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준할 것인가 제소당할 것인가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ILO 협약 장애물 걷어내고 즉각 비준해야

지난 글에서 문재인 정부가 탄력근로제와 ILO 협약 비준 문제를 어떻게 다루려 하는지에 대해 다뤄보았다. 정부는 두 사안을 서로 맞교환하는 '빅 딜'을 하려는 게 아니다. 두 사안 각각에서 노사 간에 주고받는 '거래'를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거래의 최종 대차대조표를 보면 황당한 상황이 된다. 노동계가 얻는 것은 ILO 87호, 98호 협약 비준에 대한 '약속' 뿐이다. 대신 자본가들이 얻어가는 것은 탄력근로제 기간 확대와 함께 도입절차 간소화를 얻어가게 된다.

어디 그뿐인가.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에 사업장 점거 금지 등 그동안 자본가들이 원했던 민주노조 무력화 수단을 모두 얻게 된다. 정부는 여기에다 최저임금 결정구조 개악이라는 카드까지 내놓았다. 과연 이런 것도 '대화'나 '거래'라고 할 수 있을까?

ILO 협약, 준비만 하다가 날 새겠다

만약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자신의 공약인 △반값 등록금 △기초연금 인상 등의 의제를 사회적 대화틀로 보내버렸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당장 수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공약사항을 그냥 이행하면 되지 이걸 어떻게 비틀려고 협상장에 보내나? 공약 이행을 하지 않으려는 꼼수”라며 들고 일어섰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에게도 그 동일한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 ILO 협약 비준은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 사항이었음에도 이를 경사노위라는 사회적 대화틀에 넣어버렸으니 말이다. 사회적 대화과정에서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공약을 이행하지 못한 책임을 죄다 노·사 및 공익위원들에게 돌려버리면 그만이다.

"ILO 협약 비준을 위해 경사노위에서 협의 중에 있고요. 경사노위 협의가 끝나면 국회에서도 입법이 되어야 합니다. 국회도 입법을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어쨌든 정부로선 ILO 협약을 조속한 시일 내에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말씀 드리고요."

지난 1월 10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ILO 협약 비준과 관련한 기자의 질문에 문재인 대통령이 답변한 내용이다. 공약사항을 왜 ‘협의’에 붙인다니 이럴 거면 뭐하러 공약에 내걸었단 말인가? 게다가 경사노위 협의가 끝나면 국회라는 장애물을 하나 더 넘어야 한단다. 경사노위 협의와 국회 입법, 그 다음에 ILO 협약 비준의 차례가 온다는 말이다.

그럼 도대체 ILO 협약의 비준은 언제 한다는 말인가? "조속한 시일 내에"라는 모호한 답변만 있을 뿐이다. 이건 뭐 생일날 잘 먹자는 말보다 미덥지가 못하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시간을 되돌려 2017년 5월 대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위에 인용한 문재인 대통령의 언급과는 사뭇 다른 내용을 확인하게 된다.

공약과 180도 달라진 ILO 협약 비준 순서

대통령선거 공약집에는 정부가 비준할 핵심협약 4개의 이름은 물론이고 협약이 만들어진 연도, 현재 비준 국가 수에 대한 세부적인 정보까지 담고 있다. 이렇게 4개 핵심협약을 비준한 뒤 "협약 비준에 따른 국내법 개정"을 하겠다는 것이 공약 내용이다. 아니, 이건 완전히 다른 얘기 아닌가! ILO 협약 비준부터 하고 입법절차를 거치겠다는 약속이니 말이다. (아래 그림)


사실을 말하자면 공약에 제시된 절차가 옳다.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한국의 경우 ILO 협약과 같은 국제협약에 대한 비준 권한은 대통령에게 있다. 고용노동부가 외교부에 협약 비준을 의뢰하면 법제처 검토 후 대통령은 차관회의 또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협약을 비준하면 된다. 이에 따라 ILO에 비준서를 기탁하면 된다.

비준서를 기탁하면 곧바로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1년 뒤에 효력을 갖게 된다. 국내법과 충돌하는 내용이 있다면 1년 사이에 뜯어고치면 된다. 이러한 과정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지에 대해 ILO는 경험 많은 전문가들 상당수를 보유하고 있다. 이미 여러 나라에서 먼저 ILO 협약을 비준한 후 국내법과의 충돌을 해소하는 과정을 밟은 바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ILO 핵심협약 비준을 약속한 점이 매우 고무적이다. 우리는 필요한 모든 기술적 지원을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다."

2017년 9월 한국을 방문해 문재인 대통령을 면담한 직후 ILO 가이 라이더 사무총장이 트윗에 공개한 내용이다.(아래 사진) 여기서 말하는 ‘기술적 지원’이란 ILO 협약 비준으로 발생할 국내법과의 충돌을 해소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협약 비준까지 겹겹이 장애물 쌓을 건가

대통령 후보 시절 공약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퇴색하기 시작했다. 먼저 ILO 협약 비준부터 하고 입법을 차근차근 해나간다는 로드맵은 어느새 잊혀졌다. 갑자기 경사노위 출범을 서두르더니 은근슬쩍 "노사정 사회적 합의를 통해 ILO 협약 비준"이라는 말로 바뀌게 된다. 앞서 얘기했지만 공약사항을 사회적 대화틀에 넣겠다는 것은 사실상 공약 파기나 다름없다.

경사노위에서 ILO 협약 비준을 사실상 반대하고 있는 경총의 합의까지 이뤄내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사용자들이 원하는 각종 노동악법과 거래를 해야 한다. 그런데 사용자들이 원하는 바로 그 사항들이 모조리 ILO 결사의 자유 협약에 반하는 것들이다. ILO 협약 비준을 합의하기 위해 ILO 협약을 무력화시키는 입법에 합의하라니 이게 무슨 날강도 짓이란 말인가.

그뿐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경사노위 논의 뒤 국회 입법절차까지 거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입법안을 만드는 정부가 자본의 로비를 받은 경제부처 입김을 받아 한 차례 비틀고, 국회에 가면 야당 반대로 또다시 왜곡된다. ‘김용균법’이라 이름 붙여진 정부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어떻게 누더기가 되어 갔는지 떠올려보자.

작년 2월 9일에 입법예고 되었던 이 법은, 무려 8개월간 의견수렴이라는 미명 아래 경총은 물론이고 건설업계·석유업계·화학업계·프랜차이즈업계 등의 로비, 그리고 이들의 로비를 받은 각종 경제부처의 반대 의견으로 이미 누더기가 된 채로 11월 1일 국회에 제출되었다. 국회 제출 뒤에는 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의 반대로 개정 취지가 더 왜곡되고 만다. (아래 표)


한정애 입법안 = 오히려 ILO에 제소될 내용

이런 일이 ILO 협약 비준을 위한 입법 과정에서도 되풀이될 것이다. 아니, 이미 시작되었다. 놀랍게도 이른바 ‘김용균법’이 누더기가 된 채로 국회를 통과한(12월 27일) 바로 다음날인 12월 28일, 국회 환경노동위 더불어민주당 간사인 한정애 의원이 노동조합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하게 된다.

한정애 입법안 제출 이유를 보면 "2018년 11월 20일 발표된 (경사노위) 공익위원안을 토대로, 현행법을 (ILO) 결사의 자유 협약에 부합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적시되어 있다. 이런 법안을 발의할 거면 경사노위 논의를 거치던지, 아니면 최소한 양 노총에는 미리 알려주지 않았을까? 놀랍게도 그런 절차도 거치지 않았다. 민주노총·한국노총에 전혀 알려주지도 않은 것이다.

내용을 읽어보면 더 심각하다. 핵심적으로는 기업별노조처럼 사업장을 대상으로 설립된 노동조합의 경우, 해고자·실업자·퇴직자처럼 해당 사업장에 종사하지 않는 조합원의 경우 조합활동은 사용자의 재량 하에 이뤄져야 하고 심지어 이들은 자신의 노동조합에서 임원 또는 대의원으로 선출될 자격을 박탈한다는 것이다.

ILO 제87호 협약 제2조에 따르면 노동자 및 사용자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단체를 설립하고 그 단체에 가입할 권리를 어떠한 차별도 없이 가져야 한다. 같은 협약 제3호에서는 “근로자단체 및 사용자단체는 그들의 규약과 규칙을 작성하고, 완전히 자유롭게 대표자를 선출하며, 관리 및 활동을 조직하고, 계획을 수립할 권리를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권리에 대해 공공기관은 어떠한 간섭도 해선 안 된다. 그런데 한정애 입법안은 이런 협약들과 정면으로 충돌되는 내용을 버젓이 입법안으로 만들어온 것이다. 노동조합 규약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제한도 할 수 없는 대의원·임원 피선거권을 제한해버린 것이다. 그러고도 법안 발의 취지에 ILO 결사의 자유 협약에 부합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적어놓은 것이다.


시행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목적·시기·장소·인원 등을 사용자에게 통보한 뒤 허락을 받아서 사업장 내 조합활동을 하라니? 군사독재 시절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의 부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문재인 정부가 ILO 협약을 비준할 의지가 있는가 하는 점이 아니라, ILO 협약 비준이라는 미명 아래 오히려 법을 개악시키는 계기로 삼으려는 게 아닐까 의심을 품기에 충분하다.

신년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 "국회도 입법을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이 바로 이런 것이었던가? ILO 협약에 걸맞게 국내법을 정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ILO 결사의 자유를 침해하는 입법을 하는 것?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권한을 적극 활용해 ILO 협약을 비준하는 주체가 될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결사의 자유를 부정하는 노동후진국으로서 ILO에 제소당하는 처지가 될 것인가. 그것은 오로지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의 의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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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입니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글을 써 오고 있습니다. 주로 자동차산업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뤘습니다. 지금은 [인사이드경제]로 정부 통계와 기업 회계자료의 숨은 디테일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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