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예산 500조'도 부족... 정부 재정 더 키워라

[文정부, 남은 임기 이것만은 ①] 하준경 한양대 교수

문재인 정부가 올해를 끝으로 반환점을 돈다. 지난달 19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문 대통령이 말한 대로 이미 절반의 임기가 지났을 수도, 이제 반환점일 수도 있다. 그 사이 촛불로 표방된 정부의 개혁은 성과를 내지 못했고, 정권 지지층과 반대층의 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특히 올해 정부는 대내외 악재에 둘러싸여 갈 길을 잃은 기색이 역력했다. 부동산 폭등과 저조한 경제 성적이 정부의 핵심 경제정책이었던 소득주도성장과 충돌해 민심 이반을 낳았다. 아울러 갈수록 활로를 잃어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정부가 대대적인 재정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요구가 거셌고, 일각에서는 더 자유주의적 개혁만이 위기 돌파의 묘책이라는 반박도 나왔다. 이 같은 갈등은 지난 10일 밤 겨우 국회를 통과한 512조2504억 원 규모의 내년도 예산안으로 일단 결론 지어졌다. 하지만 더 강력한 재정정책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포퓰리즘 정책의 결과'라는 이른바 '퍼주기 예산' 논란은 내년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조국 사태는 집권 세력의 민낯을 드러나게 했다는 평가를 낳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검찰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조국 사태는 진보 진영과 민주당 지지 층, 젊은 세대의 한가운데를 가르며 큰 상처를 남겼다. 특히 정의당으로 대표된 주류 진보 진영은 이 사태에서 갈 길을 잃었다는 강한 비판을 받았다. 페미니즘 정권을 표방한 취임 시기 대통령의 목표와 달리, 정부 임기 내내 커져간 남녀 갈등은 특히 올 한해 들어 여성 연예인의 연이은 자살, 일제 성노예 피해자 문제가 야기한 한일 갈등과 이에 대한 정부 대처를 비판하는 여성계의 목소리, 여성을 혐오하는 남성의 주류 인터넷 문화 등과 맞물려 폭발하는 양상이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캠페인은 특히 올해 '타다 논쟁'으로 노동시장에 본격적으로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표방한 정부는 톨게이트 노조 등의 문제에서 어떤 리더십도 보이지 못했다. 그 사이 특히 친재벌 노선으로 전향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은 정부를 향한 노동계의 배신감이 올해 본격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구적 위기가 된 환경문제, 곧 기후위기 문제는 올해 한국에서도 본격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했다. 기후위기비상행동은 한국에서도 대규모 길거리 시위를 열어 정부를 압박했고, 미세먼지 문제는 올해도 한국을 뜨겁게 달궜다. 하지만 정부는 기후위기 문제에도 미온적으로 대처해 이 문제를 우려하는 이들의 실망을 샀다.

현 정부에 반환점 이후, 곧 남은 임기가 특히 중요한 까닭이다. 올해를 마무리하며 <프레시안>은 특히 경제, 노동, 여성, 환경, 진보의 다섯 분야에 관해 각 분야 전문가와 인터뷰를 준비했다. 여태 문재인 정부의 해당 분야 정책을 어떻게 보았는지, 앞으로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야기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문재인 정부의 경제 정책 중 특히 소득주도성장과 재정정책 분야에 관해 이야기했다. 하 교수는 여러 언론 기고 등을 통해 케인스식 처방을 적극적으로 실시해야만 현 경제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인터뷰에서 하 교수는 큰 틀에서 정부의 방향이 옳다고 평했다. 특히 정부는 더 적극적 재정정책을 펴야 한다고도 하 교수는 지적했다. 내년 예산안도 미흡한 수준이라는 평가다. 소득주도성장 정책과 특히 올해 큰 문제로 본격화한 부동산 정책을 두고는 기술적 부분에서 미흡함이 컸다고 비판했다.

지난 5일 경기도 안산시 한양대 에리카캠퍼스에서 진행한 하 교수와의 인터뷰 전문을 정리했다.

▲ 하준경 한양대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내년 예산, '슈퍼예산' 아니다

프레시안 : 문재인 정부는 출범 초기 최저임금을 큰 폭으로 올리는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경제정책의 전면에 내세웠다. 하지만 이후에도 경기 침체가 이어지고 소득주도성장의 부작용이 크다는 여론의 지적이 이어지자, 사실상 올해 들어 정부는 소주성장의 속도조절론을 이야기하며 정책 타협에 들어갔다. 소주성장을 어떻게 평가하나?

하준경 : 대중의 머리에 소주성장의 다른 내용은 빠지고, 오직 최저임금 논란만 인식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최저임금을 올리는 건 중요하고 좋은 일이었지만 보완장치가 부족했다. 즉, 정부의 정책이 기술적으로 미흡했다.

최저임금은 노동시장에 선을 긋는다. 일정 수준 이하의 임금을 불법화하기 때문이다. '시장에 정부가 개입한다'는 비판이 나온 이유다. 그런데 최저임금과 같은 개입을 정말 해서는 안 되는가.

과거 산업혁명기에는 어린이도 노동했다. 법이 없으니 그랬다. 하지만 정부가 나서서 아동 노동을 금지하는 선을 그었고, 이제 우리는 아동에게 노동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최저임금도 같은 의미다.

최저임금을 올리는 건 생각보다 큰 변화를 낳는다. 최저임금 수준 이하의 생산성을 지닌 사람은 노동시장에서 퇴출된다. 그렇다면 이런 이들을 위한 보완책도 정부가 함께 내놨어야 했다. 즉, 사회안전망을 충실히 마련했어야 한다. 이 같은 조치가 없었다.

최저임금 인상은 기업 구조조정 효과도 있다. 최저임금 이상을 지급할 능력이 없는 기업은 시장에서 퇴출될 수밖에 없다. 이걸 꼭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잘만 선순환한다면 생산성 높은 업체는 살아남아 더 커질 수 있다. 구조조정의 효과다. 하지만, 퇴출 업체에 대한 정부 대책도 동시에 마련돼야 한다. 이에 관한 준비가 미흡했다. 이 같은 종합 대책이 없이 최저임금만 빠른 속도로 올랐으니 사회적 반발이 클 수밖에 없었다.

노동시장에서 퇴출된 이들을 위한 안전망이 없으니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 오랜 시간에 걸쳐 자영업 비중이 매우 커졌다. 즉, 한국 사회에서 자영업은 정부가 손쓰지 못하는 실업 대책이다.

프레시안 : 결국 재정을 써야만 문제가 풀린다. 정부는 512조 원이 넘는 이른바 '슈퍼예산안'을 내놓았다(내년도 예산안은 진통 끝에 지난 10일 국회를 통과했다.). 이로써 내년 정부 총지출은 올해보다 9.1%(42조7000억 원) 늘어난다. 올해(9.5%)에 이어 2년 연속 증가폭이 9%를 넘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가 컸던 2009년(10.6%) 이후 10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정부가 덩치를 키우고 있다. 내년 정부 재정적자 규모는 약 30조 원대로 예상된다. 기획재정부는 내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805조2000억 원) 비율을 39.8%로 전망했다. 특히 자유한국당과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적자 재정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온다(이상 내년 재정 확정안 기준).

하준경 : 재정 증가율로만 보면 내년 예산이 커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내용을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정부 예산안 중 출연금이나 기금의 비중이 크다. 달리 말해 정부가 돈을 그냥 쓰겠다는 게 아니라 쟁여두겠다는 뜻이다(기획재정부의 '2019~2023년도 국가재정운용계획' 자료를 보면 "기금 규모를 늘려 재정 지출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목표임을 확인 가능하다. 확정된 내년도 국토교통부 예산 및 기금안을 보면, 전체 50조1000억 원 중 예산은 20조5000억 원이며 기금이 29조6000억 원이다. 정부기금이란 사학연금, 고용보험기금, 군인연금기금 등 수익을 내는 투자 목적의 자금이다.). 예를 들어 정부가 재정을 지출해 달러화를 샀다면, 이를 두고 돈을 썼다고 볼 수 없다. 기획재정부 공무원들이 적자재정을 걱정하는 분들의 생각만큼 멍청하지 않다(웃음).

오히려 내년 정부 예산안이 정말 현 한국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해 충분하냐에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정말 정부 재정 지출이 너무 많다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일단 시중 금리가 오른다. 민간이 쓸 돈을 정부가 과하게 갖다 쓰기 때문이다. 물가도 오른다. 민간이 생산한 것에 비해 더 큰 수요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만일 정부가 국내 돈을 끌어 쓰는 데도 모자라 외국에서도 돈을 가져다 쓴다면 경상수지에서도 적자가 발생한다.

이런 일이 한국에서 일어났나? 정반대다. 현재 한국 경제는 저금리-저물가 상황에 처했다. 10월 경상수지 흑자 규모는 1년 만에 최대치를 경신했다. 경기가 나쁠 때 정부가 적자재정을 꾸리는 건 경기조절 정책의 교과서적 대책이다. 그런데 경기 지표에서 어떤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정부의 내년도 예산안은 오히려 부족하다고 봐야 한다.

프레시안 : 현 규모의 내년 예산안에도 재정적자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하준경 : 언론 보도를 보면 나라 살림을 가정살림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듯하다. 개별 가계가 빚을 너무 많이 내면 안 된다. 하지만 정부는 30~40년 일하고 은퇴하는 가계와 다르다. 정부는 모든 경제주체를 영속적으로 포괄하는 존재다.

정부가 빚을 누구에게 지느냐가 중요하다. 외국에 빚지면 경상적자가 커져서 나라가 어려워진다. 하지만, 한국은 순채권국이다. 다른 나라에 돈을 빌려주는 나라이지, 빌리는 나라가 아니다.

한국 정부는 국민에게 빚져 적자재정을 마련한다. 정부가 국민에게 국채를 주고 돈을 빌려온다. 정부 적자는 곧 민간의 흑자다. 정부가 국민에게 자산을 제공한 것과 마찬가지다.

나랏빚을 두고 '후대가 부담하는 빚'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틀렸다. 물론 후손은 정부의 채무를 물려받는다. 하지만, 채권도 함께 물려받는다. 채권과 채무를 동시에 물려받는 후손이 지금의 적자재정 때문에 가난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부가 국민에게 빌린 돈으로 좋은 제도를 만들고 인프라에 잘 투자한다면 후손이 이를 이용해 더 큰 이익을 얻는다. 당장 정부의 좋은 투자로 출산율이 올라가면 후손이 그 덕을 보게 된다.

재정보수주의자들이 이 원리를 모르고 적자재정을 우려하진 않을 것이다. 그들은 정부부분이 커지는 데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후손이 국채규모를 줄여나가기 위해 더 큰 세금을 부담해야 한다는 걱정을 한다. 실제 미국이 그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국채규모가 GDP의 100%가 넘을 정도로 커졌고, 이후 세금을 늘려 20%대로 줄였다. 하지만, 지금은 앞서 말했듯 재정정책을 적극적으로 펴야 할 때다. 현재 한국 경제 상황만 보더라도 정부가 돈을 충분히 더 쓸 수 있다. 아니, 더 써야만 한다.

▲ 지난 10일 진통 끝에 국회 본회의에서 내년도 예산안이 통과했다. 자유한국당은 내년 예산안이 '퍼주기'라며 격렬히 반발했다. ⓒ연합뉴스

정부가 돈 써야 나라 문제 풀린다

프레시안 : 내년도 정부 예산 규모가 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부족하다고 했다. 현재 한국 경제가 처한 가장 큰 위기는 무엇인가?

하준경 : 한국 경제가 맞은 가장 큰 위기 중 하나는 고령화다. 고령화는 구조적 문제다. 두고두고 경제에 영향을 미친다.

물론 저출산이 노동 시장에 미칠 가장 큰 영향은 20년 후에나 온다. 하지만 당장 수요 위축 효과가 발생한다. 아이 하나 키우는데 엄청난 수요가 창출된다. 분유를 사고 기저귀를 사고 교육에 투자하는 수요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런 수요가 예전에 연간 40만 명이다가 지금은 20만 명대로 떨어졌다. 그만큼의 수요가 사라졌다.

저출산 대책은 정부 재정으로 마련해야 한다. 민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출산 관련 예산에 큰돈을 쓰는 걸 비판해선 안 된다. 당장은 돈을 쓰는 것 같지만, 그 아이가 커서 사회에 기여하면 그 돈은 돌아온다. 선진국이 저출산 문제에 큰 재정을 쓰는 이유다.

한국은 어떤가. GDP 대비 출산 관련 재정 규모가 선진국의 3분의 1에서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의 가족예산(family benefit) 부문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유럽은 3~4%인데 반해 한국은 1% 수준에 불과하다. 현재 한국 정부는 충분한 돈을 쓰지도 않으면서 출산율이 오르기를 기대하고 있다.

지금 돈을 써야 한다. 그나마 아직은 2차 베이비붐 세대가 건재하니 세수 여유가 있다. 5년이 지나고 '은퇴 쓰나미'가 올 때면 저출산 문제에 대처하기 더 어려워진다.

더 적극적인 재정정책이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한국 경제 구조에 있다. 한국이 이제 선진국에 진입했지만, 그에 걸맞은 공공재가 매우 부족하다. 자본주의의 천국이라는 미국보다도 부족한 수준이다. 선진국 수준의 공공 인프라를 위해서라도 정부 역할을 키워야 한다.

한국은 고도성장했다. 이 때 정부 돈이 부족하니 민간을 이용해 공공시설을 벌충했다. 유치원을 민영화하고, 임대주택도 민영화하고, 교육도 민영화했다. 그 부작용이 선진국이 된 지금 나타나고 있다. 사립 유치원 사태가 온 사회를 뒤흔들었다. 국민 대부분이 임대주택에서 불안한 삶을 사는 근본 이유가 여기 있다. 노동자의 재교육이 독일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배경이다. 선진국은 30대, 40대 성인의 재교육도 지속적으로 이뤄진다. 한국은 어떤가? 대학 가면 끝이다. 그 후 재교육은 노동자 홀로 부담한다. 그러니 노동시장에서 한 번 밀려난 노동자가 영세자영업자가 된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공공이 나서야 한다. 정부 재정으로 최소한 미국 수준의 공공시설이라도 제공해야 한다. 공공임대주택을 적극 공급하고, 노동자 재교육에 정부가 나서고, 공공 교육 시설을 확충해야 한다. 이를 두고 '정부가 비대해진다'고 비판하는 건 곤란하다.

부동산 안정에도 정부 역할 크다

프레시안 : 정부가 공공임대주택을 적극 공급해 부동산 시장에 개입하라고 했다. 특히 올해 들어 급등한 부동산 가격을 놓고 정부가 큰 비판을 받았다.

하준경 : 정부가 돈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 정부가 기껏 토지보상금을 들여 민간인이 가진 땅을 비싸게 사주는 데만 돈을 쓰면 부동산 투기업자 배만 불릴 뿐이다. 서울 요충지에 공공임대주택을 적극 공급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투기 수요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부동산 문제는 금리와 깊은 관계를 가진다. 부동산 가격 결정 모델을 크게 보면 분자에는 임대료, 분모에는 금리가 있다(임대료/금리). 분모를 더 자세히 보면 금리에 더해 위험 프리미엄, 보유세 등이 포함된다. 보유비용에는 감가상각비 등도 들어간다.

우리는 서울 아파트 값은 항상 오르리라고 본다. 서울 아파트에는 위험 프리미엄이 없다. 한국 세금 구조상 보유세도 사실상 없다. 재건축을 바라는 수요가 크니 감가상각도 없다. 그러니 금리만 낮아지면 집값은 그대로 뛴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두 번 내리는 동안 서울 집값이 폭등했다.

서울 집값을 안정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경기가 이처럼 안 좋을 때 기준금리를 올리자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집값을 잡을 무언가가 추가로 있어야 한다. 보유세다. 미국처럼 시가의 1% 정도라도 매긴다면 집값에 제동을 걸 수 있다. 현재 한국의 보유세는 시가 대비 0.15% 수준(실효세율)이다.

시중 금리가 낮은 나라 중 보유세를 이처럼 적게 걷는 나라가 어디 있나. 선진국 대부분의 보유세가 우리보다 적어도 두세 배에서 많으면 열배 정도로 높다. 한국의 보유세가 턱없이 낮은 배경도 역시 고도성장에서 찾을 수 있다. 경제가 빨리 성장하다보니 고금리 구조에서 저금리 구조가 되는 속도도 매우 빨랐는데, 한국 정부가 그에 맞춰서 보유세를 조정하지 않았다. 국민 반발을 의식해서다. 그러니 이처럼 기형적 상황이 됐다.

경제 정의를 위해서도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보유세 강화에 나서야 한다. 토지 소유자는 독점권을 가진다. 그 독점권을 누가 보호해주나? 나라가 보호한다. 군대, 경찰, 사법체계가 부동산 보유자의 소유권을 지켜준다. 그 보호 비용은 전 국민이 부담한다. 집값을 띄우는 주체도 전 국민이다. 지하철을 깔고, 학교를 짓는 비용 역시 전 국민이 부담한다. 그렇다면, 부동산 소유자는 독점권만큼의 추가 부담을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 그게 바로 보유세다.

프레시안 : 정부가 임대시장 안정화를 명분으로 임대사업자에게 세금을 면제해주는 정책을 폈다. 그 정책의 역효과로 집값이 더 올랐다는 지적이 많다. 보유세 문제와 더불어 정부의 이 같은 정책 실패도 문제 아닌가?

하준경 : 그 지적이 맞다. 현 상황에서 임대사업자로 등록한 사람은 보유세 인상에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 다만 이 부분은 기술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현재 국가 재정이 부족하다보니 정부가 임대주택을 못 짓는다. 그러니 민간에 이를 장려하고, 그에 맞춰서 세금 인센티브를 주고 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도껏 해야 한다. 정책 실행 기술면에서 과했다. 정부가 손 볼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는 결국 공공임대주택을 늘려야 한다. 임대주택의 중심은 공공이 돼야 한다. 싱가포르의 경우 주택의 80%가 공공 부문이다. 한국 정부가 주거복지 차원에서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한국의 청년들이 결혼도 포기하고 자녀도 포기하고 있다. 높은 집값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집값이 비싸면 출산율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현재 한국 정부의 입장은 한마디로 '인생을 담보로 잡아 집에 평생 묶여 있어라'는 것이다.

▲ 올해 급등한 부동산 가격으로 정부를 향한 대중의 신뢰는 크게 훼손됐다. 정부 부동산 정책의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고, 장기적으로는 공공임대주택 건설에 적극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사진은 빌라와 주택이 밀집한 서울 용산구 한남동 일대. ⓒ연합뉴스

디플레이션 논란은 과장

프레시안 : 당장 정부가 곤경에 처한 핵심은 경제가 성장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특히 보수적 여론이 공격하기 가장 좋은 부문이다. 3분기 성장률이 전기 대비 0.4%를 기록해 1998년 4분기(-5.3%) 이후 가장 낮았다. 디플레 우려도 제기된다. 한국 경제는 침체하는가?

하준경 :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약 2.5%다. 생산가능연령인구가 줄어들고 있으므로, 더 큰 성장은 이제 불가능하다. 고령화로 인해 앞으로 매년 0.7%포인트가량의 성장률 감소효과가 있을 것이다.

현재 대외환경도 좋지 않다. 미중 갈등 등으로 인해 국제무역이 위축되고 있다. 수출주도형 산업구조인 한국은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수출이 줄어들면 그만큼 설비투자도 줄어들게 된다. 이 대내외적 요인은 모두 일시적이지 않다. 구조적 요인이다. 한국 경제가 처한 상황이 어렵다.

여러 언론이 '2% 성장은 부진하다'고 단정한다. 과연 2% 성장이 부진한 것이냐는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나름 선방했다고 본다.

한국 경제의 현 위치를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구매력평가(PPP) 기준 1인당 GDP는 올해 기준 한국이 3만7500달러며 일본은 4만 달러다. 이미 한국의 경제 수준은 일본과 큰 차이가 없다. 앞으로 그 갭은 갈수록 줄어들 것이다.

5년 전 일본의 경제 수준이 한국과 비슷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일본은 2%는커녕 1% 성장도 힘들었다. 한국의 2% 성장률이 결코 낮지 않다.

프레시안 : 마냥 낙관할 상황은 아닌 듯하다. 대외 환경이 어려운 건 사실이며, 일각에선 디플레이션 우려도 제기된다.

하준경 : GDP디플레이터(모든 재화와 서비스를 포괄한 종합 물가 지수)가 4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하니 그 같은 우려가 제기된다. 그런데, GDP디플레이터의 구조를 세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러 요인 중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즉, 국제 반도체 시세가 떨어지면 한국의 GDP디플레이터도 떨어진다.

디플레이션이 일어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나? 내수가 위축되고, 그에 따라 모든 재화와 서비스 가격이 광범위하게 떨어지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그런데 반도체 가격 하락은 국제 시장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한국의 반도체 의존도가 커서 그 영향을 받는 것뿐이다. 이를 디플레이션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프레시안 : 결국 현 침체는 대외무역의존도가 크고 반도체 등 특정 산업 의존도가 커서 생긴 일시적 사건이라는 뜻인가?

하준경 : 그렇다. 시간을 10년 전으로 돌려서 글로벌 금융 위기가 발생했을 당시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주요 선진국은 내수를 강화해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이명박 정부는 반대 정책을 취했다. 환율을 인위적으로 절하해 국제 무역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베팅했다. 당시 고성장하는 중국에 편승해 국제무역에 '다걸기'한 선택이 맞아떨어져 한국이 위기를 돌파했다. 그 결과, GDP 대비 경상수지 비중이 매우 커졌다. 지금 상황은 당시 선택의 악영향이 돌아온 것으로 봐야 한다.

프레시안 : 대외무역에 의존하는 한국 산업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지금과 같은 어려움은 지속되리라고밖에 볼 수 없어 보인다.

하준경 : 이 같은 산업구조는 오랜 시간을 거쳐 공고화했다. 문재인 정부도 신남방정책을 표방하며 수출 주도 시장을 넓히려 한다. 이를 하루아침에 바꿀 순 없다.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을 키워서 내수와 대외의 균형을 맞춰야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답이다.

정부가 국내적으로 역점을 두는 부분은 이른바 4차 산업혁명 산업 지원이다. 이들 산업은 과거와 같은 장비 집약적 산업이 아니라, 지식 집약적이다. 이런 신산업에 투자를 키워가고, 관련 생태계를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

신산업이 노동을 대체한다는 우려가 크다. 하지만 지식기술에도 인적자본집약적인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연구개발(R&D)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한다. 방송도 노동집약적이다. 한국에는 대졸자가 많다. 이들이 일할 일자리 창출에 정부가 투자해야 한다.

한국의 산업구조상 법률, R&D, 회계 등 고부가 서비스업에서 외국 의존도가 매우 크다. 전문 서비스 산업에서 조 단위 적자가 난다. 이런 부분을 국내에서 소화할 수 있다면, 그만큼의 고용 창출 효과도 얻게 된다. 어차피 미래 한국 산업의 지향점이 이 같은 변화라면, 선제적 투자가 필요하다.

▲ 주52시간제가 표류하고 있다. 노동계와 진보진영은 정부가 탄력근로제를 확대하는 타협안에 손을 들어 사실상 주52시간제가 무력화하리라고 우려한다. 지난 달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민주노총 총파업 대회에서 조합원들이 탄력근로제 확대에 반대하는 의사를 표했다. ⓒ연합뉴스

노동생산성 아니라 자본생산성이 문제

프레시안 : 문제인 정부는 출범 초기 친 노동자 정부가 되리라는 기대를 받았다. 출범 초기에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정부가 대대적으로 추진하는 듯했다. 그러나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안이 표류하고, 주52시간제 정착도 어려운 게 현 상황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부는 오히려 경제성장을 위해 재벌과 손을 잡는 행보를 강화하고 있다. 노동계가 결국 정부 지지를 철회한 배경이다.

하준경 : 우리의 절대 노동 시간이 긴 건 분명한 사실이다. 줄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기실 단축 목표인 52시간도 매우 길다. 다만, 주52시간제에 매우 많은 이해관계와 다양한 입장이 얽혀 있다. 다양한 노동 유형에 탄력 있게 접근할 필요는 있다. 무 자르듯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주52시간제 문제를 단순히 노동 문제로만 접근하면 (이해관계 충돌로 인해) 해결이 어렵다. 한국의 하청 구조상 이윤을 대기업이 독식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현 상황에서 주52시간제를 일괄 적용하면 대부분 중소기업은 이를 따르기 어렵다. 노동시간을 줄이면 그만큼 납품단가는 올라간다. 그런데 하도급 업체 중 이를 대기업에 부담하라고 할 수 있는 곳이 있나? 없다. 그렇다고 해당 상승분을 정부가 부담할 수도 없다. 기업 생태계 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결국 기업 생태계의 상생을 유도하는 방안이 52시간제와 함께 마련돼야 한다.

더불어 주52시간 이상 노동하는 건 비정상이라는 인식이 기업계에 자리잡아야 한다. 보통 대기업이 하도급을 주면서 납품단가를 후려칠 때는 '저들이 밤샘작업해서라도 맞추겠거니' 하는 생각도 함께 하며 한계까지 몰아친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보편화해야 한다. 뻔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상생 생태계가 궁극적으로 기업 환경을 좋게 만들어준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요즘 경영계가 스튜어드십 코드를 많이 이야기하는데, 한국 기업이 조금 더 사회적 책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회 전체적으로도 사람값이 비싸야 한다는 인식이 보편화해야 한다. 선진국에서는 사람 한명의 몸값이 매우 비싸다. 한국의 노동값도 더 비싸져야 한다. 산업구조를 선진화하는 차원에서도 비싸져야 한다. 그래야 서비스업 경쟁력이 강해진다.

지금은 쉽지 않다. 기업 생태계의 불균형이 너무 크다. 삼성과 같은 글로벌 플레이어가 있는 반면, 대부분 중소기업은 아직 중진국 수준에 머물렀다. 정부가 할 일은 둘의 균형을 맞추도록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프레시안 : 한국의 노동생산성이 낮으니 노동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노동생산성을 높일 책임은 온전히 노동자에게 있다는 시각이다.

하준경 : 한국 경제의 더 큰 문제는 자본생산성이 낮다는 것이다. 금리는 자본생산성을 반영한다. 자본을 빌려 쓸 때 생산성이 높다면, 그만큼 금리를 높게 쳐줘야 한다. 자본의 한계생산성이 금리의 기본 결정요인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실질금리가 떨어지는 배경에는 결국 낮은 자본생산성이 있다.

실질금리는 곧 경제 펀더멘털을 반영한다. 자본생산성이 낮다는 건 그만큼 자본 과잉 상태라는 뜻이고, 자본에 결합하는 다른 요소가 매우 부족함을 뜻한다.

쉽게 예를 들어보겠다. 지금 컴퓨터 10대가 있다. 이를 이용한 생산성을 최고조화하려면 노동자 10명, 소프트웨어 10개가 필요하다. 현재 한국 경제는 컴퓨터만 있고 사람과 소프트웨어는 부족한 상태다. 그렇다면 컴퓨터를 쓸 사람을 늘려야 하고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야 생산성이 올라간다. 사람보고 컴퓨터 두 대를 돌리라고 한들 생산성은 올라가지 않는다.

자본생산성을 높인다는 건 결국 사람과 소프트웨어 개발 효율을 높인다는 뜻이다. 이는 전부 공공재적 성격을 가진다. 교육 투자를 늘리고 기술개발 투자를 늘려야만 사람과 소프트웨어가 컴퓨터에 맞게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는 민간이 할 수 없다. 정부가 해야 한다.

정부가 대규모 재정을 편성해 공공투자에 나서야 자본생산성이 올라간다. 그런데 정부가 예산을 최소화하면, 당연히 공공 투자도 최소화하고 자본생산성은 올라가지 않는다. 그러니 저성장이 구조화하고, 경제 펀더멘털도 갈수록 약화한다(고령화, 투자 부족).

프레시안 : 자본 과잉 상태로 인해 나타나는 다른 문제가 있나? 생산성이 떨어진다면 그만큼 경제주체는 남아도는 자본으로 다른 투자처를 찾을 수밖에 없다.

하준경 : 자본 과잉 상태가 이어지면 경제주체가 얻는 소득은 자본 유지·보수에 지나치게 투입된다. 한 달에 월급 200만 원을 받는 사람이 람보르기니 자동차를 갖고 있다면, 이 차를 유지·보수하는 데만 월급을 다 써야 할 것이다. 그만큼 노동소득분배율이 덜어진다.

현재 한국의 고정자본 소모 비중은 국민소득의 20%에 가깝다. 감가상각, 노후화한 자본을 보수하는 데만 돈을 많이 쓴다는 의미다. 생산성이 낮은 자본 축적에 너무 큰 자원을 투입하니, 이를 유지·보수하는 비용도 커지고, 그만큼 노동시장 분배에 쓸 수 있는 돈은 줄어든다.

이를 두고 민간 경제 주체가 스스로 조절하라고 놔둬선 해결이 안 된다. 자본축적의 황금률이 존재하는데, 정부가 조정해야만 이를 달성할 수 있다. 불행히도 한국의 정책 결정자 대부분은 자본이 부족한 시대에 성장해 자본축적이 곧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아니다. 물적 자본이 생산성을 가지려면 이에 조응할 지식 기술, 공공재가 있어야만 한다.

물적 자본이 과잉 상태인 이유는 무엇인가. 과잉저축 상태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GDP 대비 소비율은 60% 수준이다. 선진국은 80%가 넘는다. 한국은 과소소비 사회다. 투자효율도 적다. 물적 자본만 많고, 사람과 지식에 대한 투자가 되지 않은 채 저축만 하는 불균형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대표적 사례가 부동산 투자 열풍이다. 부동산 투자는 과잉저축이다. 자본생산성이 낮으니 땅에 투자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대로는 결코 혁신이 일어날 수 없다.

700만 베이비붐 세대가 한 번에 은퇴할 엄청난 위험이 코앞에 닥쳤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일단 저축한다. 돈을 쌓아두고도 미래가 불확실하니 땅에, 집에 돈을 묻는다. 고령화가 진행될수록 부동산에 유동자금이 쌓이는 현상은 더 심각해진다. 이러면, 생산은 누가 하나? 소비가 일어나야 생산 활동도 활발해져 경제 선순환이 일어나는데, 고령화는 이를 막는다.

현 상황에서 돈이 돌게 할 수 있는 주체는 오직 정부뿐이다. 문재인 정부가 처한 상황은 결코 쉽지 않다. 대내외적 위기를 돌파할 답은 과감한 재정투자뿐이다. 정부가 남은 임기 더 큰 예산을 편성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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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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