 조건으로서의 '적정기술', 지역 공동체의 가치, 인간 구원을 위한 노동의 의미를 통해 오늘날 필요한 사상을 발견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진보'와 '성장'이 아니라 '자립'과 '고용'의 덕목이었으므로. 저자가 지적하듯 우리 사회는 10년간 5205억을 들여 나로호를 개발해 달나라에 우주선을 보내려 하면서도, 예산 부족을 이유로 돌봄 서비스를 받지 못한 장애 남매와 전기요금 15만 원이 밀린 할머니는 불이 난 집에서 죽어야 하는 사회다.

경제 성장을 통해 중산층이 두터워질 때 민주주의가 안정적인 궤도에 오른다는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온 삶을 먹다>(이한중 옮김, 낮은산 펴냄)의 웬델 베리는 먹을거리를 스스로 거두어 먹을 때 우리가 자유로워지며, 소농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기반이라 말한다. 겪은 바도 배운 바도 없는 농업적 삶을 선택하고, 소농 사회로의 전환을 강제하지 않으면 안 될 시기가 왔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이것은 디스토피아인가, 유토피아인가?

대학이 대학다웠던 시절은 없었고, 다만 '거리에서, 세미나에서, 막걸리 집에서, 야학 교실과 논바닥에서 세상과 노동을 배웠을 따름'이라는 저자의 고백은 "옛날엔 안 그랬는데"라는 어떤 세대들의 과거 회상이 얼마나 허망한 말인지를 잘 보여준다. 저자가 지적하는 차이는 "그때는 그렇게 데모하고 다니며 룸펜으로 살아도 어쨌든 취직을 할 수 있었고, 지금은 그렇게 살려고 마음먹는 순간, 이 체제로부터 짤린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대학의 위기란 학문 공동체의 추락도, 인문학의 위기도 아니라는 말에 크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의 곳곳에는 사소한 재미들도 있다. 사랑이 세계를 구원한다는 도식에 불교적 순환론을 접붙인 뒤, 스미스 요원에게 믿음, 소망, 사랑을 설파하는 영화임에도 '지적인 것 좋아하는 먹물들을 매혹시킨' <매트릭스>의 장치들이 근원적인 철학의 질문들이라기보다는 영화의 포스트모던한 장식품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된 책은 <매트릭스로 철학하기>(슬라보예 지젝·윌리엄 어윈 지음, 이운경 옮김, 한문화 펴냄)다. 저자와 함께 토론 동아리를 하는 친구들은 (어쩌면 논술 교육식으로 도식화된 사고가 더 익숙할지도 모르는, 그리고 그게 문제라 할 수는 없다!) '빨간 약과 파란 약' 선택의 문제로 이 책을 읽어내고, '빨간 약'을 선택한다는 것이 어떤 삶을 살겠다는 것인지 그 무게를 알지 못한 채 빨간 약을 먹겠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가장 슬프고도 강렬한 부분은 <체르노빌의 목소리>(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은혜 옮김, 새잎 펴냄)를 다루는 부분이다. 솔직히 말해 한국 사회에서 스스로를 '진보 정당을 지지한다'고 하는 이들 중에도 (나를 비롯해) 녹색에 대해 막연한 호의는 있을지언정 무지한 경우가 많다. 마치 '선결 과제'에 대한 관점과 우선순위가 다르다고 핑계를 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우리가 어떤 미래를 살게 될지 외면하고 싶은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체르노빌 사태는 사랑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들었으며, 사랑의 감정에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사랑 때문에 2세에게 끔찍한 고통을 주고, 사랑하는 상대가 온몸에 핏줄이 터져나가 매일 밤을 피로 시트를 적시는 것을 갈아주며 온몸이 부풀어 올라 죽는 것을 '누군가는 해야 하는 국가의 일'을 했다는 말과 함께 받아들여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살 미래'가 아니라 '우리가 낳을 미래'에 대한 참혹한 현실을 상상하게 한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가까운 곳에 후쿠시마가 있다.

살기 위해 밀입국을 했으나 사소한 불운으로 물탱크에 갇힌 채 뜨거운 햇빛에 죽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뜨거운 태양 아래서>(가산 카나파니 지음, 윤희환 옮김, 열림원 펴냄)를 읽으며 김연수에게 문학을 묻고, <로드>(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펴냄)에서 종말론에서도 희망을 발견코자 하며, 코졸을 읽으며 오늘의 교육을 고민하고, <죄와 벌>(도스토예프스키 지음, 홍대화 옮김, 열린책들 펴냄)을 다시 읽는 활동가이자 고3 담임교사는 <환대하는 삶>(로버트 콜스 지음, 박현주 옮김, 낮은산 펴냄)의 도로시 데이를 소개하며 "가난한 이들과 어떻게 함께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대학 가면 다르겠지"라는 말로 고3들을 가르치지만, 졸업한 아이들이 대학을 그만두고 어두운 길거리에서 과일을 파는 모습을 마주치거나, 주말에 들린 도서관에서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졸업한 학생들에게 받는 인사에서 "대학 가면"이라는 말로 현실을 외면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저자가 실감한 '교육 불가능'은 마침내 이 아이들에게 농사를 배우자고 손을 내밀고 싶다는 결심으로 이어진다.

조금 개인적인 이야기를 덧붙이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대학을 다니며, 몇 번의 주거 실험을 해 본 끝에, 비슷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몇 명의 선배들과 함께 '공동체'를 꾸리고 싶다고 소망하게 되었다. 기본적인 모양은 사목과 공부가 함께 하는 공간이지만, 최소한의 생산성을 위해 사목하는 이들은 농사를 겸할 것을 고민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내가 할 줄 아는 일은 (과연 제대로 할 줄 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책을 만들고, 글을 쓰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릴 것 다 누리며 도시에서 자라온 청춘들이다. 남들에게 공동체의 지향점을 거창하게 설명하기 보다는 농담 삼아 "교회와 술집이 결합된 힐링의 공간에, 출판사가 결합된 협동조합 형태의 무엇이 될 수도 있으니, 와서 텃밭이나 같이 가꾸자"고 주변 사람들을 하나둘씩 꾀는 정도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 이 미래를 이야기 할 때마다 확신은 강해지고, 그 길이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절대 더 나아질 리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더 망가지지 않고, 망치지 않는 이 길 뿐이다. 농사와 공동체, 학습, 정신적인 측면을 이제 고민해보려는 것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오자. 역시 이 책을 '이 시대의 교양의 총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대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마케팅적 이유에서든 무슨 이유에서든 이런 콘셉트를 잡은 것은, 이 책의 말미에 저자가 강조하듯 공교육을 관두고 대안학교로 옮기게 된 저자의 '인문학 커리큘럼'의 작은 실험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이것은 10대를 위한 커리큘럼인 동시에, 20대, 그리고 더 나아가 '스스로를 시대에 속한 개인'이라 생각해본 모든 사람들에게 따라 가보기에 괜찮은 커리큘럼이 될 것이다. 게다가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책들 중 내가 읽어본 책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고전에 반열에 오른 책'들도 아니다. 이 책은 그렇게 또 다른 '녹색과 지성'에 걸쳐진 책들을 발견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책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하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이보다 감사한 일은 없다. 공동체와 미래의 살 방법을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이 책을 한번 쯤 펼쳐보기를 추천한다. 나 역시 많은 고민을 다질 수 있었다. 먼저 고민하고 실천한 이들의 삶은, 우리가 가보지 보지 못한 치열함의 이면이 되어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가야 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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