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여, 역모를 꾸며라!"

[김기협의 퇴각일기] 신영복 선생의 글을 번역하며 '사제관계'를 생각하다

'퇴각일기' 연재를 시작하면서 조마우로 군을 제자로 거둔 이야기를 적었다. 적으면서 마음 한 구석이 켕겼다. 남에게 스승 노릇 하겠다고 나서면서 그 노릇이 어떻게 하는 건지 내가 알기나 하는 건가? 돌이켜 보면, 평생을 통해 이분이 내 '스승'이라고 공언할 만한 당당한 사제관계를 맺은 일이 없다. 마음속으로 가르침을 얻으며 '선생님'으로 모셔 온 분은 많지만, 학계의 관습과 제도에 따른 사제관계를 맺는다는 게 쉽지 않았다.

이 부적응 문제를 주변에서는 '자유주의'로 해석하는 일이 많았다. 권위를 세우는 일이나 받드는 일이나 모두 배척하는 자세라는 것이다. 자유주의가 좋은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던 청년 시절에는 그럴싸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 구석에 석연치 않은 마음이 있었다. 또래에 비해 권위에 순응하려는 경향이 강한 편이라는 사실을 어릴 적부터의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근년 들어 내 '권위주의' 성향을 부끄러울 것 없는 자연스러운 특성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문명사 공부가 한고비를 넘기며 문명사회의 질서에서 '권력'과 대비되는 '권위'의 가치를 크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학문의 자세에서 권위주의는 필수적인 요소다. 좋은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었을 때 그로부터 더 많은 좋은 이야기를 기대하며 경청하려는 태도 없이 어떻게 공부가 쌓일 수 있겠는가.

근 30년 전 가톨릭 교회사연구소의 발표회에서 뮈텔 주교에 대한 비판적 연구의 발표를 놓고, 모처럼 격렬한 토론이 벌어진 일이 있다. 신앙인 입장에서는 비판에 절제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보수적 주장과 호교론을 극복해야 한다는 진보적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토론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외교인인 내 관점도 이야기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학문의 전문성을 내세우는 진보진영 편에 설 것을 대개 기대했겠지만, 나는 중도적인 입장을 내놓았다. 교회사 연구에서 신앙심은 동력을 만들어내는 엔진과 같은 것이고 이성적 비판정신은 방향을 잡아주는 운전대와 같은 것이므로, 어느 한 쪽을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이라고.

교회사만이 아니라, 어느 분야의 공부에서도 엔진과 운전대는 함께 필요한 것이다. 다만 선후관계를 가린다면 엔진이 먼저다. 신앙심이든, 애국심이든, 인류애든,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어떤 가치가 마음 속에 동력을 일으켜야 정신이 움직일 수 있다. 그 움직임이 소비와 파괴를 향한 것이 될지, 생산과 건설을 향한 것이 될지 방향을 잡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이런 정도 균형 잡힌 생각이 자리 잡은 것은 40대에 접어들 무렵이다. 그전에는 이성적 비판 정신에 치우쳤다. 내가 원래 머리 쓰는 재간이 뛰어난 편이라서 그쪽으로 치우치기도 했지만,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못대가리로 보인다!) 이제 돌아보면 근대학문의 풍조가 부추긴 면이 있다. 이성을 절대시하는 환원주의 풍조가 있고, 또 학문의 직업화에 따라 경쟁이 일상화된 문제가 있다.

권위(權威), 즉 전(全) 인격적 신뢰를 통해 스승과 제자가 맺어지던 것은 공자와 소크라테스 이래 학문의 전통이다. 그런데 권위란 개념이 부정되는 근대세계에서는 권위에 입각한 사제관계가 예외적 현상이 되었다. 나 자신이 30대에 교수로 있으면서 학문의 길에 들어서는 몇 사람을 '지도교수'라는 이름으로 도와줄 때 기능적 도움에 그치려 애썼다. 근년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는 후배들이 더러 있어도 '동료'로 여길 뿐이다. 내 생각에 취할 점이 있으면 취하더라도 전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몇 달 동안 십여 차례 이메일만 주고받고 면접도 보지 않은 채 조마우로 군을 '제자'로 삼을 마음이 든 것은 무엇 때문일까? 신영복 선생에 대한 생각이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프레시안

신 선생을 생전에 만나본 것은 돌아가시기 이태 전 한 차례뿐이다. 2000년경 차 한 잔 함께 한 일이 있지만 별 의미가 없고, 2014년 5월 어느 날의 만남이 그에 대한 내 마음을 바꿔놓았다.


유시민 선생을 찾아갔다가 점심 후 커피 마시러 출판사 '돌베개'가 운영하는 카페에 갔을 때였다. 어느 신사 분을 모시고 앉아 있는 한철희 사장과 마주쳐 인사를 나누고 옆 테이블에 앉았는데, 유 선생은 신사 분과도 아는 사이인 듯 그 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곧 건너오려니 기다리고 있었는데, 잠시 후 유 선생이 내게 건너오라고 부른다. 그리고는 신사 분께 인사를 시키며 "신영복 선생님과 면식이 없으셨던가요?" 한다. 그래서 커피 한 잔을 함께 하게 되었다. 담소를 나누던 중 묘하게 마음에 걸리는 신 선생의 한 마디가 있었다. "우리 집사람이 김 선생 글을 무척 좋아합니다." 이게 뭐야? 부인만 좋아하고 당신은 안 좋아한다는 거야?

그리고는 다시 마주치는 일 없이 지내다가 타계 소식에 접했다. 애도하는 마음이 일어나도 문상하러 몸을 움직이는 일이 좀체 없는데, 박인규 프레시안 이사장이 내게 찾아왔다가 공교롭게도 신 선생 빈소를 가는 길이라고 하기에 함께 갈 마음이 일어났다.

영정 앞에 꽃을 올리고 우향우를 해 유족들 앞으로 나아가는데, 미망인이 아드님에게 일러주는 나직한 말씀이 들렸다. "역사학자 김기협 선생님이시다." 빈소를 나오면서 2년 전 신 선생 말씀이 생각났다. 부인이 내 글을 무척 좋아한다고 하더니, 빈 말씀이 아니었구나. 면식 없는 사람 알아보는 걸 보면. 지난주 출국을 앞두고 부인을 3년 만에 만나 점심 대접을 받았는데, <아흔 개의 봄>(서해문집 펴냄)을 읽으며 감동받았다는 말씀을 한참 들었다.

신 선생이 초면의 사람에게 인사치레로 건네는 한 마디조차 빈 말씀 못 하는 분이었음을 깨달으며, 그분 글을 다시 읽어볼 마음이 들었다. 전에는 취향에 공감하면서도 주관과 비약 때문에 편안히 받아들이기 힘든 대목이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빈 말씀을 못 하는 분이라면, 글을 쓰는 데도 스스로 믿음이 없는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늘어놓는 일은 없었으리라고 믿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렇게 신 선생 글을 다시 보기 시작할 무렵은 마침 퇴각로를 인식하며, '공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비판'의 글 읽기에서 '신뢰'의 글 읽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석연치 않은 대목일수록 더욱 곱씹어 읽는 자세. 그렇게 한참 읽다가 번역 생각이 떠올랐다. 옛날 학인(學人)들은 주석(註釋) 작업을 통해 '깊이 읽기'를 했는데, 오늘의 학인에게는 번역이 그런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마침 신 선생 가르침을 받드는 사람들의 모임인 '더불어숲'에서 매주 글귀를 하나씩 뽑아 보내는 소식지('샘터찬물')에 눈길이 갔다. 함축성이 큰 짤막한 글귀를 영어로 옮겨 보니, 지금까지 해온 번역과는 다른 영역으로 들어서는 느낌이 들어 2년째 하고 있다. 반년쯤 혼자 하다가 '더불어숲' 운영자들에게 보여주었더니, 무척 반가워하며 소식지에 내 번역도 함께 실어 보내기 시작했다.

번역의 자세가 바로 스승을 모시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라도 필자의 뜻을 힘들여 파악해서 독자에게 전하는 것이 역자의 역할이니까. 매주 한 차례 신 선생 글을 번역하는 몇 시간은 마음의 균형을 잡는 시간이기도 하다. 내 생각에만 묶여 있지 않고 다른 이와 공유하는 생각에 몰두한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이렇게 균형을 잡는 노력이 원래 사제관계의 중요한 측면일 수도 있겠다.

'보네거트 컬렉션'을 넘겨받고 싶다는 조마우로 군의 메일을 받고 관련 이야기를 나누다가 신 선생의 글귀를 함께 번역하자고 권하게 되었다. 속으로는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사제관계라는 이름을 붙이기가 부담스러워서 '함께하자'고 한 것이다. 그렇게 몇 주일 동안 함께하다가 깨놓고 사제관계를 내걸어도 괜찮겠다는 마음이 든 것은 신 선생과 나 사이의 관계가 투영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신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는 작업이니, 그 연장선 위에서 조 군과 관계도 형성되기를 바랄 수 있는 것이다.

▲ '더불어숲' 소식지 '샘터찬물' 120번 째 편지(왼쪽)와 121번 째 편지(오른쪽). ⓒ프레시안

3월 15일 자 '샘터찬물 121번 째 편지'부터 번역자 표시를 'tr. by Orun Kim'에서 'tr. by Orun Kim & Mauro Cho'으로 바꿨다. 조 군이 작성한 번역 초안을 내가 몇 군데 고쳐 편집자에게 보낸 다음 조 군에게 보낸 메일을 아래 붙이니, 이 사제관계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한 번 살펴보시기를.

"조마우로 군에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부분, 이렇게 바꿔서 보냅니다. 불만 있으면 역모를 하세요. 기협."

Keeping power, with one single word

The No-ron faction, which dominated the latter part of the Chosun Dynasty, didn’t have to rely on fancy devices. A mere mention of the word 'treason!' would silence the most fervent reformist. Its role is taken over nowadays by another word, "pro-North". In a society long trapped in dogmatism, not many can dare to talk back, once called out as pro-North. It stops all discussion. What is "pro-North"? Is it a bad thing? What do the commies have to say? What kind of society do they call for? Such discussions have no place to be. Just one word, and period. It is like a magic spell, which keeps those in power unchallengeable.

조선 시대에도 노론 지배 권력이 정치를 딱 한 개 아이템으로 해요. '역, 모!' 역모라고 하면 상당히 비판적인 개혁 사림들도 잠잠해져요. 지금 우리에게 '종북'이 그런 거죠. 대단히 교조적인 사회의 연장선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북'이라고 하면 바로 조용해져요. 더 이상 논의가 진전이 안 돼요. 종북이 뭔지, 뭐가 나쁜지, 빨갱이가 대체 뭘 주장하는지, 그들이 주장하는 사회가 뭔지, 그런 논의가 절대 없거든요. 그냥 한마디로 끝이에요. 더 이상의 논의를 완벽하게 차단하는 아주 마법 같은 정치 용어가 역모, 종북, 이런 거거든요.

- <손잡고 더불어>(신영복 지음, 돌베개 펴냄) 중

조 군은 답장에 이렇게 썼다.

"좋은 대안이 없어 역모는 꾸미지 못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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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40세 나이에 교수직을 그만둔 후 20여 년간 독학으로 문명교섭사를 공부해 온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 입학 뒤 사학과로 전과한 독특한 이력이 있다. 프레시안 장기 연재를 바탕으로 <해방일기>, <뉴라이트 비판>, <페리스코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등의 책을 썼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와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부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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