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조직 노동자들도 '작은 공' 쏘아올리자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경사노위가 쏜 '고무공', 어디로 튈지 모른다

탄력적 근로시간제. 인간의 몸은 고무공이 아닌데 노동시간을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는 제도이다. 어쩔 때는 철야근무를 시켰다가 어쩔 때는 단축근무를 시킬 수도 있다. 연장노동에 대한 초과수당 지급의무도 없다. 자본가들 입장에선 천국과 같은 제도이며, 노동자들 입장에선 노예제도를 연상시키는 제도이다.

권한 없는 자들의 합의

지난 2월 19일, 경사노위 일부 관계자들이 탄력근로제 관련 모종의 합의를 했다. 이건 좀 정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일부 관계자들의 합의'이지 노사정 합의가 아니다. 경사노위 내에서 탄력근로제와 관련한 논의 책임을 맡은 곳은 '노동시간 제도개선위'라는 의제별 위원회이다.

그런데 2월 19일에 합의한 주체들을 보자. △노동시간제도개선위원장 이철수 △한국노총 사무총장 이성경 △한국경총 상근부회장 김용근 △고용노동부 차관 임서정 △경사노위 상임위원 박태주. 이렇게 5명인데 이 중에서 이철수, 김용근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은 노동시간제도개선위원이 아니다.

이철수 위원장을 제외한 나머지 4명은 모두 각 조직의 '바이스(vice)'급(부대표급)으로 경사노위 운영위원 자격을 갖고 있긴 하다. 하지만 이 자격은 글자 그대로 경사노위의 운영 관련 논의를 하는 위치이지 모종의 노사정 합의를 할 권능을 가진 기구가 아니다. 게다가 이철수 위원장은 운영위원이 아니며, 운영위원 중 대한상의와 기획재정부는 합의 주체에서 빠졌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는 과거 노사정위원회 이름을 단순히 경사노위로 바꾸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취약노동계층과 소상공인 대표성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청년·여성·비정규직 대표와 중소기업·소상공인 대표를 위원으로 추가했다. 노동계는 양 노총만으로도 대표성이 충분하다고 주장해 왔지만 문재인 정부가 끝까지 고집했던 사안이다.

물론 각각의 부문을 대표한다며 선임된 위원들이 과연 해당 부문을 대표하는가 하는 점은 의문이다. 하지만 정부가 고집해서 새롭게 경사노위에 참여한 위원과 부문들은 아예 저 논의에 끼워주지도 않았다. 당연히 저런 합의를 한다는 사실도 전해 들은 바 없고, 일부 위원들은 합의 내용에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동시간 제도개선위에 한국노총 추천으로 참여한 공익위원은 저 합의에 대해 명시적으로 반대한다는 문서를 제출했고, 심지어 공개적으로 페이스북에 그 내용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대체 저 5명은 무슨 권한을 갖고 '노사정 합의'라는 문서에 도장을 찍었을까? 저들은 노동시간 제도개선위를 대표하지도, 경사노위 운영위원을 대표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그런데 경사노위 홈페이지(http://www.eslc.go.kr)를 방문해보면 팝업창으로 '경사노위 공식 출범 이후 사회적 대화 첫 합의'라는 문구가 뜨며 2.19 합의를 홍보하고 있다. 팝업창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합의서에 서명한 5인과 일치하는 인물은 경사노위 박태주 상임위원밖에 없다.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문재인 정부의 사회적 대화는 이런 식의 주먹구구였단 말인가?

▲ 탄력근로제를 합의한 주체들. ⓒ경사노위

임금보전을 보완했다는 새빨간 거짓말

그 권한 없는 경사노위 일부 관계자들의 2.19 합의에 따르면, 탄력근로제 기간을 기존 3개월에서 6개월로 확대한다고 한다. 노동시간 고무줄의 크기를 2배로 늘려놓은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극한직업은 없었다. 이것은 고무줄인가, 고래 심줄인가?" 현장 노동자들은 지금까지 버텨왔던 탄성계수의 2배까지 견뎌내는 '극한직업'을 체험하게 생겼다.

권한 없는 자들이 노동자들 등골 뽑아먹는 합의를 한 게 부끄러웠는지, 기간을 확대하는 대신 노동자 건강권과 임금보전 문제를 보강했다고 주장한다. 진짜로 그러한지, 도대체 뭘 합의했기에 저런 얘길 하는 건지 한번 살펴보자. 현행 탄력적 근로시간제 내용과 경사노위 일부 관계자들의 2.19 합의 내용을 아래 표로 비교해 보았다.


2.19 합의 내용에서 건강권과 임금보전 관련 보강된 내용은 크게 2가지이다. 하나는 근로일 간 11시간 연속휴식시간 의무화를 원칙으로 한 것, 나머지 하나는 사업주가 임금보전 방안을 노동부 장관에게 신고하도록 하고 만일 신고하지 않을 경우 과태료를 부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임금보전 문제는 이미 기존 법령에도 명시된 사항이다. 즉, 탄력근로제 시행이 되더라도 기존 임금수준이 저하되지 않도록 보전 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현행 근로기준법이 사용자에게 의무로 부여한 사항이다. 시행령에 따르면 노동부 장관이 사용자에게 그 보전 방안을 제출하도록 명령할 수도 있다.

과태료 수십~수백억도 꿈쩍 않는 자본가들

그럼 대체 뭘 보완했다는 말일까? 임금보전 방안 신고를 의무로 전환하고, 신고하지 않은 경우에 과태료를 부과하는 것? 임금보전 방안 신고를 의무로 전환한 점은 현행 근로기준법 시행령만 활용하면 기존 제도 하에서도 가능한 얘기다. 탄력근로제 시행하는 모든 사업주들에게 노동부 장관이 보전 방안을 제출하도록 명령하면 되는 일이니까 말이다.

신고를 안 하면 과태료를 부과한 게 실효성이 있을까? 이건 이미 불법파견 문제에서 전혀 실효성이 없다는 사실이 입증된 문제이다. 과거 노무현 정권 시절 민주당(열린우리당) 세력은 불법파견에 대한 고용의제를 고용의무로 바꾸면서 이를 위반할 경우 최대 3000만 원의 과태료를 물리면 자본가들이 직접고용에 나설 것이라며 파견법 개악을 밀어붙인 바 있다.

그 뒤에 10년 동안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집권하느라 민주당 세력이 자기 정책을 펼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고 치자. 그럼 문재인 정부 집권 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 불법파견으로 판정 난 사업장에 직접고용 시정지시를 내리고,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수십억 많게는 수백억까지 과태료 처분을 했다. 하지만 그 뒤에 뭐가 달라진 게 있는가?


문재인 정부 집권 후 불법파견 판정, 직접고용 시정지시,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과태료 부과한 사건 3개를 위와 같이 표로 정리해 보았다. 17억, 77억, 162억 등 꽤 고액의 과태료 처분을 하였으나 3개 사건 당사자인 사용자들은 단 한 푼의 과태료도 납부하지 않았다. 그저 정부의 행정명령에 불복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 되니까 말이다.

그 결과 파리바게뜨는 직접고용이 아니라 자회사를 만들어 불법파견 노동자를 고용하는 변칙으로 나아갔고, 아사히글라스와 한국GM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직접고용이 아니라 오히려 집단해고를 당한 상태이다. 즉, 단 한 건도 직접고용이라는 정부 시정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태료를 매기면 사용자들이 이를 시정할 거라고 순진하게 믿는단 말인가?

마약 흡입량 제한이 건강권 보장?

경사노위 일부 관계자들은 '근로일 간 11시간 연속휴식시간을 의무화' 한 것을 두고 노동자 건강권을 확보한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도입하지 않았다면 굳이 필요치 않은 조항이다. 탄력적 근로시간제가 도입되면서 노동자들의 연속휴식시간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던 것 아닌가.

"마약을 원하는 국민들이 워낙 많으니 다는 아니더라도 코카인까지는 합법화하도록 하자. 대신 국민 건강권이 침해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으니 1회 흡입량은 5㎎을 초과할 수 없도록 규제하자."

애초에 마약을 합법화하지 않으면 될 일인데, 흡입량을 제한하면 건강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궤변과도 같다.

탄력적 근로시간제가 무엇이던가. 애초 이름은 '변형 근로시간제'였다. 철도·지하철 등에서 인원을 늘리지 않고 심야시간 노동을 시키려다 보니 노동시간을 들쭉날쭉하도록 만든 제도이다. 이 제도가 합법화된 것은 김영삼 정권 시절 노동법 날치기 사건이었다. 민주노총이 '96~97 총파업'으로 맞섰던 바로 그 날치기 말이다.

근로자대표라는 유령과 합의만 하면 모든 게 면죄부

"일부 노동계는 6개월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도입 요건으로 합의된 '근로자대표'의 서면합의를 문제 삼고 있다. 즉 선출 요건 등이 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용자의 뜻대로 근로자대표가 선출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는 노동법 학계가 오랫동안 지적한 근로자대표제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근로자대표 사안은 탄력적 근로시간제에 국한된 쟁점이 아니므로,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등에서 별도 논의를 거쳐 개선책을 만드는 게 바람직하다." (<한국일보> 3월 4일 자 도재형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칼럼)

설마 실체와 현실을 몰라서 저런 얘기를 하는 걸까? 이번 탄력근로제 합의 곳곳에서 등장하는 '근로자대표와의 합의'는 어마어마한 독소조항이다. 근로자대표와 합의만 있으면 △근로일 간 11시간 연속휴식시간을 보장하지 않아도 되고 △임금보전 방안을 노동부 장관에게 신고하지 않아도 되며 △2주 전까지 근로일별 노동시간을 사전 통보하지 않아도 된다.

도재형 교수가 얘기하듯 이놈의 '근로자대표제'는 "노동법 학계가 오랫동안 지적한 문제점"이다. 한마디로 '유령'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선출해야 하는지, 어떤 자격을 갖춰야 하는지, 임기는 어떻게 되는지 노동관계법에 단 한마디도 규정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사용자 맘대로 어용 근로자대표 한 명만 선임해두면 도깨비 방망이처럼 써먹을 수 있는 거다.

학자적 양심이 있다면 그런 수많은 문제투성이 제도를 면죄부로 사용하도록 열어준 2.19 합의, 자본가 맘대로 도깨비 방망이처럼 써먹을 수 있도록 곳곳에 독소조항을 심어놓은 이번 합의를 통렬히 비판함이 마땅하다. “노동법 학계가 오랫동안 지적한 문제점”을 저렇게 악용한 합의에 어떻게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단 말인가.

경사노위에서 별도 논의를 거쳐 개선책을 만드는 게 바람직하다고? 실업자·해고자 등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도록 한다는 것이 1998년 노사정위원회 합의사항이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는 이 합의를 배신하고 있으며 전교조 문제조차 해결하지 않고 있다. ILO 핵심협약에 보장된 권리인데 말이다.

그런 자들에게 개선책 제시를 기대하느니 차라리 수퇘지가 애를 배는 걸 기다리는 게 빠를 것이다. 취약 노동계층까지 대변하겠다며 법까지 개정해가며 위원회 구성을 바꿔놓고, 첫 번째 합의라고 치장한 일부 관계자들의 2.19 합의에서 노조를 갖지 못한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폭탄을 던진 자들 아닌가.

미조직 노동자들이 쏘아야 할 작은 공

1970년대 조세희 작가가 묘사한 '난쟁이'는 시대적 불구를 의미했다면, 그가 쏜 '작은 공'은 불구화된 시대 속에서도 민중들이 가진 희망을 뜻하는 단어였다. 그런데 취약노동계층까지 대변하겠다며 새롭게 출범한 경사노위는, 노동시간을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였다 하는 제도를 더 고무줄처럼 늘린 고무공을 쏘아 올렸다.

하지만 럭비공도 고무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경사노위가 쏘아놓은 고무공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노동자들을 '극한직업'으로 밀어 넣을 것임이 틀림없지만, 그 노동자들이 언제까지고 침묵하고 가만히 앉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오판이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듯 이번 경사노위 일부 관계자들의 합의는 밑바닥 노동자들을 꿈틀거리게 할 것이다. 경사노위가 고무공을 쏜다면, 미조직 노동자들도 '작은 공'을 준비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경사노위는 탄력근로제에 이어 ILO 협약 비준이라는 미명 아래 △대체근로 전면 허용 △부당노동행위 형사처벌 삭제 △사업장 내 점거 및 쟁의행위 일체 금지라는, ILO 협약에 정면으로 위배하는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두 번째, 세 번째 고무공을 쏘아 올릴 태세이다. 그 럭비공이 어디로 튈지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미조직 노동자들의 '작은 공'에도 강한 탄성을 제공해줄 것이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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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입니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글을 써 오고 있습니다. 주로 자동차산업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뤘습니다. 지금은 [인사이드경제]로 정부 통계와 기업 회계자료의 숨은 디테일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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