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역사'를 위하여

[프레시안 books] <시시한 역사, 아버지> 우일문

역사학을 전공하면서도 큰 흐름 살피기만 좋아해서 과학문명사 방면을 공부하던 내가 뒤늦게 한국 현대사에 관심을 갖고 '지금 여기' 사람들 모습을 파고들게 된 계기는 아버지가 만들어준 것이다. 철들기 전에 돌아가신 그분의 일기를 어머니께 넘겨받은 것이 38살 때였고, 그 일기를 통해 아버지의 실제 모습을 그리다 보니 그분이 처해 있던 시대상을 살펴보게 되었다. (이 일기는 <역사 앞에서>(창비 펴냄) 제목으로 1993년 출판되었고, 그때 빠트렸던 내용을 마저 넣은 새 판이 지난 6월 발행되었다. 유족 입장에서 최종판이다.)

우리 앞 세대가 살았던 시대는 우리가 산 시대와 이어진 것이면서도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온 시대와 다음 세대가 살아갈 시대 사이에도 그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갈수록 심각한 문제가 되어가고 있는 세대 간 갈등은 세대에 따른 환경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 큰 원인이 있다.

사회 전체를 놓고 세대 간 갈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가족 안의 개인 관계에서 이 갈등의 폐단이 더 심각한 측면이 있음을 나는 중년기 이후 아버지의 모습을 찾는 과정에서 절실하게 깨달았다. 아버지의 모습을 더 일찍 파악하고 있었다면 소년기와 청년기에 세상을 대하는 내 태도가 더 떳떳했을 것이라는 회한을 느끼곤 했다. 일찍 돌아가신 분에 관한 생각만이 아니다. 살아계신 어머니의 모습도 그분들 세대의 시대 환경을 이해함에 따라 새로 파악된 측면이 크다.(어머니의 말년을 모시며, 그분 모습을 되찾는 과정을 적은 글은 <아흔 개의 봄>(서해문집 펴냄)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 <시시한 역사, 아버지>(우일문 지음, 유리창 펴냄). ⓒ유리창
<시시한 역사, 아버지>(유리창 펴냄)를 쓴 우일문 선생은 10여 년 가까이 지내면서 내가 겪은 곡절을 보아 온 사람이다. 이 책을 내기까지 자기 아버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새로운 모습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내 경험도 다소 참고가 되었으리라고 짐작한다.(원고를 보여주는 지금까지 그런 말은 한마디도 없지만….) 그래서 제목의 '시시한'이란 말이 괜히 마음에 걸리기도 한다. 내 부모님은 교수직을 지냈고 상당한 사회적 존경을 받은 분들인 반면, 우 선생은 고졸 학력으로 은행원을 꿈꾸다가 농사꾼으로 세상을 마치신 아버님을 존경보다는 (그것도 없지는 않지만) 사랑과 연민의 대상으로 그린 것이다.

우 선생이나 나나 부모님의 모습을 밝힘으로써 그분들에 대한 이해를 더 깊이 하고 그분들의 가르침을 더 잘 받들려고 애써 온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그분들이 겪은 시대상을 밝히는 데는 역사학자인 나보다 출판인이자 문필가인 우 선생의 실적이 더 윗길이다. '시시한' 역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내 부모님은 세상에 내놓고 싶은 메시지를 잔뜩 가진 '잘난' 분들이었다. 아들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메시지가 잘 드러나도록 닦아서 좋은 자리에 올려놓는 것뿐이었다. 반면, 우 선생 아버님은 크지 않은 경륜조차 초년에 좌절되고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생을 산 '시시한' 분이었다. 사회는커녕 아들에게조차 자기 가치관을 강하게 내세우지 못한 분이었다. 우 선생은 아버님이 설명해주지 않은, 그 삶의 '보이지 않는' 가치까지 새로 그려내야 한다.

우리 사회에 '기록 문화'가 취약하다는 말을 많이들 한다. 세대 간 갈등이 쉽게 일어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들이 어떤 상황을 겪으며 어떤 고민 끝에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적어놓는 것이 다른 문명사회에 비해 훨씬 적으니 뒤 세대 사람들이 앞 세대 사람들의 태도를 이해하기가 그만큼 더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기록문화가 취약한 까닭이 무엇일까? 시대 환경에 무엇보다 큰 까닭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 일기를 정서한 후 서중석 선생에게 제일 먼저 보인 것은 현대사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읽어본 서 선생이 소중한 기록이라며 그것을 남긴 아버지와 그것을 지켜서 전해준 어머니께 경의를 표했다. 그 말씀을 듣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지 않고 대한민국에서 계속 활동하셨다면 어느 시점에서 저 일기를 손수 없애셨을 수도 있지 않을까? 반공독재 상황에서 무슨 일로 압수-수색이라도 당한다면, 본인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지 않을까 걱정하셨을 것이다. 그분이 안 계시니까 어머니가 사람 지키는 대신 그 글을 지키신 것이다. 내게 보여주고 넘겨주신 것이 1987년 말의 일이었다.

한국 현대사를 살펴보면서 시대 환경이 사람들의 태도에 끼친 영향을 더 넓게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들을 비굴하게 만든 것이다. 권력이 사람을 비굴하게 만드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도 사회가 건강할 때는 떳떳한 자세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꽤 많다. 구한말에 조선을 방문한 인류학자 비숍 여사가 국내를 둘러본 후 연해주를 여행하며 그곳의 이주민 사회를 보고 같은 민족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당당한 사람들의 모습을 놀라워한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다.

이 나라 보통사람들은 20세기 내내 보통 넘게 폭압적인 국가권력에 눌려 지냈다. 고상한 품성을 지닌 사람일수록 자신의 삶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이었다. 스스로 돌아보는 성향의 사람들에게도 일기 쓰기가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고, 한편으로는 주접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정직한 기록은 많이 나올 수 없었고, 나온 기록은 대개 이를 악물고 적은 것이다. 사람 사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평상심은 아주 귀한 것이었다.

우 선생 아버님도 기록을 생산하지 않았다. 아들이 돌연변이가 아니라면 아버님도 글쓰기를 썩 좋아하고 잘하셨을 텐데. 이제 아들이 적어놓은 것을 보면 글쓰기 대신 글씨쓰기만 열심히 하셨다. 총 한 번 쥐어보지 못한 의용군 노릇 때문에 어려서부터 지향해 오던 넓은 세상을 포기하고 시골구석에서 크지도 않은 집안을 지키며 일생을 보낸 분이다.

그분은 생존을 위해, 그리고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를 위해 꼭 드러내야 하는 것을 넘어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 한 분이다. 장남인 우 선생에게조차 생활 속에 나타나는 모습을 넘어 "내가 이런 사람이야" 하는 설명을 시도하지 않은 분이다. "이렇게 살아라" 말씀은 못 하시고 고작 "저렇게는 살지 말아라" 정도 말씀밖에 못 하셨을 것 같다. 돌아가실 날을 받아둔 시점에서 행장 마련해 드리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이 이 책이 나오기까지 작업의 출발점이었다. 책 끝에 붙인 행장. 그 간략한 기록 중에도 우 선생이 그때야 알게 된 사실이 많이 들어 있다. 그 사실들의 의미를 그 후 8년 동안 새기고 되새긴 생각들을 다듬어낸 것이 이 책이다.

아버님 일생의 모든 부분에서 캐낸 편린(片鱗)들이 담겨 있지만, 초점은 그분이 20대 청년기를 지낸 1950년대에 놓여 있다. 그리고 우 선생 자신이 20대를 지낸 1980년대 상황이 그에 대비되어 있다. 이 책은 문학성의 기준으로도 평가를 받겠지만, 역사학도의 눈에는 참신하고 탁월한 관점 설정으로 보인다. 조지 이거스의 <20세기 사학사>(임상우·김기봉 옮김, 푸른역사 펴냄) 한 대목(26쪽)이 생각난다.

"최근 수십 년 사이에 점차 많은 수의 역사가들이 역사는 과학보다는 문학과 더욱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이러한 생각은 근대 역사학이 의거했던 전제들 자체에 대한 도전이었다. 역사의 대상이란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 연구에서 객관성이란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 점차로 공감대를 얻었다. 이에 따라 역사가는 항상 그가 사고하고 있는 세계 안에 감금되어 있는 포로이며, 그의 사고와 인식은 그가 작동시키는 언어의 범주들에 의한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고 이해되었다."

'객관성'을 받들어 온 근대역사학의 한계를 말한 대목이다. 기록자가 기록 대상과 절연된 위치에 자신을 가두지 말고 양자 간의 관계를 품고 들어가야 역사의 깊은 의미가 살아난다는 뜻으로 나는 이해한다. 1950년대의 환경이 아버님의 존재 방식을 규정한 과정과 1980년대의 환경이 저자의 의식 방향을 결정한 과정을 나란히 놓고 살펴봄으로써 저자가 말하는 '시시한 역사'가 품은 의미를 알아볼 수 있다.

'시시한 역사'. 참여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시시하게 여기도록 만든 역사다. 이 나라 어버이 중에 자신과 같은 삶을 자식도 살기 바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도적의 마음을 갖지 않은 보통사람에게는 그런 소망 품기가 어려운 세월이 너무 오래되었다. 불의를 못 참아 자신을 희생한 사람은 헤아릴 수 있지만, 말없이 고통을 감수한 사람은 헤아릴 수 없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사고로 피해를 입은 사람에 비해 그런 위험을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엄청나게 많다.

머리말에서 아버님의 생애를 이렇게 요약한다. "국가의 조롱과 멸시에 모욕과 수치를 느꼈지만 두려워서 평생 내색하지 않았다." 그 아들 역시 모욕과 수치를 느꼈고, 아버님에 비해서는 내색을 많이 하며 살았다. 그러나 내색을 해봤자 뾰족한 수도 없었고, 자식들에게 면목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아버지를 닮고 싶지 않았지만 어느새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었다". 국가가 아버님을 내팽개친 사실을 몰라서 그분을 성미 고약한 노인네로만 여기던 저자가 이제 자기 성미 고약한 원인도 함께 깨달으며 연대감을 느끼는 것이다.

폭압에 짓눌린 사회의 구성원끼리는 연대감을 일으키기 어렵다. 다들 나름대로 떳떳지 못한 사정이 있어서 자기 자신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니, 이웃 간에 서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 문제가 어떤 면에서는 가족 간에 특히 심하다. <아흔 개의 봄>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모르는 분들에게 읽어달라고 책으로 내면서 이것 하나만은 꼭 강조하고 싶다. 가까운 사람끼리는 즐거움만이 아니라 괴로움도 함께 나눈다는 사실. 운명이 주는 괴로움은 아끼는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가장 예리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운명에 대한 원망이 아끼는 사람에 대한 원망으로 모습을 바꿔서 나타나기 쉬운 것이다. 어떤 고통 앞에서도 주어진 인연을 등지지 않는 것, 그것이 인간으로서 나 자신을 지키는 길이다."

세대 간 갈등, 지역 갈등을 비롯한 온갖 갈등을 이 사회에서 걷어내기 위해 구성원 간의 상호 이해를 증진할 필요가 절실하고, 그 출발점은 각자의 가정이다. 통계조사를 해보지 않아도 한국사회의 부모 자식 간 이해 수준은 세계 최하위에 속할 것을 확신한다. 이 글 읽는 분들에게 가까운 사람들과 서로 잘 이해하고 이해받도록 애쓸 것을 당부한다. 그를 위해서는 모든 면에서 표현을 늘리는 것이 좋고, 무엇보다 글을 통한 표현이 중요하다. 글로 적어놓는 생각은 두고두고 나눌 수 있으니까.

우 선생이 슬그머니 내놓는 '시시한 역사'에 경의를 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역사를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라고 하는 카의 관점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를 단절시키는 근대정신을 이 말에서 읽기 때문이다. 많은 역사학도들이 이 '명언'에 현혹되었지만, (나도 한때 그랬다) 앞에 인용한 이거스의 말이 지낼수록 더 가까이 느껴진다.

우 선생의 글 속에서 1950년대의 청년 아버지와 1980년대의 청년 아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니다. 끌어안고 하나가 되어 합쳐진 목소리로 60년의 시시한 역사를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속에서 현재를 찾고 현재 속에서 과거를 찾는 이야기꾼의 눈을 통해서는 시시한 인물의 시시한 삶에서도 귀중한 가르침을 캐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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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40세 나이에 교수직을 그만둔 후 20여 년간 독학으로 문명교섭사를 공부해 온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 입학 뒤 사학과로 전과한 독특한 이력이 있다. 프레시안 장기 연재를 바탕으로 <해방일기>, <뉴라이트 비판>, <페리스코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등의 책을 썼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와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부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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