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반환 교섭에서 한국 측은 문화재 반환 시기, 즉 일본이 문화재를 불법·부당하게 반출하기 시작한 시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한일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1910년 8월 22일로 생각하고 있었을까? 이번 칼럼에서는 한국 측이 문화재 반출 시기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었는지를 경천사지 10층 석탑 무단 반출 사건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한국 측의 문화재의 정의와 반출 시기 설명
한국 측이 문화재 반출 시기를 명확하게 설명한 것은 제4차 한일회담 때였다. 한국정부는 1958년 5월 22일에 주요 의제 관련 교섭 방침을 주일대표부에 보내는데, 문화재 반환 교섭 관련 방침으로 '의제 우선 사항', '예술품 반환에 대한 초기 조치', '파견 위원의 미술품 조사', '개인 소유의 미술품', '한국 예술품의 정의'가 있었다.
한국 측은 상기 방침을 바탕으로 1958년 6월 4일에 열린 제1회 문화재소위원회에서 한국 문화재의 정의와 함께 그 반출 시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A. "한국 예술품"은 모든 고서적, 좁은 의미의 미술품, 골동품, 기타 문화재 및 지도원판을 포함한다.
B. 국내에는 서로 다른 의견이 있지만, 이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기 위해 한국에서 일본으로 빼앗긴 미술품의 반환 요구를 1905년 이후로 한정한다. 따라서 귀측이 우리에게 인도할 준비가 되어 있는 모든 한국 예술품의 목록을 가능한 한 조속히 제출해 줄 것을 요청한다. 1905년에 대해 덧붙이자면, 국내에는 1905년 이전에 빼앗긴 미술품도 한국에 반환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지하는 의견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문제의 조속하고 원만한 해결을 위해 1905년을 기준으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일본 측은 '1905년의 언제인가, 통감부 설치 날짜인가?'라고 질의했고, 한국 측은 확인한 후 설명하겠다고 답변했다.
반출 시기에 관한 추가 설명
제1회 문화재소위원회가 끝난 후 주일대표부는 반출 시기가 1905년의 언제인지에 대해 한국정부에 문의한다. 한국 정부는 이를 설명한 '1905년(한국 예술품 반환 관련)'이라는 지침을 주일대표부에 보낸다.
이 문서는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이 한국을 점령하려는 일본의 야망을 부추겼고 그 과정에서 한일의정서, 제1차 한일협약,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으며, 특히 을사늑약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오면서 "일본은 사실상 조선의 실질적 통제권을 장악했다. 일본인들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조선에서 국보를 빼앗는 것은 그들에게 상당히 쉬운 일이었다"고 지적했다. 이어서 1907년에 발생한 경천사지 10층 석탑 무단 반출 사건을 언급하면서 문화재 반출 시기 기준인 1905년에 대해 설명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해 근대화·서구화를 달성하며 국력을 키웠고, 제국주의로 변질되면서 주변국을 침략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본은 운요호 사건(1875년 9월)을 시작으로 조선을 침략했고, 한일의정서(1904년 2월), 제1차 한일협약(1904년 8월),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 1905년 8월), 정미 7조약(1907년 7월) 등 일련의 협정·조약 체결을 강요하며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나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속속 모여들었고, 정치·경제·사회 등 여러 면에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시대가 되었다. 그때 일본인들이 벌인 불법 행위 중 하나가 바로 조선의 유물들을 불법적·강제적으로 취하는 일이었다.
한국정부는 이와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예로 들면서 문화재 반출 시기 기준을 1905년으로 설정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당시 경천사지 10층 석탑과 관련하여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경천사지 10층 석탑 무단 반출 사건
한일강제병합 이전부터 이미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고분들을 도굴하거나 불법적으로 발굴·매매하는 행위를 저질렀고, 수많은 유물들을 일본으로 불법 반출하기도 했다. 한국정부는 상기 지침에서 그 대표적인 예로 1907년에 발생한 경천사지 10층 석탑 무단 반출 사건을 지적했다.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1348년에 만들어진 고려 시대 석탑으로 개풍군의 경천사(敬天寺)에 있었다. 1907년에 일본으로 무단 반출되었다가 1918년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후 일제강점기 내내 경복궁 내에 해체된 상태로 방치되었다.
경천사지 10층 석탑이 큰 수난을 겪은 원인은 당시 궁내대신(宮内大臣)이었던 다나카 미쓰아키(⽥中光顕)에게 있었다. 그는 1907년 1월 24일에 열리는 황태자 이척(순종)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특사로 조선에 왔다가 이 석탑을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했다. 고종에게 석탑을 요구했지만 실패했고, 귀국 후 당시 한양에서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던 곤도 사고로(近藤佐五郎)라는 자에게 부탁하여 석탑을 무단으로 반출했다. 이 사건은 당시 신문에서도 여러 차례 보도되기도 했다.
다카나 미쓰아키의 사주를 받은 곤도 사고로 등은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일본으로 반출했고, 석탑은 3월 중순 즈음에 도쿄의 제실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들은 석탑을 지키려는 조선인들을 무력으로 위협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이뿐만 아니라 화강암처럼 단단하지 않은 대리석으로 석탑이 제작되었기 때문에 해체와 운반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훼손이 발생했다.
이와 같은 경천사지 10층 석탑 무단 반출 사건에 대해 한국정부는 앞에서 언급한 '1905년(한국 예술품 반환 관련)' 지침에서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1907년에 일본 황실에서 다나카(田中) 자작이 한국 황태자 결혼식에 참가하러 왔을 때 그는 풍덕(豊德)에 있는 아름다운 오래된 탑을 선물로 요구했다. 왕이 분개하여 거절하자 다나카는 무장한 일본군을 보내 탑을 분해하고 배로 일본에 보냈다. 이것은 일본이 한국에서 함부로 국보를 뒤적이며 찾았던 방법을 예로 든 것이며, 1910년의 합병 이전에도 그러했다. 1905년 이후 많은 한국 국보가 일본인 침략자에 의해 일본으로 빼앗겼다. 없어진 한국 예술품의 반환 기간은 1905년으로 설정해야 한다.
옮기기 힘든 무거운 석탑을 무력을 동원하여 조선의 허가 없이 해체하고 일본으로 무단 반출한 이 사례 하나만으로도 한국정부가 왜 문화재 반출 시기 기준을 1905년으로 정했는지 그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도 석탑 무단 반출 비판
한편 경천사지 10층 석탑 무단 반출 사건은 조선인들의 공분(公憤)을 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에서도 이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다. 제3대 통감이자 제1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도 석탑의 반출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다나카 미쓰아키에게 석탑을 조선에 돌려놓을 것을 여러 차례 요구하기도 했다.
한일회담 당시 일본 측도 이에 대해 "이 석탑은 원래 다나카 백작이 조선에서 가져온 것인데, 총독은 백작에게 집요하게 (반환을 요청해: 필자 주) 역으로 조선에 반환시킨 것으로 경복궁에 놓여 있었다"라고 말했다.
한일회담 당시 한국 측은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반출한 고서적 등에 대해 반환을 요구했는데, 이에 대해 일본 측은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이 조선 유물 보호에 힘썼다는 취지의 설명을 하면서 했던 발언이었다. "이토씨, 데라우치씨는 모두 훌륭한 사람으로 약탈하거나 훔친다거나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반박하는 등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을 둘러싼 양국의 인식 차이가 뚜렷했지만, 이는 차치하더라도 데라우치 마사타케조차도 다나카 미쓰아키에게 '집요하게'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조선에 돌려놓을 것을 요청할 정도였으니, 석탑 무단 반출 사건이 당시 큰 문제였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다나카 미쓰아키는 궁내대신이라는 높은 직위를 믿고 있었는지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의 요청에도 굴하지 않고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조선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결국 석탑은 해체된 상태로 10여 년간 상자 속에 방치되다가 1918년 11월이 돼서야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기구하게도 석탑 해체와 운반 과정에서 크게 훼손되어 경복궁 근정전 구석에 조각난 채로 수십 년간 방치되는 신세가 되었다.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 방치되어 있다가 1959년 복원 작업 시작, 1960년 완공 후 경복궁 전시, 1962년에 국보 제82호 지정되었다. 이후 1995년부터 10년간 해체보수 작업을 거쳐서 2005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복원되었다. 일제강점기의 무단 해체와 반출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지만,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1층에서 많은 관람객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 참고문헌
한일회담 관련 한국정부 외교문서 및 일본외교문서
엄태봉, <한일 문화재 반환 문제는 왜 해결되지 못했는가?-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문제의 구조'>, 경인문화사,
2024.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근대 일본인의 초상(近代日本人の肖像) 홈페이지
<대한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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