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집에서 극강의 이야기꾼을 만났다!

[프레시안 books] 폴 오스터의 <선셋 파크>

나는 폴 오스터의 팬이다. (이렇게 밝히는데 한 점의 주저함도 없다. 심지어 그를 좋아하는 이들이 만든 인터넷 카페에도 가입되어 있다.) 그의 소설 대부분을 소장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가 쓴 무엇인가가 책으로 출간된다면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구입할 것이다. 내겐 무조건 믿고 보는 작가가 몇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폴 오스터다. 소설마다 미세한 편차는 존재하지만 이만큼 일정한 수준의 멋진 글을 주야장천 뽑아내는 작가도 드물다. <달의 궁전>(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열린책들 펴냄)을 읽고 깊이 매료된 후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그의 소설을 한 편씩 읽어 나갔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그의 팬이 되어 있었다. 이 현상은 폴 오스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경험일 것이다. 심지어 나는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다.

"폴 오스터의 소설을 아직 읽지 않았거나 그를 모를 수는 있다. 하지만 그의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는데도 그를 좋아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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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셋 파크>(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열린책들 펴냄). ⓒ열린책들

작가가 독자에게 신뢰감을 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어떤 독자가 소설 한 편을 좋게 읽을 수는 있다. 하지만 책에서 받은 감동과 인상이 작가에게까지 이어지기 위해서는 좋은 작품을 계속해서 써내야 한다. (나도 소설을 쓰지만 좋은 소설을 쓰기란, 잘 쓰기란, 심지어 계속 그렇게 쓰기란 진짜 힘든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해야 하고, 매 작품마다 최선을 다해야 하며, 결과적으론 소설이 좋아야 한다. 독자는 참으로 가혹하다. 한편의 소설이 별로라고 생각되면 가차 없이 등을 돌리거나 그 작가의 최고의 소설은 앞으로 나올 소설이 아니라 예전의 소설이었다고 못 박아 버린다. 때문에 작가 입장에서 작가를 신뢰한다는 독자의 감상은 어마어마한 칭찬이다. 그런 의미로 작가의 입장에선 폴 오스터가 부럽고 독자의 입장에선 고맙다.

폴 오스터를 한 마디로 표현해야 한다면 "극강의 이야기꾼"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상황과 사건으로 일단 일을 저지르고, 섬세하고 논리적인 거짓말로 그것들을 모두 해결한다. 그리고 기어이 독자를 자신의 편으로 설득시켜낸다. 그의 소설을 두고 "우연의 미학"이라고 평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나는 종종 그가 만들어내는 복잡다단한 서사의 길을 따라가다가 현기증을 느끼곤 하는데, 처음에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려고 이렇게 시작하나 싶다가 나중에는 결국 감탄하고 만다.

하지만 그의 소설을 긍정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의 서사가 드러내는 인간의 실존이 쓸쓸하고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쓸쓸함은 슬픔보다 강력한 정서다. 슬픔은 시작과 끝이 있다. 정점이 있고 그 이후에 사그라지는 소강 상태가 있다. 그래서 강렬한 슬픔을 느끼고 난 후에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 슬픔 이후에 찾아오는 감정은 슬픔과 상반되는 정서다.

쓸쓸하다는 정서는 정말 대책이 없다. 시작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언제 끝날지도 예측할 수 없는 그저 계속되고 유지되는 무력한 전투와도 같다. 인간이 삶을 통해 겪는 비극은 슬픔보다는 쓸쓸함에 가깝다. 나는 독자를 무턱대고 엄청난 슬픔 속에 몰아넣는 소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어쨌든 희망은 있다는 닳고 닳은 행복한 약속처럼 무책임하다. 한때는 '해피'든 '새드'든 소설이라면 독자에게 뭔가 분명하게 이해되는 서사와 그에 따른 명확한 엔딩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살다보니 그런 것이야말로 진짜 나쁜 종류의 허구라는 것을 깨달았다.(인간의 삶속에서 그렇게 명쾌하게 정리되는 것들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좋으면 곧 나빠지고, 나쁘면 곧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며, 운명처럼 다가오는 사랑이나 예기치 않은 행운 같은 것도 드물다.)

폴 오스터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은 그 어떤 소설속의 인물보다 소설적이다. 어떻게 보면 화려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 끝에 소금결정처럼 남는 것은 인물의 이면에 감추어진 고통과 어떤 쓸쓸한 정서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힘이 누구보다 탁월한 작가는 그의 능력을 단순히 이야기의 재미와 서사의 기법을 높이는 데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깊이 있게 다루는데 사용한다. 그는 이야기의 재미뿐만 아니라 삶의 풍경 속에 깃든 쓸쓸함까지 그려낼 줄 아는 훌륭한 작가다.

그렇다면 이토록 신뢰하는 작가에게 갖는 독자의 기대와 소망은 무엇이겠는가? 단순하다. 계속 좋은 소설을 써주는 것이다. 나 역시 기대하고 기다렸다. 그의 새로운 소설을 말이다. 그런데 마침 <선셋 파크>(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열린책들 펴냄)가 출간되었다. 사실, 그를 좋아하는 독자들은 이 책이 출간도 되기 전에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책이 나오기를 기다렸을 것이고 지금은 대부분 구해서 읽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어제까지 <선셋 파크>를 읽었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혹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의 소설은 이번에도 좋았다. 그는 여전히 근력이 좋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작가였다.

마일스 헬러는 버려진 집의 쓰레기를 처리하는 노동자다. 하지만 그는 과거 유명 대학에 다녔던 촉망받던 학생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과 보장된 미래를 모두 버리고 미국 전역을 떠도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던 중에 마일스 헬러는 필라라는 소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미성년자와 사랑에 빠진 남자의 인생은 예기치 않는 방식으로 꼬이게 되고 그는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부모님의 집이 아닌 빈 집으로 들어간다. 그곳엔 옛 친구 빙과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려 그림을 그리는 엘런, 누구보다 똑똑하고 좋은 품성을 지녔지만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는 앨리스가 살고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책을 통해 확인하시길. 줄거리를 요약하기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

<선셋 파크>의 서사를 거칠게 정리해봤다. 언뜻 보면 자신의 삶에 실패한 청년들이 꿈도 미래도 없이 빈 집에 모여 숨어 사는 잉여인간 소설처럼 보인다. 하지만 폴 오스터는 이 서사를 갖고 특유의 마법을 부린다. 특히 이번 소설에서는 등장하는 인물들이 서사의 중심에서 한 명도 소외되지 않는다. 인물들 각각의 이야기를 하나씩 하나씩 모두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서사적 기법을 통해 <선셋 파크>가 도달하는 지점은 빈 집에 모여 살고 있는 무능력한 청년들의 현실이 아니라 각 인물마다 내면 깊숙한 곳에 숨기고 있는 과거의 방이다.

인물들이 감추고 있던 내밀한 방을 확인한 독자들은 소설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는 서사의 안과 밖이 뒤바뀌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독자 자신이 갖고 있는, 혹은 숨겨왔던, 혹은 모른 척 하고 지냈던 은밀한 방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마일스 헬러, 필라, 빙, 엘런, 앨리스 등등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이 결코 허구가 아니며 가짜가 아님을. <선셋 파크>의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과거에 겪었던 삶의 통증은 특수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나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사적인 동감과 공감은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재미와 감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앎이고, 비로소 가능해지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해이며, 알고 이해한 이들끼리만 나누어가질 수 있는 비밀스러운 위로다.

각설하고 우리 <선셋 파크>의 허름한 빈 집에 모이도록 하자. 그곳에서 수다도 떨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자.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있으면 사랑에 빠지는 것도 좋겠다. 그나저나 책 읽기 참 좋은 날씨다. 이런 날 공원 벤치에 앉아 책을 읽어보자. 마일스 헬러처럼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르니.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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