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꽂혀 있는 노희경 작가의 에세이 제목이다. 웬 뜬금없는 사랑 타령이냐고? 이런 건 또 어떤가? "그대 내 곁에 선 순간 그 눈빛이 너무 좋아,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땜에 내일은 행복할 거야♪"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는 노래 가사다.
6월 11일 평택에서 부산 한진으로 향하는 희망버스 안에서 떠올렸던 글귀는 노희경의 에세이였고, 김진숙이라는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는 뽕짝이었다.
평전과 투쟁가는 이미 낡고 촌스러운 유물이 된 것인가? 나의 대답은 망설임 없이 '아니오'다. 그런데 왜 나는 엄중하고 치열한 투쟁 한가운데서 이런 에세이와 노래가 떠올랐을까?
전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은 자서전 <스님은 사춘기>에서 '당신의 스승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받으면 늘 '죽음'이었다 이야기한 바가 있다. 명진 스님과 같은 레벨은 전혀 아니지만 '나도 그런데…'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의 죽음이 벌써 15번째다. 15번째의 죽음? 이것도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희망퇴직자들이 2150명이나 되기 때문이다. 남은 2150명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 살아남는 것은 정말 살아 있는 것일까? 그저 버티는 게 정말 사는 걸까?(이 글귀 역시 이상은의 '성녀' 가사이다.) 나는 지금 통계의 거짓말을 뻔뻔하게 하고 있다.
질문은 내 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 수많은 죽음들과 반죽음들의 한복판에서 '조끼를 입고 있는' 나는 책임이 없을까? 죽어가고 아파하는 동지들을 위해 내가 하는 일들은 알리바이가 될 수 있을까? 이 정도 싸웠으면 원죄를 벗을 수 있는 것일까?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나의 싸움은 많은 경우 무능하고 무력하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일까. 매일 밤마다 괴로워해야 하는가. 미안해야 하는가. 아니면 나의 부족과 태만을, 그리고 그로 인한 상처를 훌훌 털어버려야 하는가.
즐겁게 투쟁하고 기쁘게 사랑하는 것. 몸을 가볍게 하는 것, 힘을 빼고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 이것이다. 살아남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다. 그렇게 살아갈 때만이 인간의 존재는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풍부해진 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죽음이 내게 준 지침이다.
우리는 더 가벼워져야 하고 거칠어져야 한다. 머리로 관념으로만 생각하면 다리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 이해관계를 중심으로만 생각한다면 데면데면할 수밖에 없다. 마음이 가는 곳, 마음이 아파하는 곳으로 한없이 걸어가 보자.
심리학자는 사랑의 원리를 해부하며, 연인들은 그냥 사랑한다. 우리는 심리학자인가, 연인인가. '크레인을 잡는다고 저렇게 버티면 결과는…' 썰을 푸느라 지쳐버린 우리, 지금 뭘 하고 있는가. 사람이 빠진 채 '관계와 입장'이라는 음지에 웅크리고 앉아, 결국 평론가의 대열에 합류한 것은 아닌가.
매일매일 살아 있다는 것이 신 나고 즐겁던 첫사랑의 기억을 우리는 영구 캡슐에 넣어 땅속에 이미 묻었는가. 사람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우리에겐 이미 없는가. 아니다. 우리는 사랑한다. 사람을 사랑한다. 그것이 누구든지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서 전태일 정신이 '인간사랑'이라 학습하지 않았던가. 운동은 결국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우리 모두 한 번씩은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우리 후회 없이 사랑하자.
백주대낮 용역 깡패의 질식할 것 같은 폭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한진 중공업 노동자와 그 아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만 있다면. 정리해고가 동지들과 가족, 더 나아가 모든 인간관계를 철저한 파괴했던 경험에 공감한다면, "정권과 재벌의 착취시스템은 결국 한 사업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세계적으로 확대되는 경향성과 운동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지금 당장 사랑해야 한다.
날라리 외부세력에 의존과 의탁으로 머물고 멈출 것이 아니라, 가벼워지고 거친 분노를 정교하게 갈아 심장과 심장에 사랑의 연결고리를 만들 수만 있다면 우리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투쟁 사업장 곳곳에서 결의대회에 앉아 있는 노동자들의 줄지어 늘어선 모습과 공장 안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서 있는 용역들과의 차이를 잘 느낄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 우리가 용역화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혹은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은 자괴감에 빠질 때가 무척이나 많다.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로 느껴진다면, 우리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단순히 집회가 재미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느껴지지 않아서다. 우리는 결의로 싸운다고 하지만, 아니다. 결국 사랑으로 싸운다.
희망버스 2차가 7월 9일 다시 출발한다. 이번엔 185대의 희망버스다.
마음을 모아보자. 잊고 지냈다면 날라리 외부세력으로부터 영감과 힌트를 얻자. 날라리 외부세력이 얼마나 가볍게 권력과 권위를 조롱하고 힐난하는가. 그것이 폭력적 권력을 무력화시키는 유쾌함이다. 한 마리 나비의 자유로움처럼. 여전히 노동자 우리가 투쟁하고 있기 때문에 그 길로 날라리 외부세력과 레몬트리공작단이 오고 있다는 것을 잊지는 말자. 거친 길을 만들고 길을 개척하는 노동자가 있다는 것, 우리 그것을 느끼자.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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