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이후 노동자들은 왜 자꾸 죽음을 택했나

[해설] 현대중공업 노조의 어두운 역사

살인적인 노동강도와 저임금, 늘어가는 산재 사망자수, 사측의 비정규직노조 탄압과 정규직노조의 외면, 해고 이후 생활고…. 현대중공업에서 비정규직노조를 만든 뒤 해고된 고(故) 이운남(42) 씨를 죽음으로 몰아간 키워드다. 이 씨의 영결식이 26일 치러진다.

이 씨는 1997년 26살에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업체인 영호산업에 입사해 용접공으로 일했다.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비정규직의 노동강도는 "잔인할 정도"였다. 정규직이 기피하는 힘든 일은 모두 비정규직인 사내하청 노동자의 몫이면서도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가량에 불과했다.

당시 현대중공업에서는 경쟁적으로 무재해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 눈에 철심이 박혀도, 노동자가 죽어도 '무재해'로 보고됐다. 다친 사람은 119 응급차 대신 트럭에 조용히 실려 나갔다. 2003년 이 씨와 노조 설립을 주도했던 조성웅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초대 지회장은 "한 동료가 허리가 골절돼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해당 부서가 무재해 표창장을 받는 일도 생겼다"고 증언했다.

참다못한 노동자 몇몇이 모여 2001년부터 하청노동자 모임활동을 시작했고, 2003년 6개 하청업체 소송 30명 발기인이 노조를 설립했다. 그러자 노조원이 소속된 업체들은 폐업으로 맞섰다. 노조 설립에 관여했던 노동자들은 해고자가 됐다. 이운남 씨와 조성웅 씨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 씨는 노조 설립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2003년 비정규직 동료들에게 왕따를 당했다. 하청업체 사장의 지시로 출근한 뒤 작업복도 갈아입지 못한 상태로 동료들의 손에 끌려가 현대중공업 경비대 차에 실려 정문 밖으로 쫓겨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프레시안(허환주)

"비정규직이 노조 가입하면 중공업 밥은 못 먹는다"

이듬해인 2004년은 비정규직 노조에게도 새로운 분기점이었다. 2월 14일 하청노동자였던 고(故) 박일수 씨가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 자결했다. 그로부터 3일 뒤인 17일 이 씨는 동료 2명과 '비정규직 철폐'를 주장하며 현대중공업 크레인을 점거했다가 5시간 만에 끌려나왔고, 현대중공업 경비에게 폭행을 당했다.

박일수 씨의 죽음을 계기로 한때 하청노동자 200여 명이 집단으로 노조에 가입하기도 했지만, 이후 조합원 수는 급격히 줄었다.

조 전 위원장은 그 이유를 "노조에 가입하면 '중공업 밥은 못 먹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조합원 신분이 발각돼서 해고되면 현대미포조선,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에까지 블랙리스트에 오른다는 것이다. 해고자들은 조선소 대신 일용직과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조 전 위원장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정규직노조에 가입하려면 인생을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해고 이후 택시 운전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던 이운남 씨는 잇따른 비정규직 노조 투쟁 패배에 괴로워했다. 숨지기 며칠 전에는 "사측 경비대에게 폭행당한 뒤 머리가 깨지고 피 흘리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조원들의 사진을 보고 본인의 옛 기억이 떠올라 우울감과 부채감을 호소했다"고 동료들은 증언했다. 결국 그는 지난 22일 울산 동구 자신의 아파트 19층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씨의 죽음에 대해 하창민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장은 "고인은 노동기본법을 보장하라는 지극히 소박한 요구를 했다"며 "비정규직도 노조 활동을 하게 해달라는 외침을 회사가 폭력으로 진압하니 7, 8년이 흘러도 트라우마를 이겨내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끌었던 현대중공업노조는 지금…

정규직노조의 외면도 이 씨를 괴롭혔다. 정규직노조는 '박일수 분신 사건'으로 비정규직노조와 각을 세운 바 있다. 몇몇 정규직 노조간부가 2004년 2월 25일부터 '박일수 분신 대책위원회' 농성장에서 만장과 펼침막을 철거했고, 고인의 영안실에 들어가서 언성을 높이는 등 불쾌감을 표시했다. 3월 4일 급기야는 정규직 200여 명과 박일수 대책위원회 지도부와 비정규직노조 조합원 사이에 물리적인 충돌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규직노조는 9월 민주노총 금속노조에서 제명됐다.

그런데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당시 현대중공업 정규직노조는 노동운동의 선봉에 섰던 강성노조였다. 유명한 '88년 식칼테러'가 일어난 곳도 바로 현대중공업이다. 1987년 8월 현대중공업 노동자 5만여 명은 사측의 어용노조 기습 설립에 맞서 민주노조 건설 운동을 이끌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가두행진에서 가장 많이 쓰인 구호는 고(故) 박일수 씨의 유서에도 적혀있는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말이었다.

세월이 흘러 현대중공업에는 정년퇴직하는 정규직 대신 비정규직인 하청노동자로 부족한 인력이 채워졌다. 2003년 전체 노동자의 절반가량을 차지했던 사내하청 노동자 수는 2만여 명으로 정규직 노동자 수인 1만7000여 명보다 늘어났다. 비정규직은 80년대의 열악했던 근로조건을 정규직 대신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정규직노조 운동은 평균 정규직 노동자 연령이 50세에 가까워지면서 노쇠해졌다. 2002년부터는 온건 성향의 정규직노조 집행부가 들어섰다. 금속노조에서 제명된 이듬해인 2005년 6월 정규직노조는 "노사 호혜적 협력관계"를 구축할 것을 선언했다.

오세일 전 사내하청지회 지회장은 "2002년 전까지만 해도 정규직노조 소식지 앞면에는 정규직 소식이, 뒷면에는 하청노동자 소식이 실렸지만 이후에는 비정규직의 소식을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조 전 지회장은 "정규직노조는 사실상 회사의 노무관리 부서"라며 "투쟁하는 조합원들을 억압하고 탄압하고 고립시켰다"고 주장했다.

익명의 정규직 노동자는 "회사를 잘 따르는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진급 혜택을 받고, 정규직 가운데 노조 대의원이 되는 것은 출세의 길로 여겨졌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2000명은 계약해지, 정몽준 전 대표는 574억 주주배당

반면 2009년 연말 현대중공업에서 하청의 하청으로 일하는 일당직 비정규직 노동자(물량팀) 2000여 명이 소리 없이 해고됐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11년 2월, 현대중공업의 대주주인 정몽준 한나라당 전 대표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제치고 주식배당 1위를 차지했다. 정 전 대표가 받은 배당금은 574억7000만 원. 전년도 287억3500만 원보다 두 배가량 늘어났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하청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빈번히 동결되거나 삭감됐다.

조선업계의 전반적인 불황 속에서도 현대중공업은 세계 최고의 조선소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올해 3월에는 세계에서 최초로 선박 인도 1억717만 톤이라는 신기록을 달성했다. 국내 11월 매출은 2조1880억 원을 기록해 지난 10월에 비해 2.63%, 전년 동기에 비해 1.20% 늘었다.

유례없는 실적을 달성했음에도 현장의 분위기는 달랐다. 한 정규직 노동자는 "조선소를 시작할 때부터 심지어 가장 호황일 때조차 회사는 항상 경영상황이 어렵다고 했다"며 "계속 어렵다는 말을 세뇌시키니 현장 노동자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세뇌당하는 느낌으로 일한다"고 털어놨다.

정년퇴직한 정규직과 자식들, 새로운 '비정규직 인생'

하창민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지회장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정규직노조의 외면을 "같이 죽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정규직 신규채용은 점점 줄어들었고, 정년퇴직한 정규직 노동자와 정규직 노동자의 아들들이 사내하청으로 들어가 새로운 '비정규직 인생'을 시작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정년퇴직한 정규직이 하청노동자가 될 자식들을 뒷바라지 하려고 또 하청노동자로 재취업해요. 정규직 자제 중에도 하청노동자가 많고요. 회사에서 정규직을 거의 뽑질 않는데. 그런데도 (정규직 노동자들은) 87년도의 추억들을 갉아먹고 사는 거예요. 천 명씩 잘리고 퇴직자가 발생해도 그 자리를 또 다른 하청이 채우고…."

하 지회장은 "요즘은 하청노동자로 2년 이상 일해야만 정규직에 지원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며 "정년퇴직자는 매년 나오지만 회사가 정규직을 거의 뽑지 않아 정규직 수가 해마다 줄고 있다"고 덧붙였다.

극단적으로 2010년 준공된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에는 정규직 생산직 노동자가 사실상 '0명'이다. 관리자급 정규직을 제외하고는 25개 하청노동자 2700여 명이 연봉 2500만 원을 받으며 배를 만들고 있다. 울산조선소의 미래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민규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은 "이전에는 회사가 필요한 정규직 수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위기 시 비정규직만 내보내왔다면, 군산조선소 사례는 비정규직만 데리고도 충분히 배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현대중공업이 최근 사무기술직을 상대로 희망퇴직을 받기 시작한 것은 (정규직) 생산직 정리의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운남 씨를 포함해 대선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와 해고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현상에 대해서는 "노동운동이 안에서 달라지지 않으니 (정치권 등) 밖에서 달라질 것이라는 허망한 기대가 (대선 이후) 무너진 것 같다"면서도 "하지만 돌아가신 분들은 막상 노무현 정권 때 노조탄압을 받았던 사람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정권의 변화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민주노조 운동의 몰락"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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