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구 읽기: 빵과 불륜의 사회학

[기고] 왜 여자의 아들은 아들이 아닌가?

'제빵왕 김탁구'가 안방을 장악했다. 요즘 시청률에 따르면 한국인 두 명(집)에 한 명(집)꼴로 이 드라마를 보고 있다고 한다. 나 역시 요즘 삶의 즐거움은 '제빵왕 김탁구'를 보는 것이다. 해외에 얼마간 체류하고 있는 중이라 부득불 본방에 접근할 수가 없다. 그래도 정보화시대 덕분에 인터넷으로라도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해 하고 있다. 이 드라마가 담고 있는 주제나 문제점 중에 이 지면에서는 두 가지를 끄집어내어 보도록 한다.

▲ '제빵왕 김탁구' ⓒKBS 홈페이지
왜 빵인가?

빵 하면 많은 기억들이 연상된다. 동네마다 새벽이면 공기를 달콤·고소하게 유혹하던 빵집(또는 제과점)의 행복한 기억이 살아났다. 어려서 한 번쯤은 빵집 오빠와 결혼해서 빵을 실컷 먹어야지 했던 기억도 났다. 곰보빵의 소보로가루, 팥빵의 팥앙금(안코), 슈크림빵, 꽈배기빵, 카스텔라, 찹쌀떡(찹쌀모찌)은 말할 것 없고 여름철 아이스팥빙수나 아이스케키(icecake)를 먹을 수 있던 곳도 빵집이었다.

이번 드라마에서 가장 감동을 준 인물 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제빵의 명인, '팔봉 선생'일 것이다. 이 드라마의 주역인 제빵사는 원래 제빵사일 뿐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현재는 젊은이들 사이에 파티쉐(파티시에, pâtissier)가 유망한 직종으로 꼽히고 있다. 대학에 제빵관련 학과가 생기고 제빵전문가를 지향하며 외국으로 유학하는 일도 심심치 않다. 그러나 과거에는 전문 수공업자들이 '~쟁이'라고 불렀듯이 제빵사는 '빵쟁이'였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새로운 빵 연구를 향한 노력, 집념, 심지어는 '발효일지'와 같은 게 있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하였다.

우선 왜 이 드라마의 주제가 빵이며, 배경이 제빵기업인가이다. 빵과 제분업, 제빵기업은 모두 근대화의 산물이면서 우리의 근대적 식생활에 혁명을 가져온 주역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주제가 떡이기엔 쉽지 않다.

서울에도 일제시대나 해방 직후부터 유명한 몇 개의 빵집이 있다. 일제 말기의 150개정도 있었다는 빵집은 해방 이후 태극당, 고려당, 나폴레옹제과점, 뉴욕제과 등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전국적인 제과점 외에도 지방 곳곳에는 아직까지 현대화 과정에서 제빵계 프랜차이즈화에도 꿋꿋하게 견디며 빵맛을 지켜낸 지역토박이 제빵점들이 드물게 남아 있다. 그런 곳을 상징하는 제빵집으로 '팔봉빵집'이 그려졌다. 그런데 드라마에는 팔봉빵집의 가장 중요한 재료가 되는 밀가루가 어떻게 조달이 되었는지는 그려지지 않는다. 제28회에서 제분기업에 대한 언급이 잠시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빵과 밀가루는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해방 후, 특히 한국전쟁 이후 미국이 선물한 밀가루가 토종 밀의 씨앗을 말리며 한국인들의 입맛을 바꾸어 놨다. 급기야 1990년대 이래로 쌀의 자급률이 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쌀의 소비량도 급감하여, 쌀의 재고량이 년간 150만톤이 되어 있다. 보관료만해도 톤당 41,000~42,000원이 드니, 150만톤 재고에 소요되는 비용만 해도 600억원이 넘는다. 이것을 농민들이 감당해야 한다. 더욱이 재고시간이 길어질수록 곰팡이, 세균 등이 증식되고 독성이 심각한 아플라톡신균마저 번식하게 된다. 2000년대 차관으로 북한에 지원했던 쌀도 중단되니, 쌀의 소비처가 협소하여 벼농사가 풍년이 될수록 농민들의 시름은 깊어져만 간다.

정부는 남아도는 쌀로 쌀떡, 쌀국수를 만들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쌀의 소비가 증대되겠는가? 쌀국수와 쌀밥은 대체식품이기 때문이다. 쌀밥을 먹는 사람이 밥도 먹고 쌀국수, 쌀떡, 떡볶기 등을 간식으로 먹겠는가? 쌀을 사료로 쓴다는 것 역시 말이 되지 않는다. 아무튼 이런 쌀 소비의 급감에는 미국산 밀가루의 공로가 혁혁하다.

미국산 밀가루가 한국전쟁 과정에서 구호물자로 공급되면서 세 가지 공헌을 했다. 첫째 미국 밀제조업자들의 과잉생산을 한국과 제3세계로 안정되게 공급할 수 있는 유통망을 확보하게 되어 미국 농산업이 발전하는데 기여했다. 둘째, 미국이 한국과 같은 제3세계에 제분업과 같은 사양산업을 넘겨줌으로써 미국 주도의 경제적 세계체제에 한국을 편입시킬 수 있었고, 정치경제적으로 한국정부를 통제할 수 있었다. 셋째, 정부는 제분업, 제과업 등과 같은 소위 3백산업을 통하여 기업을 통제하였고, 기업은 저임금체제를 보장받아 노동자를 통제할 수 있었다. 이로써 미국으로부터 한국 노동자와 농부, 일반 국민에 이르는 먹이사슬이 형성될 수 있었다. 미국으로서는 값싼 밀가루와 제분업을 한국에 넘김으로써, 강대국의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었고, 차관으로 준 물자들에 대해서는 본전과 함께 이자까지 챙길 수 있으므로 미국의 자본가들에게도 큰 선물을 줄 수 있었다. 또한 미국 정부는 그 잉여금으로 미국 농민들에게 줄 농업지원금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한국의 기아를 구원한 미국산 밀가루의 진실이다.

그래서 빵은 안 된다는 게 아니다. 빵은 맛있다. 또 빵은 고맙다. 배고팠던 시절 싼값으로 미각을 행복하게 해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1970, 80년대 산업화시절 빵이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였는가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 스스로 버린 쌀농업이 언젠가 우리의 식량주권을 어떻게 흔들게 될지를 기억해야 한다.

왜 여자의 아들은 아들이 아닌가?

이 드라마를 보면 정의롭고 잘생겼고 착한 김탁구에 절로 끌릴 수밖에 없다. 아무리 힘들어도 착하면 승리한다는 신데렐라의 공식을 잘 활용하고 있다. 마지막 회를 앞두고 있어서 결말을 예측하기 부담스럽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신데렐라의 공식대로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가겠지만, 전작 드라마 '신데렐라언니(신언니)'처럼 김탁구와 구마준의 상생적 주제가 될 수밖에 없으리라고 예감한다. 또한 배경과 실력, 책임감을 한 몸에 갖춘 장녀 구자경의 뒷심이 예견된다.

아무튼 이번 드라마에서는 최근의 '악'에 대한 사람들의 새로운 해석 역시 잘 보여주고 있다. 악동이 될 수밖에 없는 사연을 가진 잘 생긴 구마준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연민과 관심을 베풀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신언니의 기본 의도 역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악'과 '욕망',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지는 못한 것은 이 두 드라마는 공통적인 것 같다.

'제빵왕 김탁구'에서 김탁구는 왜 '선'이고, 구마준은 왜 '악'인가? 다시 말해 김탁구는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고, 구마준은 비뚤어질 수밖에 없는가? 그 두 아들의 고통의 기제에는 굳건히 가부장제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다.

김탁구가 고난의 길을 겪게 된 것은 '천한 것'을 어머니로 둔 홍길동적 출생 기원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그는 '적자'가 아니라, 서자였다.

반면 구마준의 고민은 다른 데 있다. 공식적으로는 적통(嫡統)이지만, 사실은 아버지가 다른 자식이다. 가부장적 질서에 따르면 그는 씨가 다른 자식이다.

▲ '제빵왕 김탁구'의 구일중 회장 ⓒKBS 홈페이지

이러한 구씨 집안의 사연을 가부장적으로 정리하자면, 김탁구는 구일중 회장의 큰 아들이지만, 생모가 다른 서자이고, 구마준은 어머니 서인숙과 생부 한승재의 아들로서 구일중의 아들이 아니다. 반면 구자경은 장녀이지만, 구일중과 서인숙의 적통이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딸은 비록 적통이라도 상제와 가묘의 중책을 이어받을 수 없지만, 아들은 비록 천한 몸에서 낳았다 하더라도 능히 제사를 받들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구일중 회장은 구마준에 대한 진실을 몰랐으나 동물적인 감각에 따라 자신을 유전적으로 닮은 김탁구에 끌렸다. 구마준의 한없는 시기심의 원천이다. 구일중 회장의 그런 행동에는 세종실록과 같은 가부장적 질서가 내면화되어 있다. 더욱이 구자경처럼 실력있고 헌신적인 적통의 자식일지라도 딸이라면 가계 계승자체에서 배제되는 질서를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이즈음 되면 김탁구의 시청자들은 물어야 한다. 왜 남편의 불륜은 정당하며, 부인의 불륜은 부당한 것인가? 가부장적인 시대적 산물인가? 아들을 낳아야 며느리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을 수밖에 없던 불행한 여성들의 고달픈 삶에 대한 이해는 없는가? 두 불륜은 모두 부정한 것이다. 더구나 드라마에서조차 남편과 부인은 각각 온전한 근대적 일처일부제 가족을 만들기 위해 불륜의 협조자들인 김탁구의 생모나 구마준의 조모를 제거해야 했다.

그런데 부인으로서 당당한 지위를 갖기 위해 아들을 가져야하는 사회는 오래전까지 계속된 한국 사회의 진실의 하나이다. 한국의 많은 재벌가에서는 적자/서자 담론이 요즘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일반 가족관계에서도 그러한 가족의 비밀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런 의식 저변에는 남성의 불륜은 무죄라는 인식이 여전히 깔려 있다.

흔히 한국의 역사는 아버지의 역사이다. 즉 가부장의 세습의 역사이다. 그러나 가부장적 역사 속에서 어머니로 이어지는 역사가 내재되어 있다. 아버지가 제 역할을 못할 때, 또는 아버지가 부재할 때, 한 가족을 이어나간 것은 어머니였다. 아들을 얻기 위해 백일기도하기 위해 절로 들어간 부인이 어떻게 백일만에 아이를 임신할 수 있는가? 한국 가족사에서 수많은 집안에서 씨 다른 아들, 자식들이 존재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표면적으로는 아버지의 '가족'이지만 현실적으로 수많은 어머니의 '가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더욱이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으로 홀로된 청상과부, 한국전쟁 시기 소위 '전쟁미망인'들은 자신과 아이들의 생계를 위하여 재혼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최근 이혼가족의 증대로 결합가족이 늘어나고 있는 게 추세이다. 더 이상 가족 관계를 아버지를 중심으로 적자/서자의 구분으로 볼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아니 이제는 어떤 자식이라도 좋을 시대가 된 것이다. 더욱이 김탁구의 생모처럼 미혼모의 자식도 사회적으로 당당한 구성원으로 자라나야 현재와 같은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김탁구의 가족 속에 배태되어 있는 가족관계의 비민주성, 봉건성은 더 이상 현실의 가족 관계 속에서 좌시될 수 없다. 한국에서 사회의 민주화가 아직 미성숙되어 있을지라도 가정 내 민주화를 더는 모르쇠할 수 없다.

'제빵왕 김탁구'는 많은 흥미를 끌고 있는 만큼, 한국 사회의 모순을 반영하고 있는 드라마라는 점에서 참 괜찮은 드라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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