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오후 6시 전후까지만 해도,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한국당과 막판 합의에 도달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올 정도로 국회 예산안 협상 상황은 오리무중이었다. 실제로 한국당과 민주당은 감액 규모를 1조6000억 원 전후로 하는 총론까지는 합의를 이뤘다.
그러나 한국당은 총액 증감분에 대한 세부 심의를 주장했고, 이를 한국당의 '시간 끌기'로 본 민주당은 협상 진행을 포기하고 '4+1 협의체 안(案)' 강행으로 선회했다. 한국당 심재철 원내지도부 등장 이후 조금씩 예산안·패스트트랩 법안 처리가 지연되는 상황에 대한 당 안팎의 불안감과 우려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문 의장은 이날 오후까지는 "어떻게든 여야가 협의를 해 오라"는 입장을 되풀이했지만, 같은날 저녁 김상희·백재현·변재일·홍영표 여당 중진 의원들이 문 의장을 방문해 '원칙대로 해야 한다'고 설득했고 결국 문 의장도 '정기국회 회기 내 예산안 처리'라는 원칙과 한국당의 협상 태도에 진정성이 부족하다는 판단을 근거로 '강행'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의사봉을 잡고 본회의를 개의한 문 의장은 한국당 의원들의 거센 항의와 야유, 인신공격성 비난에도 꿋꿋이 본회의를 진행하는 뚝심을 보였다. 한국당은 특히 문 의장을 겨냥해 "아들 공천", "공천 대가", "세습 공천" 등 야유성 구호를 외치기도 했으나 문 의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한국당은 다양한 전술로 회의 지연에 나섰다. 본회의가 시작되고 문 의장이 예산안을 의사일정 1항으로 상정하자, 한국당은 조경태 최고위원을 토론자로 신청했다. 조 의원은 그러나 토론을 실제로 하지는 않고 발언석에 선 상태로 20분 가량을 버텼다. 문 의장이 "조 의원, 토론 하실 거냐", "토론을 해달라. 나를 봐서라도 토론 해달라", "안 할 거면 내려가라" 등 어르고 달랬지만 조 의원은 발언을 하지 않았고, 이 시간 동안 한국당은 문 의장과 민주당을 겨냥한 구호를 제창하는 등 항의 행동을 이어갔다.
문 의장은 하지만 20분의 시간이 지나자 "토론 안 하시나? 그러면 토론 종결을 선언하겠다"고 의사봉을 두드렸다. 이후 한국당이 제출한 예산안 수정안에 대한 정부 측의 의견을 청취했고,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을 밝힘에 따라 법에 의해 수정안 표결을 하지 않음을 고지했으며, 다시 민주당 등 4+1 협의체가 제출한 수정안에 대해 같은 절차를 신속히 밟았다. 홍 부총리는 민주당 등 안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고 했고, 표결 결과는 재석 162인에 찬성 156표. 가결이었다. 조경태 의원의 '토론'이 끝난 후 예산안 가결까지 걸린 시간은 단 5분이었다.
예산안이 가결됐음에도 한국당의 항의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기금운용계획안과 임대형 민자사업 한도액안을 상정·가결하는 중에도 한국당 의원들은 계속해서 "독재 타도", "세금 도둑" 등 구호를 외치며 문 의장과 여당을 비난했다.
그러나 문 의장은 물론 정부 측 위원들도 한국당의 항의와 야유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각자 할 말을 사무적으로 서둘러 했고, 기금안과 BTL 한도액안도 5분 만에 끝났다. 예산안 국회 통과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하러 연단에 오른 이낙연 국무총리는, 한국당 정책위의장으로서 문 의장에 대한 항의에 앞장서고 있던 김재원 의원의 면전에서 "심의에 애써준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김재원 위원장과 위원들, 협상을 마무리해 준 여야 지도자들께 각별히 감사드린다"고 인사말을 할 정도였다.
예산안과 기금운용안 등을 의결하고 이 총리의 인사를 들은 뒤, 문 의장은 "정황상 정회를 선포한다"고 밝혔다. 본회의 속개부터 정회까지 걸린 시간은 35분 정도였다.
'패싱'에 뿔난 한국당·변혁, 거센 후폭풍 예고
한국당과 바른미래당 다수파는 '4+1 협의체'가 만든 예산안이 일방 통과된 데 대해 거세게 항의했다. 심재철 한국당 원내대표는 본회의 도중 입장문을 내어 "밀실야합 예산안 폭거"라며 "문재인 정권과 '정권 2중대'들의 야합"이라고 비난했다.
심 원내대표는 "밀봉 예산", "정체 불명의 야합세력들끼리 나눠먹는 혈세 도둑질", "국회 예산심의권을 침탈하는 불법집단의 반헌법적 불법 예산" 등의 표현을 동원하며 "불법행위에 가담한 자들은 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 모든 반헌법적 불법행위는 무효"라고 주장했다.
김재원 정책위의장도 "불법 총동원"이라며 "내가 명색이 예결위원장인데, 위원장도 내용을 모르는 예산안을 세금 도둑 날치기로 처리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당은 본회의 정회 후에도 국회의장실을 찾아가 거센 항의를 이어가기도 했다.
한국당 심재철 원내지도부로서는, 선거에 당선돼 원내지도부가 출범한 지 만 하루 만에 예산안 협상에 실패하고 여당의 강행 처리를 막지도 못하면서 타격이 불가피하게 됐다. 향후 패스트트랙 법안 처리를 놓고도 한국당은 더욱 '강경' 입장으로 몰려나갈 수밖에 없게 됐다는 관측이 나온다.
바른미래당 다수파(비당권파)의 오신환 원내대표도 "민주당의 폭거 행태는 국민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며 "이런 식으로 힘으로 밀어붙이는 국회는 민주당이 되돌려받을 것이다. 저희들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하겠다"고 경고했다.
바른미래당 예결위 간사인 지상욱 의원도 "오늘 올라온 4+1 예산안 수정안은 무효다. 불법 단체에 의해 만들어진 예산안"이라며 "법적으로 엉터리 수정안이 통과됐으니 직권남용 형사고발 조치를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4+1에 참여한 바른미래당 소수파(당권파)는 최도자 수석대변인 논평을 통해 "예산안 통과 법정 기한을 1주일 이상 넘겨 가며 제1야당의 협의를 촉구했지만 한국당은 제대로 임하지 않았다"며 "정기국회를 넘겨 예산안을 방치할 수 없음에 국민을 위한 고육지책으로 통과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정반대 입장을 밝혀 바른미래당의 분열상을 노정했다.
정의당도 여영국 원내대변인 논평을 통해 "원내대표단이 바뀌자 협상에 임할 것처럼 연기를 하던 한국당이 결국 개혁을 막기 위해 예산과 민생법안을 발목 잡는 등 고도의 지연전술을 쓴 것이 들통난 셈"이라며 "예산안이 통과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4+1 협의체' 공조였다. 한국당이 있으면 돌아가지 않던 국회의 시계가 정의당을 비롯한 다른 야당이 참여하니 돌아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 원내대변인은 "민주당은 이를 명심하기 바란다. 한국당과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끝내면 진정한 협치를 만들 수 있다"며 "한국당과 합의정신을 이유로 좌고우면한다면 국민의 지탄은 민주당에도 향할 것"이라고 향후 패스트트랙 법안 처리에서도 민주당이 4+1 공조 체제를 지속할 것을 촉구했다.
민주당 정춘숙 원내대변인은 "한국당이 필리버스터를 철회하겠다고 했지만 의원총회에서 엎으며 약속을 헌신짝처럼 날려버렸다"며 "예산안이 통과되서 다행이다. 한국당과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것은 안타깝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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