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현대사 뒷모습 <2>김종필의 좌익 활동

"고향에서 남로당 청년운동"

이 문서는 1963년 한국 대선 직전 주한 미 대사관의 그레고리 헨더슨이 작성, 본국에 보고한 박정희ㆍ김종필의 좌익활동 전력에 관한 보고서중 하(下)편이다.편집자

***Ⅳ 그 후의 연관들**

***a. 김종필**

1960년 12월에 ‘16인 장교사건’에 개입되어 군복을 벗을 때까지 김종필은 상대적으로 무명의 장교로, 일부 연수 기간을 제외하고는 군 생활의 전부를 G-2에서 보냈기 때문에 군인으로서 출세할 가망은 별로 없었다. 그러므로 전기(傳記) 기록도 드물다. 박정희가 대구 사범학교 시절을 조용히 보냈던 것에 비해, 김종필의 서울 사범대학 시절은 그렇지 않았다.

1946년에 미군정은 서울대 사범 대학을 비롯해 몇 개의 대학을 통합하려고 했다. 그 결과 일부 대학, 특히 좌익 교수단과 학생들 사이에서 격렬한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미군정의 명령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독립 지위를 상실하면 미국의 감시가 강화될 것을 우려했다. 사범 대학은 적극적으로 투쟁했다. 이 싸움에서 좌익의 입장을 견지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김종필과 중앙정보부에 있는 그의 측근 김용태, Korean Republic의 발행인인 김동성, 동양 통신(Orient Press)의 김규환, 전 공보부 장관 이원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 개입된 사람들을 철저히 조사해 보면, 분명히 공화당 총무인 김동환을 비롯해 더 많은 사람들이 드러날 것이다. 박정희가 사관학교에서 조직을 형성했던 것과 거의 같은 때에 그의 조직과 비슷한 또 다른 조직이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질 수 있다. 일부 소식통에 따르면, 김종필과 김용태는 불온한 사건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사범 대학에서 퇴학 처분을 받고 대전 근처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 남로당으로 지역 청년들을 전향시키는 일을 했다고 한다.

김용태는 1948년에서 1950년까지 장항 여자 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김종필과 김용태는 그 지역의 좌익분자들과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 지역에서 강한 세력을 누리고 있던 이범석의 우익단체와 충돌을 일으켰다. 이 사실은 쿠데타의 지도부들이 처음부터 이범석 장군과 그를 따르는 청년단에 강한 적개심을 보였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좌익분자들에 대한 단속이 진행되자, 일부 좌익분자들은 체포되는 것이 두려워 당시 조직 확대를 위해 청년들을 필요로 하던 장교 양성소와 군방첩대(CIC)에 들어가는 길을 모색했다.

김종필은 여수 순천 사건을 계기로 장교 후보 선발에 보다 엄격한 안보 규정을 적용하기 직전인 1948년 8월에 장교 양성소의 예비학교인 지도자 양성소에 입학했다. 그는 동기생들에게 지도력을 발휘해 자신의 조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그곳을 졸업하였고, 곧 G-2에 들어가서 박정희를 만나고 알게 되었다. 그는 절친한 친구인 김용태를 G-2의 문관으로 데리고 오기도 했다.

***b. 가족과 친구집단**

박정희와 김종필, 김용태의 가족들에게 좌익과 공산주의 영향이 퍼져 있다는 사실은 조기 환경 요소의 효과를 여실히 입증해준다.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별로 없지만, 공산주의자였던 것으로 보이며, 1946년 10월 2일 시위와 그로부터 1년 뒤에 다시 대구를 휩쓴 격렬한 좌익 시위를 지도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상희는 북한의 전 외교통상부 부위원장을 지낸 황태성과 절친한 관계였음이 분명하며, 황태성은 1946년의 시위 후 대구를 떠났다가 1961년 9월 1일에 간첩 임무를 띠고 박의장과 접촉하기 위해서 서울로 돌아왔다.

박상희의 또 다른 동료는 한국 중앙정보부의 정책 자문으로 있는 윤장혁으로, 그는 1948년의 대전 폭동을 지도했으며, 1955년 11월 7일 북한을 위한 간첩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박상희가 정확하게 언제 어떤 상황에서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공산주의 지도자로서 1946년에 시위를 주동한 죄로 미군정에 의해 사형된 것으로 보인다. 김종필의 장인이 바로 박상희이며, 김종필의 처는 아버지가 죽은 뒤 거의 박정희의 딸처럼 키워졌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뿐만 아니라 김용태를 비롯한 남편 측근들의 지위 유지에 적극적이라고 한다.

김종필의 6형제 가운데 전부는 아니지만 몇 명은 1950년에 북한이 남침했을 때 공산주의자들에게 협력한 것으로 보인다. 6형제 가운데 김종식은 그의 걸출한 형제 김종락이 인정하듯이 살아 있다면(그럴 가능성이 있다) 북한에 있을 것이다. 김종필의 또 한 형제는 충청남도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협력한 죄로 동네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고 현재 고향 마을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한 형제는 남로당원으로 한국 전쟁에 참여했지만 그 후 김종필이 그의 체포를 막았다고 한다. 김종필 형제가 남로당에 협력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살던 동네에서는 매우 잘 알려져 있으며, 그것은 모든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온 원인중 하나였다..

김종필과 절친한 사이인 김용태의 가족도 그 지역에서는 김종필의 가족과 마찬가지로 악명이 높았다. 1945년 이후에도 좌익분자였으며 남로당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김용태는 공산주의자들이 대전을 점령했을 때 고위직에 임명되었으며, 그의 3형제 역시 공산주의에 협력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은 소련에서 전쟁 포로 생활을 한 뒤 모스크바 대학을 다니다가, 현재는 한국에 돌아와 공산주의 스파이 활동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1945년에서 1951년까지 좌익분자나 공산주의자로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현재 한국 중앙정보부와 박-김 조직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으로는 중앙정보부의 장태화, 조칠기, 반미적이고 중립적인 부산일보의 발행인인 황용주, 서울대학교 교수이자 전(前) 고문인 김성희, 재무 고문이자 운영요원인 김성곤 등이 있다.

한국의 군사 정부에 연결돼 있으면서 한국 전쟁 당시 북한에 협력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이보다 훨씬 많다. 김성곤과 절친한 사이로 과거 북한군에서 명예 진급한 장교였던 김규환과 같은 인물이 여기에 포함된다. 김규환은 1950년대에 도쿄에서 공부할 때 당원증을 가진 정식 공산당원이었으며 현재는 미 대사관 연락책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이 외에도 현재 공화당의 지도자인 김명구, 공화당 연구부 책임자인 서인석, 전 남로당원이었으며 현재는 공화당 노동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이귀섭, 전 남로당원이자 현 공화당원인 강익모, 과거 열렬한 공산당원이자 현 공화당원인 김혁, 김종필의 전(前) 법률 고문이자 현 공화당원인 이종국, 중앙정보부를 위해 주식 시장을 조작하는 윤응상 -그는 1956년 간첩 사건에 연루된 전(前) 공산주의 동조자로, 그의 형제인 윤응안은 당시의 간첩 사건으로 아직도 복역중에 있다- 과 박정희의 정치 고문인 강태일을 비롯해 현재 공화당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몇몇 젊은 정치인들 중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공산주의에 동조했던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다. 패밀리 그룹으로부터, 전체 동료 집단 내부로 김종필과 김용태, 그리고 그들의 측근의 추천으로 현재에 위치에 오른 매우 의심스러운 네트워크가 퍼지고 있다.


***Ⅴ 운영방식**

군사 정부가 만든 국가 구조는 박정희와 김종필, 그리고 그들의 고문들이 전체주의적인 형태를 창출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a.
그 첫 번째 증거는 한국의 중앙정보부로 그것은 사실상 국가 내의 국가 역할을 한다. 중앙정보부에서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고문들이 정책, 안보 체제, 대부분의 중요한 외무와 경제문제, 사법, 언론, 라디오, 심지어는 문화행사의 중요한 부분까지 통제하고 있다. 민주적인 통제는 말할 것도 없고 사소한 예산 문제에까지 결정권을 허락하지 않는 중앙정보부는 전체주의적인 통제기관 이다.

b.
‘국가 재건 운동’은 대규모 조직으로, 겉으로는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인사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지만, 사실상 이들은 대부분 육군 준장 출신의 부의장과 그의 참모들의 하수인에 불과하다. ‘국가 재건 운동’은 농촌 지역의 젊은이들을 선동해서 ‘공중 도덕 회복’과 각종 주택개량 사업(기와지붕 만들기, 담 만들기)에 참여하게 만든다. 이 조직의 매력은 한국 생활의 전통적인 ‘봉건주의적인’ 형태를 반대한다는 데 있다. 이 조직은 필요할 경우에 폭력적인 정치 행위에 쉽게 전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공산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농촌 청년 조직과 유사하다.

c.
정부의 주요 정치기구인 공화당의 구성을 보면 대외적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인물들은 대개 중앙정보부에서 임명된 정체를 알 수 없는 직원들로 구성된 내부 사무 조직의 하수인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 이 조직이 구성되는 방법은 매우 의심스럽다. 신원을 알 수 없는 대령 한 명과 소령 두 명이 대학 교수나 직장이 없는 무명 정치인, 혹은 지식인에게 주로 밤에 접근해, “조국의 이익을 위한” 막연한 계획에 동참하라고 돈이나 협박으로 그들을 유인한다. 그 계획에 동참을 거부하는 사람은 통금 시간 후에 조사에서 풀려나게 되며, 그렇게 되면 그들은 통금 위반으로 체포되거나 그들이 속한 단체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d.
한국인들은 일제시대 때부터 스파이와 앞잡이에게 통제 받는 데 익숙해 있다. 군사 정권은 이 제도를 확대 정비해 이승만 대통령 시절보다 더 큰 규모로 만들었다. 돈을 받고 야당 내에서 분쟁을 조장할 책임을 맡은 ‘사쿠라’ 정치인들이 최근 군사 정권의 한 특징이 되고 있다.

e.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에는 혼란에 대한 절망감과 전(前) 지도자와 정당(정치정화법과 ‘사쿠라’), 은행과 통화(환율과 인플레이션), 금융 기관(주식 거래 불시 단속), 기업과 기업가(폭리 기업인 단속과 민간 기업의 경영권 인수), 군(정화와 정치적 임명을 통해), 미국(공적, 사적 언어 공격을 통해) 등에 대한 신뢰가 체계적으로 붕괴하고 있다. 이것이 단순히 무능한 통치력의 징후인지, 남한 사회의 제도와 자신감을 파괴하려는 치밀한 계획의 징후가 아닌지 점점 의심을 키워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Ⅵ 결론**

지금까지 말한 증거는 목적론적으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이같은 테제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제시했다. 이는 전반적인 논의를 고려한 것이 아니고 이 테제에 이의를 제기할 만한 다른 정보나 주장을 균형있게 고려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 보고서의 틀을 벗어나는 일이다.
현재의 군사 정부가 공산주의자이며 언젠가는 한국 정부를 북한에 이양하거나 그럴지도 모른다는 테제는 입증되지 않았으며 아마도 입증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매우 조심스러운 몇가지 결론은 명백히 가능하다.

1.
현(現) 대한민국 정부는 과거 공산주의자였고, 적어도 몇 달 동안은 지금까지 남한에서 감행된 공산주의 정부 전복 기도 가운데 가장 위험했던 사건의 주요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인물이 통치하고 있다. 박 의장의 좌익 성향과 공산주의 성향은 환경적으로 뿌리가 깊으며, 폭넓은 가족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2.
현 대한민국 정부는 과거 공산주의자였거나 공산주의에 협력한 사람들을 측근에 두고 있으며, 그 수는 남한 사회의 일반적인 성격에 비추어 볼 때 현저하게 많다. 이들은 근절되지 않았고 매우 지속적이다. 정부 내의 좌익분자 대부분은 그들을 몰아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정부 내부와 측근으로 남아 있다. 박정희처럼 대부분의 좌익분자들의 노골적인 공산주의적 성향은 한국 전쟁 전이나 전쟁기간 동안으로 국한되었지만, 몇몇 소수는 전쟁 후까지도 공산주의 간첩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대부분 친구나 친척이 한국 사회의 반공주의자들, 또는 미국인에 의해 목숨을 잃거나, 고문당하거나, 구타당하거나, 투옥되거나, 이 네 가지를 모두 당하는 걸 목격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형성된 복수에 대한 욕망은 몬테네그로와 시칠리아인들 못잖은 한국 사회에서 결코 도외시 될 수 없다.

3.
대한민국의 군사정권의 특징은 민주주의와 그 제도의 도입을 혐오하지는 않지만 꺼려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새롭게 구성한 기관은 권위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의심스럽고 정체불명의 숨겨진 지도부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4.
현 정부는 미국과 우호관계에 있다고 천명하고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의 그 어떤 정부보다 미국과 거리를 두고 있으며 미국에 대해 비판적이다. 미국과의 협의, 미국의 충고에 따르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된다. 중요한 문제는 아무 경고도 없이 기정사실로 미국에 제시되는 경향이 있다. 한미 관계에 전에 없는 상호불신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고, 이것은 이승만 정권 말기보다 정도가 심하다.

5.
한국 정부가 공산주의의 지도에 따르는 공산주의자들을 내부에 핵심 세력으로 둔 정부냐 아니냐에 대해서, 두 가지 가능성을 증거와 함께 제시할 수 있다. 하나는 그렇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한국 정부가 과거에는 공산주의 성향을 보였고 좌익분자였지만 지난 10년 동안은 친공산주의적인 활동을 한 증거가 없는 인물들로 내부 핵심 세력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자의 테제를 입증하자면 많은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여기에는 박정희 본인이 공산당 네트워크를 배신하고 이어서 애국심을 보였다는 사실과 그의 동료들이 강력하게 반공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 북한 정권이 박정희와 그의 정권에 극도의 적개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포함된다. 후자의 테제에 대해서는 미국 대사관의 의심이 차츰 커가고 있는 실정이지만, 현재로서는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 수 없고 지지할 수밖에 없다. 제 3의 가능성은 두 가지 테제 중 하나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정부나 공화당 내의 비좌익 집단이 박 정권을 점점 장악하거나 결국에는 지배적으로 장악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6.
만약 현 정부의 핵심 세력이 아직도 공산주의 전복 기도에 동조한다면, 대한민국이 처한 위험은 심각하고 어쩌면 절망적이다.

7.
대한민국 정부가 반공주의를 주장하지만, 공산주의 전력을 가진 자나 좌익분자의 통제를 받는다면, 그 전망 역시 우려할 만하다.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움직임을 보일수록, 한국 정부 내의 반미적 반작용은 더 보편화될 것이다. 한국 정부가 미국에 반항해 무책임한 행동을 할 가능성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 중앙정보부는 미국의 간섭에 저항하려는 한국을 기꺼이 도와주려는 일본을 미국과의 균형 세력 역할로 등장시키기 위해 일본과의 관계를 재정립할 가능성이 있다. 즉 베트남에서 드골이 한 역할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역할을 하게 될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북한과 통일을 협상하거나 그 일을 감독할 중립 세력을 불러들이겠다고 위협할지 모른다.

8.
비좌익 집단이 군사정권의 통제권을 획득하게 될 것이라는 테제는 이런 상황과는 별도로 고려해볼 가치가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현 지도부의 단호하고, 필사적이기까지 한 성격을 감안한다면, 그런 일은 일어날 것 같지 않다. 그보다는 현재의 핵심 지도부가 미국의 간섭으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함성을 이용해 이 집단을 자기들에게로 포섭할 가능성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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