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R 협상은 이전의 가트(GATT) 협상과 달리 농산물을 본격적으로 무차별적 자유 무역 이념에 바탕을 둔 GATT의 규율 대상에 포함시킨 협상이었다. 그래서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당시 정부가 위안으로 삼은 '쌀시장 개방 유예'에 만족할 수 없었다.
농산물 시장은 관세화 내지 비관세화 방식으로 전면 개방되었다. 그 선배는 그에 따른 사회경제적 파장과 농업 농촌의 변화를 자신을 포함한 농민들 전체의 삶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저항하면서 대안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1990년대 후반 친환경 농업과 대안적 협동 조합을 통한 지역 농업 조직화 운동에 가담하고, 2000년대 초반에는 민주노동당의 농업 정책을 담당하면서 반 세계무역기구(WTO), 반 신자유주의 투쟁과 더불어 대안적 실천을 통해 농업 농촌의 공익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농민들만의 처절한 투쟁으로는 정부에 의한 신자유주의 농업 개방을 막아낼 수도 없었고, 그것만으로 미봉책에 그친 정부의 막대한 보조금 지출에 대한 비농업인의 따가운 시선을 바로잡을 수도 없었다.
그보다 더 결정적으로는 먹을거리 안전과 생태계 보전에 대한 도시 소비자들의 관심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농업 농촌에 대한 국민들의 친밀감이 커져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농업 농촌의 공익적 가치에 대한 비농업인의 공감, 도시민과 농민의 연대를 가시적인 모습으로 조직할 수 있다면 신자유주의 농업 개방을 보다 효과적으로 막아내면서 농업 농촌의 대안적이고 지속 가능한 개발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애틀, 도하, 칸쿤으로 이어진 농민들의 반 WTO 투쟁이나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투쟁과 함께 '농업의 다원적 기능에 대한 사회적 합의 필요성 제기', '질 좋은 국산 농산물을 사용하는 무상·직영 학교 급식의 실현운동', '농민 단체와 시민 단체가 함께 했던 우리 쌀 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 운동' 등은 2000년대 초반 민주노동당과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그리고 시민 운동이 함께 그러한 대안적 실천을 모색한 결과였다.
지금 이러한 대안적 실천은 친환경 농업과 생활협동조합의 규모 확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 의한 친환경 무상 급식의 도입 확대, 지역 먹을거리(local food) 운동과 도시 농업 운동의 태동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식생활 교육 운동과 농업 농촌의 내생적 발전 모색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이 과정에서 전농이나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같은 기존의 농민 운동 조직이 유지 발전되고, 친환경 농업 단체 등 다양한 농민 조직이나 생활협동조합, 학교 급식 운동 시민 단체 등 많은 농업 농촌 연관 조직이 생겨나고 있으며 이들의 연대 투쟁은 더욱 더 긴밀해지고 있다.
땅의 사람이 주체인 '비아캄페시나'
| ▲ <비아캄페시나 : 세계화에 맞서는 소농의 힘>(아네트 아우렐리 데스마레이즈 지음, 허남혁·엄은희·이소영·박신규 옮김, 한티재 펴냄). ⓒ한티재 |
이 책은 다양한 인종, 문화, 생산력 수준과 기후·생태 조건 아래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땅의 사람들'이 주체인 '비아캄페시나(Via Campesina, 농민의 길)'가 기업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농업 모델의 확산에 저항하는 국제 연대를 성공적으로 실천하고 있다고 전한다.
부연하면, 이 책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유포하고 있는 국제기구나 농식품의 생산에서 소비까지 모든 과정을 지배하고 있는 초국적 농기업에 맞서는 조직으로 성장하고 있는 비아캄페시나의 반세계화 운동을 이론적 맥락과 경험적 사례, 그 의미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비아캄페시나가 1993년 5월 벨기에 몽스에서 모여 공식 출범한 때부터 이 조직과 함께 한 저자 아네트 아우렐리 데스마레이즈는 여성 농민 출신이자 대학 교수이다. 그녀는 비아캄페시나의 주된 목표가 "식량 주권 개념에 입각한 근본적으로 다른 농업 모델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소개하면서 "비아캄페시나는 연대와 단결을 통해 '땅의 사람들'이라는 집단적인 농민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등의 노력을 수행한다"고 말한다.
세계화에 맞서는 비아캄페시나
비아캄페시나에게 적대적 존재는 '녹색 혁명'으로 불리는 농업 근대화와 초국적 농기업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농업의 세계화이다.
1940년대부터 시작된 '녹색 혁명 농업'은 각종 농업용 시설·자재·투입물을 석유에 의존하는 농업이자, 농업의 지역성과 역사성 및 생태적 다양성을 경시하는 농업 시스템이다. 초국적 농기업은 소위 '글로벌 푸드 시스템'을 통해 세계의 농식품 생산과 유통 및 소비 과정을 지배하면서 세계 각지 농민들의 빈곤화를 강요하고, 식품 안전을 위협하며, 생태 환경을 파괴하는 주범이다.
저자는 그러한 농업의 근대화와 세계화가 농민들을 생산자가 아닌 '전문가 지식의 수혜자'로 만들고, 종자의 선택에서부터 생산 과정, 유통 과정에 이르기 까지 초국적 농기업에 지배를 받는 존재로 전락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전 세계 각 지역 마다 농민들의 규모도 급격하게 감소하고, 남반구 북반구 할 것 없이 농민들의 빈곤은 더 심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농업 근대화와 세계화에 맞서서 투쟁하는 비아캄페시나는 'WTO를 개혁할 수 있다'고 타협하는 많은 NGO나 IFAP(국제농업생산자연맹)의 인식을 경계하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체제의 급진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비아캄페시나의 구상은 무엇인가?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계속되는 궁금증은 'WTO와 초국적 농기업에 의한 농업의 근대화, 세계화를 투쟁으로 저지하면서 동시에 대안적인 농업 농촌의 개발을 실현하는 방안에 대해 비아캄페시나는 어떤 구상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저자는 비아캄페시나는 "생계를 개선하고, 지역 먹을거리 생산을 증진하며, 민주적 공간을 열어주는" 농촌의 변화를 목표로 한다고 설명한다. 또 비아캄페시나는 "그러한 변화는 지역공동체가 지역의 생산 자원에 대한 접근과 통제력을 더 많이 획득할 때만 일어날 수 있으며, 그 결과 사회적·정치적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준비하고, 어떻게 실천해야 그러한 변화를 주도적으로 가져올 수 있을까?
저자는 비아캄페시나가 "조직, 협동, 공동체를 활용하면서 '개발'을 재규정하고 사회 정의, 생태적 지속 가능성, 농민 문화와 농민 경제를 존중하는 (…) 소규모 농업협동조합, 지역 종자 은행, 공정 무역 벤처에서부터 전통적인 영농 관행의 회복에 이르기 까지 가능한 다양한 대안들을 수반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조제 보베로 대변되는 '프랑스농민연맹'이 지속 가능한 농업을 실현하기 위해 도시민과 연대하고 미디어를 활용한 사례나 국제적 수준에서 지역조직의 결합을 강조한 사례도 소개한다.
저자의 그러한 설명이나 소개는 국내의 반신자유주의 농업 농촌 운동을 전개하는 조직이나 운동 세력이 주목해야 하는 대목이다. 한 가지 보충해서 의견을 제시한다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의한 농업 농촌 개발의 저지나 대안적인 발전 모델의 실현은 한 국가가 처한 경험과 상황을 넘어서서 국제적인 연대 투쟁과 협력을 통해 가능하겠지만, 그렇더라도 한 국가 차원의 그것에 대한 경험과 실현 여부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국내에서의 대안적인 농업 농촌 개발의 추진은 국제적 차원의 반신자유주의 농업 농촌 운동이 확산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부디 이 책을 계기로 사회적 합의를 통해 농업 농촌의 공익적 가치가 인정되도록 하기 위한 국민 농업 실현 운동이 촉발되고, '농민은 소비자의 건강을!, 소비자는 농민의 생활을!'이라는 구호가 확산되길 기대한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