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ILO 총회에 못 간 이유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ILO 기본협약조차 비준 안한 노동후진국 멍에

"일부 언론에서 ILO 100주년 기념총회 관련해서 대통령께서 참석하시는 것 아닌가 하는 기사들이 조금씩 보여서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그때는 대통령 외교일정이 있기 때문에 참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점도 지금 먼저 말씀드리겠다."

지난 5월 21일 청와대 고민정 대변인의 브리핑 내용이다. ILO 100주년 기념총회는 6월 10일부터 21일까지, 그러니까 지금 열리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고민정 대변인이 얘기한 외교일정이란 문재인 대통령의 최근 북유럽 3개국(핀란드·노르웨이·스웨덴) 순방을 말하는 것일 테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데?

그런데 북유럽이라고? 그렇다면 ILO 100주년 총회가 열리는 스위스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노르웨이나 스웨덴에서 비행기를 타면 독일을 넘어 2~3시간 비행하면 닿는 거리 아닌가. 아프리카나 남미 외교일정도 아니고,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북유럽을 방문하는 일정인데 이것 때문에 스위스에 못 간다니?


게다가 ILO는 이미 문재인 대통령에게 100주년 기념총회 공식 초청장을 발송한 상태였다. 상황이 이러니 또다시 <인사이드 경제>의 삐딱함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대통령 순방일정이라 해도 저렇게 가까운 거리인데 앞뒤 일정 조금씩만 조정하면 ILO 총회에 갈 수 있는 거 아니야?

문재인 대통령의 북유럽 3개국 순방 일정은 6월 9일부터 16일까지였다. ILO 100주년 총회 기간(6월 10일부터 21일)과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인사이드 경제>의 삐딱함은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순방국 총리들도 ILO 총회 다녀왔다

ILO 올해 총회가 열리는 스위스 제네바에는 창립 1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수많은 국가의 정상들이 날아왔다. ILO 홈페이지(http://www.ilo.org)에 접속하면 어느 나라의 정상(총리 또는 대통령)이 총회에 참석해 연설했는지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접할 수 있다.

짧은 영어실력으로 누가 누가 왔었나 훑어보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노르웨이 총리 에르나 솔베르그와 스웨덴 총리 스테판 뢰벤의 이름을 발견한 것. 즉, 문재인 대통령이 방문한 북유럽 국가 총리들도 ILO 총회에 와서 연설을 하고 갔던 것이다.

"오늘 우리가 기념해야 할 것은 국제노동기구라는 조직도 아니고 협약도 아니며 날짜도 아닙니다. 우리가 기념해야 할 것은 바로 운동입니다. 1차 세계대전의 비극으로부터, 공장과 농장의 비참함에서, 배고픔과 누추함에서 벗어나 앞으로 전진하려는 운동 말입니다. 'ILO'라는 세 글자가 이 운동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이제 미래를 향해 더 뻗어가려 합니다."

ILO 총회 첫날인 6월 10일에 스웨덴 총리(스테판 뢰벤)가 연설한 내용 일부이다. 노르웨이 총리(에르나 솔베르그)도 같은 날 ILO 100주년을 축하하는 연설을 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다시 자국으로 날아가 각각 6월 13일과 6월 15일에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12일 오후(현지시간)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교에서 오슬로 포럼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맞이해야 할 순방국 총리들도 날아와서 100주년 총회를 축하하는 연설을 하고 갔는데, 정작 ILO로부터 정식 초청장까지 받아든 문재인 대통령은 바로 인근까지 왔다가 제네바에 들르지 않고 그냥 돌아간 것이다. 외교 관점에서 보더라도 ILO 총회에 들러 노르웨이·스웨덴 총리와 조우했다면, 며칠 뒤 순방했을 때 분위기가 훨씬 화기애애하지 않았을까?

이제 <인사이드 경제>의 삐딱함에 호기심이 보태지기 시작했다. ILO 총회에 연설할 자격을 누가 심사하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문재인 대통령은 제네바를 코앞에 두고 한국으로 돌아갔을까? 그래서 ILO 홈페이지를 뒤져서 지난주에 어느 국가 어떤 정상들이 총회 자리를 찾아 연설했는지를 정리해 보기로 했다.

동유럽·아프리카·남미 정상들 한 자리에

총회가 시작되고 3일간(6월 10~12일) ILO 총회장을 찾은 각국 정상들을 표로 정리해보니, 북유럽(스웨덴·노르웨이)과 서유럽(독일·프랑스)만이 아니라 동유럽(러시아·그루지아·슬로베니아·세르비아) 국가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뿐이 아니다. 가나·모로코·튀니지·코트디부아르·마다가스카르와 같은 아프리카 국가 정상들도 많이들 찾아왔다.(아래 표)


"일의 미래(Future of Work)라는 100주년 총회의 주제가 인간 중심의 성장(human-centred development)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아직 왕국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에스와티니(옛 스와질랜드) 국왕도 ILO 100주년을 축하하러 먼 길을 날아왔다.

"일의 미래에 대한 성찰은 반드시 인류의 미래를 톺아보는 것이어야 합니다. 특히 인류의 다수는 (가난한) 남반구에 살고 있고, 절반은 아프리카 대륙에 있지요." 한 달 전 프랑스군의 인질 구출작전으로 납치된 한국인도 함께 구출된 사건이 벌어졌던 부르키나파소 총리도 ILO 총회에서 연설했다.

"현대판 노예제도(modern slavery)를 과거의 유물로 만들어 버리는 미래,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져와야 할 일의 미래입니다." 브렉시트(Brexit) 문제로 결국 사임을 결정해 이제 임기가 한 달 남짓밖에 남지 않은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도 ILO 총회장을 찾았다.

ILO 100주년 총회에서 연설할 자격

그러던 중 <인사이드 경제>는 공통점을 찾았다. 지난주 ILO 총회장에서 연설한 26개 국가 정상들의 공통점을 말이다. 이들 국가 모두 ILO 핵심협약인 87호·98호 모두를 비준했거나, 최소한 하나 이상의 협약을 비준한 나라들(모로코와 네팔은 98호 협약만 비준)이라는 사실이다.

아니, 가나·몰타·튀니지·코트디부아르·마다가스카르와 같은 나라들에서 한국도 비준하지 않은 2개의 협약을 모두 비준했다고? 이거 실화인가? 그렇다. 그래서 한국은 더욱 부끄러워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경제 규모에 비례하지 않듯 '노동존중' 역시 경제력과 무관하다.

다시 말해 결사의 자유 핵심협약을 비준조차 하지 않고서 ILO 100주년 총회 무대에 선 국가 정상은 없다는 말이다. 만일 문재인 대통령이 저 자리에 섰다면 핵심협약조차 비준하지 못한 채 무대에 선 유일한 인물로 지목될 것이었다. 즉, 문재인 대통령은 외교일정이 아니라 핵심협약 비준을 하지 않아서 제네바에 가지 못한 것이다.

다만, 앞의 사례들 중에서 팔레스타인만은 예외인데 이 나라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반대로 ILO는커녕 UN 가입도 가로막힌 상황이라 ILO 협약 비준 의무가 없는 국가이다. 몇 년 전에 UN 산하기구인 유네스코(UNESCO)가 팔레스타인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자 미국이 곧바로 유네스코를 탈퇴하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던가.

"일의 미래에 대한 ILO의 권고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국민이 가진 잠재력과 제도에 투자하는 것은, 시민에게 봉사하고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능력을 가진 독립국가 팔레스타인 건설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민중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죠."

그럼에도 총리가 직접 날아와 ILO 100주년을 축하하며 공식 무대에서 연설을 했다는 점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즉, 100주년 총회 자리는 ILO 핵심협약을 비준함으로써 최소한의 노동기본권을 존중하는 나라, 또는 제국의 핍박을 받는 나라의 정상들만 설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었다.

저 많은 나라들 모두 입법 완비 후에 협약을 비준했을까?

내친 김에 좀 더 자세한 통계를 살펴보도록 하자. 187개에 달하는 ILO 회원국들 중에서 87호 협약 비준 국가는 총 155개국이며, 98호 협약 비준 국가는 166개국이다. 한국을 포함해 87호·98호 협약 모두를 비준하지 않은 회원국은 총 20개국뿐이며 그 부끄러운 명단은 아래와 같다.


다음으로, 87호·98호 협약 모두를 비준한 나라는 총 154개국이며 그 명단을 이 글의 끝에 공개한다. “내가 모르는 나라가 이렇게 많았나? 그리고 이런 나라들이 모두 결사의 자유 핵심협약을 비준했단 말인가?” 이 글을 쓰는 내내 들었던 생각이다. <인사이드 경제> 독자 여러분도 명단을 읽어내리며 똑같은 생각을 갖게 되리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ILO 협약 비준 얘기만 나오면 문재인 정부가 항상 사용하는 레퍼토리가 있다. 국내법을 충분히 정비하기 전에는 ILO 협약을 비준해선 안 된다는 논리이다. 그렇다면 87호·98호 결사의 자유 협약 중 어느 하나라도 비준한 나라는 총 167개국에 달하는데, 이들 모든 나라에서 입법을 다 완료한 뒤에 협약을 비준했을까?

<인사이드 경제>가 조사를 해본 것은 아니지만 그 답이 무엇인지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가장 최근에 협약을 비준한 나라는 지난해 멕시코와 이라크인데, 관계법령을 협약에 맞게 고친 뒤에 비준한 것이 아니다. ILO 협약부터 비준한 뒤 관계법령에 대한 개정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사실이 아니라면 정부가 167개국 전수조사를 한번 해보시라.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 그리고 그에 부화뇌동하는 지식인들은 입법 과정 없이 협약을 비준하면 마치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난리를 친다. 그런 분들의 특징이 있다. 이럴 때 말 다르고 저럴 때 말 다른, 전형적인 이율배반을 행한다는 것이다.

자본가들을 위해 규제를 없애야 한다고 할 때엔 법률 개정 없이 정부가 무조건 행정조치로 즉각 폐지하라고 주장한다. 4차 산업혁명이 어쩌고, 그에 대한 대비가 어떻고, 플랫폼 기업을 키워야 되니 어쩌니 할 때에도 입법 완전히 무시하고 밀어붙이라고 강요한다. 그것이 노동자의 권리에 미칠 어마어마한 타격에는 눈을 감는다.

기간제법·파견법이라는 악법을 모든 사업장에 전면적으로 적용할 때에는 한치의 주저함이라도 있었던가? 그것이 몰고 올 엄청난 노동기본권 박탈은 신경이나 썼던가? 2년마다 잘리는 수백만 명의 비정규직이 양산되었을 때 모두들 침묵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 짓을 서슴지 않았던 분들이 100년의 검증을 거친 ILO의 핵심협약 비준은 왜 이토록 두려워하느냐 말이다.

▲ ILO 87호·98호 결사의 자유 협약을 모두 비준한 154개국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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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입니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글을 써 오고 있습니다. 주로 자동차산업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뤘습니다. 지금은 [인사이드경제]로 정부 통계와 기업 회계자료의 숨은 디테일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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