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의 주문은 풀렸다! 지옥문을 닫을 자는?

[2012 '올해의 책'] 니콜 슐만의 <워블리스>

'프레시안 books' 송년호(121호)는 '2012 올해의 책'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프레시안 books'가 따로 '올해의 책'을 선정하는 대신, 1년간 필자·기획위원으로 참여한 12명이 각자의 '올해의 책'을 선정해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다양한 분야, 다양한 장르의 이 책들을 2012년과 함께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012년 올해의 책'으로 내가 뽑은 것은 번역서다. 게다가 일반 서적이 아니라 '그래픽 노블', 즉 미국식 만화다. 올해 나온 우리말 저자의 사회과학 저작들 중에서 볼 만한 게 없어서는 아니다. 비록 번역서이고 남의 나라 역사책이기는 하지만 다른 어떤 책보다도 현재 한국 사회에 필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서다. 이게 굳이 다른 책들을 제치고 이 책 <워블리스>를 집어든 이유다.

'워블리스(wobblies)'는 1905년 창립한 세계산업노동자동맹(IWW)의 조합원을 부르던 말이다. IWW는 그야말로 '좌빨' 노조였다. 자타공인 '전투적' 노동 운동 지도자였던 빅 빌 헤이우드, 1920년 대통령 선거에 사회당 후보로 나가 100만 표 가까이 득표하게 되는 유진 뎁스, 선거까지 거부할 정도로 비타협적이었던 혁명적 사회주의자 대니얼 드 리온 등이 이 노동조합의 창립 발기인들이었다. 노동조합보다는 정치 조직에 가까운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였는지 조합원 숫자가 한창 때도 10만 명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는 못했다.

▲ <워블리스 : 그래픽 노블로 보는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의 역사>(니콜 슐만 지음, 폴 불 엮음, 황동하 옮김, 서해문집 펴냄). ⓒ서해문집
그런데도 IWW는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그만큼 치열한 투쟁 때문이었다. IWW는 당시 미국 노동자들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었던 광산 노동자, 여성 노동자, 유색인 노동자들을 조직했다. 그리고 파업이라는 무기를 사용하길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수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했다. 오죽 하면 <워블리스> 전체가 마치 '순교자 열전' 같은 느낌을 주겠는가. 이 책은 정말 눈가에 물기가 맺히지 않고서는 읽어 내려갈 수 없다. 이 모든 게 미국 역사상 가장 개혁적이었다던 이른바 '혁신주의자' 대통령들(시어도어 루스벨트나 우드로 윌슨)의 시대에 벌어진 일들이다.

사실 창립자들의 바람과는 달리 IWW가 미국 자본주의를 뒤엎지는 못했다. 오히려 미국 자본주의가 IWW를 짓밟았다. 하지만 IWW가 한 가지 확실하게 바꿔낸 게 있었다. '노동조합'에 대한 미국 민중의 상식이 그것이었다. IWW 등장 전까지만 해도 미국 사회에서 '노동조합'이란 기술 숙련도가 높은 백인 남성 노동자들이나 가입할 수 있는 또 다른 '특권' 조직이었다. 그래서 당시 2800만 명에 달하던 미국 노동자들 중에서 미국 노총(AFL) 가입자의 비중은 14분의 1에 불과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아예 1퍼센트만 조합원이었다. 지금 우리 상황과 많이 비슷한 데가 있다.

바로 이 상황을 돌파한 게 IWW였다. 워블리들은 '만인을 위한 조합'을 내세우며 임금 노동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닥치는 대로 조직했다. 떠돌이나 다를 바 없던 미숙련 노동자들을 대거 가입시켰고, 흑인이나 아시아인들도 적극 받아들였다. 이런 경험이 '노동조합'에 대한 상식을 조금씩 허물어갔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을 잊지 못한 이들이 결국 대공황 와중에 노총에 맞서 산업별 노동조합을 새로 조직하기 시작했다. 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가 모습을 드러냈고, 산업별 노동조합 시대가 시작됐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도 워블리들의 운동 같은 게 아닐까. '노동조합'은 힘 있는 대기업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에게나 가당한 조직이라는 상식을 깨고 비정규직, 중소기업, 여성 노동자들을 한데 모아나가는 운동 아닐까. 그래서 그 '하나의' 조합의 힘으로 지금의 이 답답한 모든 교착 상태(재벌 독재, 정규직-비정규직 분열, 세대 간 분열 등등)를 깨나가는 게 아닐까.

이번 대선과 함께 1987년 대투쟁이 한국 사회에 남긴 에너지도 고갈된 것 같다. 이제 또 다른 87년이 필요한 것도 같다. 하지만 새로운 87년이 가능하려면, 우리는 87년의 오류와 한계 또한 명확히 직시해야 한다.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대기업 중심의 기업별 노동조합 체제는 그 중 하나다. 이 거대한 벽을 넘어뜨리길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워블리스>를 권한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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