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 청소노동자로 20년, 北 '로동자' 출신 경화 씨 이야기

[인터뷰] <나의 살던 북한은> 쓴 경화 씨

1997년 탈북했다. 고난의 행군기다. 11개월 간 중국을 표류하다 이듬해인 1998년,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 뒤로 20여 년. 경화(가명, 55) 씨는 강원도 춘천에 정착해 계약직 청소노동자로서 한국 생활에 적응해 왔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우유조차 비려서 마시지 못하던 그는 이제 피자의 치즈 맛을 안다.

지난 2014년 여성주의 언론 <일다>에 연재된 경화 씨의 글을 모은 책 <나의 살던 북한은>(글·그림 경화, 일다)은 조금 색다른 에세이다. '개성 출신의 남한 청소노동자'인 경화 씨는 드라마, 노래, 음식을 소재로 남과 북의 다른 점과 같은 점을 풀어놓았다. 소박한 글에는 과장이 없다. 괜스레 웃음이 나오는 이야기가 있고, 마음 아픈 이야기도 있다.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남과 북의 차이가 느껴진다.

남한 아이돌 노래의 가사에 감동하고, 사극 드라마에 푹 빠지고, <동물농장>을 보고 웃음을 짓는 경화 씨는 단순히 '한국 만세'를 외치지 않는다. 북한의 나쁜 점을 이야기하면서도 북한을 악마화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를 평범한 사례를 들어 독자에게 전한다. 이 책이 힘을 내는 지점이다. 탈북자의 정착을 제대로 돕는 길은 단순한 자금 지원이 아닌, 응원과 안정된 일자리라는 지적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경험을 바탕으로 나온 이야기이기에 울림이 더 크다.

지난 17일, 춘천의 한 커피숍에서 경화 씨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일자리가 없어 불안하다"는 말에서 그가 한국 사회에 완전히 적응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경화 씨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모습을, 북한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고난의 행군기, 고향을 떠나 남으로

경화 씨는 '양반의 고장'으로 불린 개성 출신이다. 스무 살에 함경북도 무산으로 시집갔다. 무산은 탄광이 유명한 곳이다. 그곳에서 고난의 행군기를 맞았다. 경화 씨는 폐렴에 걸렸다. 병원에는 약이 없었다. "장마당에 가면 중국에서 들여온 파란 해열제가 있으니, 그걸 사먹으라"는 게 의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었다. 경화 씨는 피를 토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무의미한 처방이었다. 아이들을 개성에 맡기고, 무산으로 돌아와 역전에서 노숙했다. 이대로 죽겠거니 했다.

"어제 이야기하던 사람이 다음 날 아침에는 죽은 채로 발견되곤 했어요. 한 아이 엄마는 죽은 아이를 업고 다녔어요. 엄마가 제대로 못 먹어 젖이 안 나오니 물에 사카린을 섞어 아이에게 먹였는데, 아이도 약해져서 죽은 거예요. 그런 일이 부지기수였어요."

"중국에 가서 약만 먹으면 살 수 있다." 알던 할머니를 따라 중국으로 건넜다. 알고 보니 그 할머니가 인신매매꾼이었다. 다행히도 중국 생활 11개월 만에 착한 조선족을 만나 남한 사람과 연결됐다. 그들을 통해 1998년 남한에 들어왔다. 아직 한류가 북한에 퍼지진 않았을 때다. 경화 씨는 남조선은 못 사는 나라, 인민이 다 헐벗고 굶주리는 나라라고만 배웠다. 그래도 공안이 추적하니, 남한행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본 모습은 달랐다.

"처음 놀란 건, 사람들이 너무 질서가 없어보였다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우왕좌왕하는가, 왜 젊은 학생들이 줄을 맞춰서 걷지 않는가, 이런 생각 했죠. 우리는 줄 맞춰 노래 부르면서 학교에 가고 출근하는데, 그런 모습과 비교하니 남한 젊은이들은 생각 없이 다니는 사람들 같았어요. 나중에야 다들 제 나름의 질서를 지키고, 제 나름의 길을 걷는다는 걸 알았죠."

▲ 경화 씨가 어릴 적 감명 깊게 본 북한 영화 <꽃 파는 처녀>의 장면을 직접 그렸다. ⓒ일다

"北 과장되게 비난하진 말았으면"

6개월의 국정원 생활을 마치고 퇴소했다. 거주지를 춘천으로 배정받았다. 요즘은 하나원을 퇴소하는 탈북자의 거주지 배정 시 서울과 같이 인기 지역에 지망자가 몰리면 제비뽑기를 한다. 당시는 그저 국정원이 정해준 곳에 정착하는 게 다였다. 경화 씨는 자신이 춘천에 처음 정착한 탈북자며, 강원도 전체로도 두 번째 정착 탈북자라고 했다.

정착 초반에는 안보 강연을 다니느라 바빴다. 학생을 상대로, 공무원을 상대로, 회사원을 상대로 바삐 안보 강연을 다니곤 했다. 강연이 끝나고 경찰들과, 학생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경화 씨는 서서히 남한을 학습해 갔다. 강연 당시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고 했다.

"저는 북한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거든요. 북한이라고 다 나쁜 것 아니고, 남한이라고 다 좋은 것 아니잖아요. 그런데 내가 느낀 대로 이야기하면 자유총연맹 같은 (보수) 쪽에서 북한 나쁜 얘기 왜 안하느냐고 항의하더라고요. 그래서 그쪽(보수단체)에서 잡아준 강의에는 나가기 싫었어요. 6.15 남북 공동 선언인가, 그때 이후로 통일부가 탈북 강연자들 급히 다 모으더니 (북한 과장되게 욕하지 말고) 저처럼 강연하라고 하더라고요."

경화 씨는 TV에 소개되는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보는 게 불편하다. 과장이 많아서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 될 텐데, 저 사람들이 과연 알고 저런 말을 할까 싶다.

"탈북자끼리 뻔히 알아요. 권력 생활을 안 하던 사람들이 주로 남한에 오는데, 그 사람들이 북한 실정을 얼마나 알겠어요. 방송에 젊은 청년들이 많이 오던데, 대부분이 한참 북한이 어려울 때(고난의 행군기)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학교에도 제대로 안 나갔을 거예요. 집단 생활을 제대로 안 한 사람들이 직업 생활을 해 본 나도 확실치 않은 이야기를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걸 보면 의문이 많이 들어요. 과장된 이야기는 안 했으면 좋겠어요."

한국에서 접한 새로운 문화, 갑질

경화 씨는 북한에서 '로동자'였다. 한국에 와서도 로동자 출신인 그는 일해야 했다. 안보 강연을 다니는 도중 미용자격증을 땄다. 첫 일자리인 미용실 업무를 오래 하지 못했다. 그간 쇠약해진 몸이 독한 미용약 냄새를 견디지 못했다. 의사가 그 일을 그만하라고 권유했다. 그 뒤로 인삼 가공식품 공장에서도 일했고, 공공식당 취사 업무도 해 봤다.

경화 씨는 한 대학교에 일자리를 얻었다. 청소노동자였다. 5년을 일하고 몸이 아파 쉬었다. 그 때 <일다>에 이 책을 만든 이야기를 연재하고, 지역 아파트 청소노동자로 취업했다. 그곳에서 새로운 한국의 문화를 접했다.

"계단을 청소하는데 자기 짐을 계단에 내놓은 집이 있더라고요. 제가 치워달라고 했어요. 다른 사람 이동에 방해되고, 청소하기도 어려우니 짐을 넣어달라고요. 저한테 삿대질을 하며 막 욕하더라고요. '기껏 청소하는 주제에 목청 키우느냐'고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내뱉더라고요. 결국 싸우고 그 길로 그만뒀죠. 나중에야 그게 '갑질'이라는 걸 알았어요."

경화 씨가 보기에 남한은 직업의 귀천을 너무 따진다. 돈 있는 사람일수록 겸손해야 하는 법인데, 돈만 있으면 뭐든 가능한 빈부 격차 사회라 그런 것 아닌가 싶다. 다 같은 사람들이니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경화 씨가 살던 북한도 기실 그런 면에서 남한을 닮아가고 있다.

"요즘은 평양뿐만 아니라 지방에도 큰 도시에는 빈부격차가 엄청날 거예요. 당장 제가 있을 때도 간부 집, 중국을 상대로 무역하는 집들은 떵떵거리면서 살았어요."

서로 응원하고, 배우고

경화 씨는 초기 탈북자다. 그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남북정상회담을 어떻게 봤느냐고 물었다.

"보기 좋았죠. 두 사람(문재인, 김정은)이 손잡는 걸 보니 가슴이 울컥하더라고요. 김정은이 마음 다잡고 조금이라도 좋게 변했으면 해요. 요즘은 또 상황이 어려워진 것 같은데, 남북정상회담 당시도 마냥 쉽게 되리라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이제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남한에서 보냈다. 경화 씨는 사극 드라마는 다 좋아하고, 이승철의 노래도 좋아한다. 다만 사랑 타령을 하는 아침드라마는 도무지 보지 못하겠단다. 20년이 넘게 산 곳에서 적응이 되지 않는 게 또 하나 있다. 음식이다. 경화 씨는 고기를 잘 먹지 못한다.

"남한 음식이 대체로 너무 달고 조미료가 너무 강해요. 북한이 재료가 부족하다 보니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어릴 적 먹던 북한 음식은 담백하고 재료 맛이 좋았는데 이곳 음식은 아직 힘들어요. 유명하다는 북한 식당도 여럿 가봤는데, 기실 다 남한 사람 입맛에 맞춘 식당이더라고요."

경화 씨는 오랜 시간 노동자로 지낸 만큼, 주로 바깥에서 밥을 먹었다. 동료들과 식사를 할 때면 맨밥에 나물을 주로 먹었다. 나물반찬이 잘 나온 날에야 밥을 많이 먹곤 했다.

다만 의외로 적응된 음식도 있다. 피자다. 경화 씨가 처음 남한에 들어와 국정원에서 지낼 때는 우유도 넘기지 못했다. 지금은 치즈 맛을 느낄 정도가 됐다. 그래도 가끔은 고향의 보쌈김치 생각이 간절하다. 어릴 적 부모님은 여러 재료가 들어간 보쌈김치 속은 아버지와 할아버지만 드시게 했고, 경화 씨에게는 퍼런 배춧잎만 줬다. 경화 씨는 그게 더 맛있었단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딸 차별 아니었나도 싶다. 북한은 공산권 국가 중에서는 드물게 남녀 차별이 심한 나라다. 남북이 꼭 닮은 지점이다.

20년의 세월이다. 돌아보니 남한에서의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다. 건강 문제로 일을 쉬는 지금도 경화 씨는 불안하다.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강하다. 전쟁터 같은 삶이었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이제 굳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고향에 두고 온 자식들이 눈에 밟힐 뿐이다. 경화 씨는 다른 탈북자들도 용기를 잃지 말고 열심히 살아가기를 바란다. 남한 사람들도 탈북자에게 선입견을 갖지 말고, 그들의 적응을 응원해주기를 바란다.

“세상을 마감하는 날까지도 우리 탈북자들은 배우고 익혀야 돼요. 지금까지의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게 마음 다잡고 더 열심히 살아야 돼요. 이곳 영구임대아파트에 탈북자들이 제법 사는데, 특히 남자들은 매일같이 술 마시고 싸워요. 불안해서 그렇겠다 생각은 들지만, 더 잘 살려고 발버둥쳐야 돼요. 내 삶을 돌아보면 참 힘들었는데, 그래도 후회는 안 해요. 탈북자들이 이 사회에 정착하는 게 힘든데, 주변에서 많이 응원해주면 좋겠어요.”

▲ <나의 살던 북한은>(글, 그림 경화)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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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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