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조약 뒤에 숨은 일본

[시민참여시평] 한일 경제전쟁의 본질, 샌프란시스코 체제

한국과 일본이 경제전쟁에 돌입했다. 불매운동은 정당한가, 외교적 대응 강도를 어디까지 높이는 것이 현명한가, '토착왜구'라는 표현은 과연 바람직한가, 부품 소재 분야에서 정말로 일본기업의 대체재를 찾을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은 중요하다. 그러나 더 큰 차원에서 이 사건의 역사적 본질을 이해함으로써 해결의 방안을 모색하는 것도 필요하다. 어쩌면 그것 없이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선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을 인정한 작년 대법원 판결의 핵심적 쟁점이 무엇인지를 이해해보자. 어떤 이들은 이 판결이 국가 간의 합의와 개인의 청구권을 근본적으로 구분해준 것이라고 보는데, 아니다. 또 여기서 인정된 권리가 '미지급된 임금'에 대한 청구권이나, '합법적인' 국가권력의 행사로 피해를 본 것에 대한 '보상금'을 청구할 권리로 오해하는데, 그렇지 않다.

이 판결의 핵심은 식민지배의 '불법성' 여부다. 대법원은 '불법적인' 식민지배와 이에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강제징용 피해자의 위자료청구권을 인정했다. 일본이 펄쩍 뛰는 것은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청구권이 1965년 한일협정으로 소멸했다는 입장 때문이다.

일본이 이러한 입장을 내세우는 근본 배경에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존재한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1951년 9월 8일 일본과 48개국 사이에 맺어진 전후 평화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연합국의 군정기가 끝나고 일본은 주권을 회복해서 다시 독립국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 조약에서 한국은 중요한 문제였다. 1장에서 일본과 연합국과의 전쟁상태가 종료됨을 선언하고, 일본의 주권이 회복되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영토문제를 언급한 2장에서 첫 번째로 언급된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한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에 대한 모든 권리, 자격, 영유권을 포기한다." 여기서 독도가 언급되지 않으면서 국제법상 영유권 문제가 발행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청구권은 어떨까? 이 조약 14조는 "일본이 전쟁 중 일본에 의해 발생한 피해와 고통에 대해 연합국에 배상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지만, 바로 다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그러한 배상을 하기는 어려운 점을 이해해야 한다'는 문장이 달려있다. 여기에 더해 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 국가의 범위조차 "현재의 영역이 일본군에 의하여 점령되고 일본군에 의해 손해를 입은 연합국"으로 제한했다. 우리는 여기에 당연히 한국이 포함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니다. 대상국은 일본이 2차대전 중에 침략한 나라고, 그 이전에 식민지가 되어 연합국이 될 수 없었던 나라, 곧 한국과 북한은 포함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일본은 한국의 샌프란시스코 조약 참여를 반대했고, 실제로 우리는 초대받지 못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지만, 이 조약에서 빠지면서 전승국 지위를 갖지 못했고 결국 배상청구권에서도 배제되었다. 사실상 가장 오랫동안 일본 제국주의와 싸운 나라이자 가장 큰 고통을 당한 나라가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 반면 가장 많은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전승국인 미국과 영국이 배상청구권 포기를 선언하면서 일본은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미국이 일본에게 지극히 관대한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다급하게 체결한 이유는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미국은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일본이 필요했다. 사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맺어진 날 더 핵심적인 조약이 하나 더 체결되었는데, '미일 안보조약'이다. 일본은 패전국으로서 연합국 점령지에서 회복되던 날 곧바로 미국의 동맹국이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수립된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일제 식민지배의 적법성과 배상문제를 둘러싼 논란의 불씨가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4조에서는 '일본의 통치로부터 이탈된 지역(한국이 해당)의 재산상 권리 문제는 해당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특별약정으로 처리한다'고 되어 있다. 이 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950년 10월 미국의 종용으로 한일예비회담이 개시되었는데, 당연히 회담의 주요 의제 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협상에는 15년이 걸렸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자금이 필요했고, 일본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서 준 3억불로 식민 지배의 법적 문제와 보상 문제가 모두 해결됐다고 주장한다. 당시 협정서에는 식민지배가 '무효(null and void)'라는 표현이 들어있는데, 일본은 그 앞에 '이미(already)'라는 표현을 넣고자 했고, 그렇게 되었다. 일본은 1910년 병합조약이 합법적이었는데 1945년 8월 15일에 자연적으로 해소된 것으로, 한국은 병합조약이 원천적으로 불법이라 무효라는 의미로 각각 해석했다.

그럼 일본은 합법적 지배가 자연스럽게 종료된 것에 대해 왜 돈을 준 것일까? 일본은 이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본다. 합법적이지만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이웃에게 축하금을 주고, 대신 보상이든 배상이든 일체의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받았다고 보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일본으로부터 배상을 받아냈다고 선전했다. 물론 양국은 서로의 입장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용이야 어떻든 각자의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넘어갔다.

이번 대법원 판결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판결의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대법 판결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기초한 1965년 체제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한국과 일본의 청구권협정에 대한 해석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불완전한 협정이고, 그런 불완전한 협정에 의거해서 개인들의 청구권 해소를 법적으로 확정할 수 없기 때문에, 한국헌법에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는 식민지배에 대한 개인들의 청구권이 소멸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대법 판결은 냉전시기에 만들어진 샌프란시스코 체제, 그 하위체제로서의 한일협정체제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와 같다. 한국은 100년 전, 50년 전처럼 더 이상 불법적인 조약, 불평등한 조약에 의거한 체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 특히 남북관계를 평화의 시대로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새로운 동북아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반면, 일본은 어떻게든 이 체제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미국-일본-한국으로 이어지는 동북아의 위계질서를 재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만약 변화한다면, 그것은 일본이 평화헌법을 폐기하고 침략전쟁을 할 수 있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이전으로 돌아가는 방향이어야 한다. 그것이 아베의 생각이다.

단순히 불매운동이나, 몇 명 개인의 위자료 문제가 아니다. 부품 소재와 반도체 산업의 미래도 중요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1910년 한일병합,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1965년 한일협정이 만들어 놓은 구조를 바꿀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그 초석을 놓았다. 마무리 짓는 것은 이제 우리 손에 달렸다.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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