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相生)을 꿈꾸었던 선각자

만나는 사람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을 자주한다. 봄은 봄인데 봄 같지 않다는 얘기다. 변덕스런 날씨를 두고 하는 말인데, 꼭 그것만은 아니라는 소리도 들린다. 꽁꽁 얼어붙은 정국과 경제사정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필가 김영일 씨
벚꽃이 만발하고 목련이 함박웃음을 짓고 있지만 봄이 아직 멀게 느껴진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경남 창녕군 화왕산으로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그중에서 나는 좀 돌아가지만 계성 개천가를 따라 옥천 골을 거슬러 정상까지 가는 코스를 좋아한다. 옥천 매표소를 지나면 절터가 있었다는 입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옥천사지(玉泉寺址)이다. 옥천이라는 마을 이름도 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안내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우리가 요승(妖僧)으로 알고 있는 신돈(辛旽)이 나고 자란 절터이다. 600년이 지나도록 아직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니, 참으로 기이하다.

그것도 관리하거나 보존한 것도 아니고 방치된 채로 있는데, 밭이나 다른 용도로 개발되지 않고 그 오랜 세월을 용케도 남아 있었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신돈이 영산 신(辛)씨고 창녕출신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그가 고려 말의 승려이며 정치가였다는 것도 잘 알지 못한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평등정신을 주창하고 노비제도를 철폐해 신분차별을 없애고 귀족이 강제로 빼앗은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선정을 베풀며, 백성을 섬기는 정책을 시도한 선각자(先覺者)였다는 사실도 까맣게 모르고 있다.

심지어 축재(蓄財)와 축첩(蓄妾)을 했다는 헛소문까지 퍼트리고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아들이라고 폄훼하고 나라를 어지럽힌 패륜(悖倫)인으로 매도하기까지 했다. 역사는 승자(勝者)의 편에서 기록된다. 따라서 패망한 왕조와 그 국가에서 벼슬한 사람들의 치적은 대체로 훼손되거나 왜곡 서술되어진다. 신돈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법을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일찍 죽지 않고 공민왕(恭愍王)이 국정을 제대로 돌보았다면 그리고 신돈을 모함하고 개혁에 부정적이었던 권문세족들이 십분 양보하여 새 시대를 여는데 동참하고 원나라에 맞서 싸우고, 신흥 유학자들이 기득권 세력을 이기기 위해 조직한 파당(派黨)만 없었다면, 고려는 패망하지 않았을 것이고 조선 건국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익 없는 명분싸움에 목숨을 건 당파(黨派)나 정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수백 년 동안 허송세월 보내며 생산성 없는 갑론을박(甲論乙駁)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고 왜와 오랑캐도 침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뿐인가, 헐벗고 굶주리며 비참하게 살아 온 우리조상들의 잃어버린 400년(16-20세기)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당파의 잔재인 여야(與野)는 당리당략(黨利黨略)에 얽매여 양보 없는 구태정치로 일관하고 있다. 내 것 네 것과 내편 네 편만 따지고 가르는 속 좁은 장면을 언제까지 봐야 할지, 화가 난다. 게다가 요즘은 이념 논쟁에까지 빠져 진보는 보수를, 보수는 진보를 서로 인정하지 않고 경시하는 풍조까지 생겨 국민정서가 이분 사분 쪼개지고 있다.

이 지경이 되어도 누구하나 나서서 수습하는 사람은 없고, 내로남불이라는 정체불명의 신조어가 매일 같이 언론에 노출되어도 부끄러워하거나 반성하는 사람은 없다. 답답함을 넘어 참담할 뿐이다. 신돈 스님의 담대한 용기와 포용력 그리고 거침없는 개혁 드라이버가 요즘 들어 더욱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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