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웅 목사가 풀어낸 창세기의 감동

[서평] 창세기에 감추어진 생명과 평화, 그리고 희망의 이야기

김민웅 목사의 <창세기 이야기>(전 3권, 2010년 3월 간행, 한길사)가 출간된다는 소식에 과연 어떤 내용일지 궁금했었다. 신학자이고 목사지만 동시에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중견 사회과학자인 그의 해석이 자못 궁금했기 때문이다. 책이 도착하기 무섭게 첫 권('생명의 빛')을 읽었다. 그리고는 작은 충격을 받았다.

창세기의 이야기를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로 '변신'시킬 수 있을까. 낮은 자, 버려진 자, 이방인과 함께하고 이웃 사랑과 용서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바친 예수의 모습(<신약>의 이야기)과 달리, <구약>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한 전지전능의 존재이지만 때로 질투하는 하나님(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 '지혜'를 얻자 영원한 '생명'까지 얻게 해서는 큰일 나겠다고 사전 차단한 하나님), '못된' 하나님(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바치라고 한 하나님), 배타적인 하나님(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의 자손만을 축복하고 세상 지배권을 준 하나님), 보복하고 저주하는 하나님(하나님의 자손을 건드리는 자, 명령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무섭게 보복하고 그 자손 자손만대를 저주하는 하나님)이 아니었던가. 천지창조도 각 민족의 신화마다 나오는 단골메뉴 아니었던가.

ⓒ프레시안
필자는 김 목사가 천지창조에서 노아의 방주에 이르는 하나님의 역사를 생명과 평화의 이야기, 희망과 사랑의 감동드라마로 고의로 '오독(誤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가 창세기를 잘못 읽었던가. 아니 유대인으로 2차대전 당시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목격한 칼 포퍼(K. Popper)도 비극(게르만 선민사상과 타 인종 학살)의 한 뿌리가 구약이 공유하고 있는 유대 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털어 놓지 않았던가. 포퍼는 '열린' 민주주의 사회를 철학적으로 정초한 20세기 대(大)철학자요 독일 사민당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두 번째 책을 펼쳐 읽던 어느 날 우연히 김 목사를 만났다. '아름다운 오독(誤讀)'이란 제목으로 서평을 쓸까 한다는 나의 말에 그는 짐짓 놀라며 이내 곧 "마저 다 읽어보라"며 미소 짓고 떠났다.

아니나 다를까, 2권과 3권을 읽으며 필자는 얕은 앎에서 비롯된 선입견이 뿌리째 흔들리는 또 한 차례의 '충격'을 받게 되었다. 아브라함에서 야곱으로 이어지는 여정을 다룬 2권('길 떠나는 사람들')에서 김 목사는 정착할 만하면 떠나고 또 떠나기를 거듭해야 했던 아브람의 이야기를 해설하며, 우리가 익숙한 것과 결별하고 때로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떠나는' 용단을 내릴 때에만 아름다운 삶, 생명과 평화와 진리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감동적으로 일깨우고 있다.

보는 대로 보인다고 했다. 이성의 눈으로 보면 역사의 이성이 보인다고 헤겔이 말했다. 비록 익숙하지만 진정한 의미 해독이 쉽지 않은 창세기를 나는 거부와 적대의 시선으로 읽었고, 김 목사는 생명과 평화와 희망의 마음으로 해독하여 창세기를 숨은 진리를 찾아낸 건가. 들어서는 글('마음을 새롭게 하는 성서 일기')에서 김 목사는 창세기의 참 의미에 다가가기 위해서 상투적이고 도식적인 선입견을 버릴 것을 촉구하는데, 나는 이미 선입견("구약은 배타적 유대 메시아사상이다")에 사로잡혔었나 보다.

ⓒ프레시안
그의 창세기 이야기는 번역투의 난해한 해설로 채워진 여느 신학 해설서와는 다르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신앙인만이 아니라 특히 일반 독자와 젊은이들을 위해 만든 책이라 그럴까. 쉬운 우리말로, 또 과거와 현재, 우리 시대의 아픔과 희망을 함께 아우르고, 창세기 인물들의 아름다운 행적은 물론 인간적 허물과 한계까지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가운데 독자를 깊은 자기성찰로 유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실수, 방황, 고뇌는 물론이고 독자들이 간과하기 쉬운 주인공의 내적 갈등과 거듭남의 증거를 탁월한 성서 분석을 통해 드러내어, 각 사건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풀어낸다. 우리 시대의 과제인 여성, 소수자, 생명, 평화, 정의의 문제도 창세기와 현대를 가로지르며 재조명한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어째서 "창세기가 종교의 유무나 차이를 떠나 인류 차원의 정신유산이 될 수" 있는 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야곱의 귀환과 요셉의 삶을 다룬 3권('넘치는 축복')은 더 감동적이다. 창세기에서 가장 큰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 요셉 이야기(버려지고 팔려가고 갇힌 삶을 살다가 극적으로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가족과 재회하는 이야기)는 물론 그 자체로서 극적이다. 하지만, 그 내용 중에는 보통 사람은 알 수 없는 에피소드, 용어, 이름 등이 무수히 섞여 있어 온전한 이해가 어렵다. 김 목사는 친절한 히브리어 해설, 신학해설, 역사적 맥락 해설을 통해 그 미지의 여백들을 채워 우리에게 야곱과 요셉 이야기의 핵심과 교훈을 밝게 비춰준다.

김 목사의 잔잔한 설명을 읽다보면 결국 요셉 이야기는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 총리가 되었다는 인생역전의 성공드라마가 아니라,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버리지만 도리어 그것을 취하여 머릿돌로 쓰는 하나님", "인간은 선한 것도 악하게 끌고 가지만 악한 일도 선한 열매를 거두는 계기로 바꾸는 하나님"의 이야기요, 버려지고 박탈당한 때에 오히려 내면의 힘을 키워 결국 세상의 평화와 의를 이루는 감동의 이야기로 '제자리'를 찾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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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주류 기독교가 기복(祈福)신앙으로 흐르고, 전 지구적으로도 종교적 근본주의가 급속히 퍼지고 있다. 성장과 시장경쟁이 만고의 진리처럼 통용되는 가운데 노동과 소수자 차별, 사회적 양극화, 빈곤과 전쟁, 생명과 생태 파괴가 심화되는 반면, 희망의 사회적 대안(운동)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해서일까. 대중적 절망의 빈틈을 정치적 보수주의와 구원 약속의 종교적 근본주의가 메우는 현실이다. 목마른 대중을 '죄(罪)의식'으로 몰고, 무서운 심판자 하나님 앞에 세우며, 성서와 예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제도의 규율(주일성수, 십일조) 준수가 구원의 지름길인 양 설교하고, 모든 이방타파(타 종교와 비非서구문화 부정)가 하나님의 가르침인 양 확신토록 열 올리는 게 오늘날 기독교의 한 모습이다.

김 목사는 강조한다. 예수는 산상수훈에서 계율을 준수하고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 나라가 너희 것이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라.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사람이 되어라. 그런 사람에게 복이 있고 "하늘나라는 바로 그들의 것이다."(마태복음 5: 3-10).

김 목사는 <창세기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생명·자유·해방의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편에 서서 그 사랑을 관철하십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새롭게 거듭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새롭게 창조되는 시간이 곧 '태초'입니다. 태초의 시간은 멀고 먼 태곳적 알 수 없는 원초적 어느 지점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이 변화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시간입니다..... 우리 자신이 창세기의 저자가 되는 겁니다.....창세기는 그 문을 여는 열쇠를 우리 손에 쥐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새롭게 창조되는 '태초의 시간'은 어느 때도 멈추지 않습니다."

월터 브루크만은 <예언자적 상상력>에서 이렇게 말한다. 솔로몬의 이야기가 왕국의 이야기, 제도와 교리의 이야기라면 창세기와 모세 이야기는 핍박받는 히브리인의 고뇌와 꿈, 해방과 희망의 노래라고. 전자가 산문(정신)이면 후자는 내일의 희망을 찬미한 시(정신)라고. 문득 김 목사가 표지화를 그린 화가이지만, 시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은 난해함과 군더더기가 없다. 또 내용과 성서해석에 희망과 평화, 생명과 빛이 가득하다. 생명이 새롭게 창조되는 창세의 시작은 언제나 '지금 그리고 여기'라는 김 목사의 말을 음미하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후 인간의 탄생과 그 변모, 에덴으로부터의 추방과 역경 그리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다룬 1권을 다시 읽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김 목사의 <창세기 이야기>는 아름다운 오독이 아니라 창세기에 감추어진 참 교훈의 드러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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